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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16)화 (16/161)

16화

나는 반사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올려다보기가 무섭게 빗방울이 내 몸을 두드린다.

비가 더 거세질 것 같은 예감에 나는 잘 모아 놓은 약초들을 천으로 잘 감쌌다. 말려야 하는 약초들이 많은데 비에 젖으면 곤란했다.

“카온. 비가 더 거세지기 전에 내려가자.”

나는 하산할 마음을 먹고 주위를 둘러보며 카르시온을 찾았다. 그런데 그새 어디 갔는지 카르시온은 주변에 없었다.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먼저 내려갔을 리는 없는데.

“카온?”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의 이름을 다시 한번 부르자, 순간 카르시온이 뿅 하고 내 눈앞에 나타났다.

“불렀어, 리엔? 미안. 내가 조금 늦었지.”

나는 놀라 눈을 깜빡거렸다. 이름 한번 불렀다고 진짜 내 앞에 단번에 나타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카르시온이 나타난 이후로 비 맞는 느낌이 없었다.

슬쩍 눈을 흘기니 나와 그의 주위로 투명한 막이 형성돼 있었다.

능력도 좋지.

“어디 갔었어, 카온?”

그는 대답 대신 분홍색 장미 한 송이를 내게 건넸다. 따갑지 않은 것을 보니, 미리 가시를 제거한 듯했다.

“너와 닮은 색의 꽃을 찾으려 했는데, 온 산을 뒤져도 보이지 않아서……. 그래서 나와 닮은 색의 장미를 따 왔어.”

카르시온이 얼굴을 작게 붉히며 사르르 웃는다.

“어때, 닮았어……?”

얼떨결에 장미를 받아 든 나는 미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카르시온은 분홍색 장미의 꽃말이 열렬한 사랑을 뜻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나는 멀거니 분홍색 장미를 바라보다가,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널 많이 닮았네.”

그는 이 장미를 지독히 닮았다는 것을.

* * *

조별 과제를 홀로 모두 끝마친 나는, 과제 제출일인 월요일에 조금 뜻밖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내 이를 갈게 했던 한스에게서.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의 전 애인이란 분이 사실 네 친할머니셨다고?”

“응.”

한스가 내가 들은 게 정확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왜 말을 그렇게 해.

패륜 아니냐 그거.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내 썩은 표정을 본 한스가 멋쩍은 듯 볼을 긁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 이상하긴 했나 보다.

“마음이 급해서 말이 헛 나왔었어. 뭐 그래도 할아버지는 할머니랑 이혼하셨으니까 어찌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

“어떻게 하면 그렇게 헛 나올 수 있는지…….”

“하핫. 그보다 나도 빠져 버려서 둘이서 조별 과제 했겠네? 한 명은 치……질이 도졌다고 했으니까.”

“아, 그거 말인데…….”

“미안해. 그리고 당연한 거지만 전에 말했듯 나는 이름을 빼고 제출해 줘.”

“아니, 그게 아니라 조별 과제 나 혼자 했어.”

“뭐?”

한스가 당황스러운 눈으로 아직 자리에 없는 조원들의 빈자리를 바라봤다.

“한 명은 그렇다 치고, 아밀라는 왜?”

그 여자애 이름이 아밀라였구나.

“말감이는 약속한 장소에 나오지조차 않았어. 40분을 넘게 기다렸으니 나도 기다릴 만큼 기다린 거겠지.”

“에휴, 걔가 그렇지 뭐. 고생했겠네.”

나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고생한 건 아나 보네.

한스는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조별 과제를 빠진 것이고, 그것에 대해 사과도 했다.

게다가 당연하다는 듯 이름을 빼도 좋다는 말까지.

생각보다 괜찮은 애인 것 같다.

마음속으로 한스에 대한 평가를 긍정적인 쪽으로 수정하고 있을 때, 의문 섞인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보다 ……말감? 감자까지는 알겠는데 ‘말’은 뭐야?”

“말하는 감자.”

“아밀라가 감자를 닮았나?”

“아니, 외모가 아니라 말감이의 뇌가 감자와 닮은 것 같아서.”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주름 없이 동그란 모양이 닮았잖아.”

“푸핫! 그 부분이라면 반박하기 힘들지. 아밀라가 좀 생각 없이 말을 내뱉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니까.”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한스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내 등을 팡팡 친다.

“너 생각보다 더 재밌는 애구나? 맨날 표정 없이 있어서 감정이 있긴 한지 궁금했는데.”

그냥 말로 하면 되지 대체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때리는 거람.

덕분에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지 않나. 나는 한숨을 쉬며 그의 손을 떼어 냈다.

“친한 사람이랑 있을 때는 나름 웃는 편이야. 약초학 수업 시간에는 굳이 웃고 있을 필요 없잖아. 웃을 일도 없고.”

한스는 떼어진 손이 무안하지도 않은지 어정쩡한 그 자세 그대로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항상 네 옆에 있는 애 말인데…….”

“제인?”

“짧은 밀색 머리카락에 활발한 애.”

“……제인 맞는 거 같은데. 왜? 혹시 관심 있어?”

“어떻게 알았어? 제인이라니. 와, 이름도 예쁘네. 걔 완전 내 이상형이더라.”

그가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모습에 나는 빠르게 정색했다.

“너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괜찮은 애 취소.

감히 천사 같은 제인을 노리다니.

제인은 자고로 ‘영 앤 리치 톨 앤 핸섬’한 사람과 만나야 한다. 고작 ‘영’만 충족시키는 주제에. 건방진 것.

“엑, 갑자기? 아니,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거야?”

한스가 억울한 표정으로 따져 물었지만, 나는 너의 말 따위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를 무시했다.

* * *

“조지 교수님. 과제 제출하러 왔습니다.”

“들어와라.”

리엔은 조지 교수의 허락에 차분히 문을 열고 조지 교수의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약초를 보던 중이었는지 조지 교수는 평소에는 쓰지 않던 안경을 끼고 있었다. 피곤에 전 모습이 반 폐인을 연상케 한다.

생각해 보니 연구실을 들어오기 전 걸어 다니는 시체 따위를 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 연구실에서 나온 사람들인 것 같다.

학생이라 쓰고 교수님의 노예라고 읽는 사람들.

리엔은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나는 나중에 석사, 박사 과정 같은 거 밟지 말아야지. 절대.’

“줘 봐라.”

조지 교수가 손을 내밀어 리엔이 들고 있던 과제물을 반쯤 채가다시피 가져갔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대충대충 넘겨본다.

교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리엔의 과제물에 시선을 뗐다.

“채점 끝났으니 가져가. 너희 조는 F다.”

그는 가져가라고 해놓고 리엔의 과제물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가져가려면 허리를 굽혀 주워 가라는 뜻이 명백히 보이는 행동이었다.

리엔은 바닥에 널브러진 과제물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조지 교수와 눈을 맞췄다.

그녀는 울컥 차오르는 분을 삼키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왜죠?”

조지 교수는 조용히 끼고 있던 안경을 탁, 소리가 나게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걸 몰라서 묻나? 아주 재미있는 짓을 했군. 차라리 길가에 널리고 널린 잡초를 뽑아 오는 게 점수 면에서는 더 좋았을 거다.”

“죄송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아요.”

조지 교수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원래도 인상이 퍽 좋은 편은 아니었던지라 험악한 분위기가 풍긴다.

“말귀가 통하지 않는군.”

“일부러 흔하지 않은 약초들만 골라 작성했어요. 산에 널린 약초가 아닌 이상, 마물 서식지에 필수로 들어가야 하기에 교수님도 부러 조별 과제로 내신 거 아닌가요?”

“그래, 그랬지. 하지만 나는 너희끼리 과제를 해결하라고 했지, 제삼자의 도움을 받아도 된다고는 하지 않았다.”

제삼자?

어쩌다 보니 카르시온과 같이 마물 서식지에 들어가긴 했으나, 약초는 모두 리엔의 손으로 직접 캔 것이었다.

심지어는 카르시온이 약초를 마법으로 한 번에 뽑아 주겠다고 한 제안까지 거절했다. 상처 없이 채집하기 위해서.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의 도움은 받지 않았어요.”

“그럼 저 말도 안 되는 정보 수준은 뭐라 해명할 거지?”

“네?”

“3번째 페이지의 라넌 큘러스(Ranunculus).”

리엔은 조지 교수가 페이지까지 세세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작게 놀랐다.

너무 짧은 시간 동안 보길래 제대로 읽었을 거라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너희 조가 적은 그 약초의 긴장 완화 효능은 불과 일주일 전에 밝혀진 사실이다. 너희 같은 시니어 1학년 애송이들이 알고 적었을 리 없어.”

‘그전에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는데요.’

리엔이 황당한 마음에 말없이 멀거니 서 있자, 조지 교수가 혀를 찼다. 그는 리엔이 거짓말한 사실을 들켜 당황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의심스러운 건 그뿐이 아니다. 아스포델도 그렇고, 마로니에나 라스피 등의 약초는 또 어떻게 구한 거지? 고작 시니어 1학년 애송이가 채취했다고는 믿기지 않는 약초들뿐이군.”

‘거기서 잘만 자라던데요.’

하긴, 자신이 조지 교수였어도 다소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저 약초들은 웬만큼 숙련된 약초가가 아니면 서식지를 발견하는 것조차 어려운 종류였으니까.

리엔은 조지 교수가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후 금세 화를 풀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널브러진 과제물을 주웠다.

리엔이 교수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라넌 큘러스의 긴장 완화 효능을 이제야 알아챈 머저리……가 아니라, 저는 그게 얼마 전에 밝혀진 사실인지 몰랐어요. 어렸을 때부터 너무 당연하게 알고 있던 사실이라.”

“당연히 알고 있던 사실이라고?”

조지 교수의 미간이 한층 더 깊게 파였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라넌 큘러스는 일개 관상용 꽃으로 분류되었던 약초였다.

애초에 그런 꽃을 가져다가 효능 연구를 한 것도, 보통 괴짜가 아니면 하지 않는 일이다.

바로 저 자신처럼.

리엔은 조지 교수의 구겨진 표정에 신경 쓰지 않고 입을 열었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약초들도 모두 아카데미 뒷산에서 채집한 거 맞아요. 그거에 대해서라면 계속 의문을 제기하신다고 해도 제가 더 드릴 말은 없네요. 저는 그곳에서 캔 게 맞으니까.”

리엔의 말에, 되레 조지 교수가 당황했다. 저의 찌푸린 표정을 보고도 당당함을 보이는 학생은 보기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 제 눈앞에 있는 학생은 어렵기로 소문난 중간 편입 시험에 통과해 들어왔다.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고.

하지만 처음 기대했던 것과 달리 리엔은 수업 시간에 매일같이 잠만 청했다.

일어나 있어도 멍한 얼굴로 듣는 둥 마는 둥 하거나.

그 모습에 조지 교수는 망할 동료 교수진들이 기어코 시험 문제까지 유출했구나 했다.

조금 이상한 구석은 있었다.

리엔은 자신이 가끔 귀한 정보를 거론할 때면 귀신같이 알고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는 것.

제가 말한 것이 귀한 정보인지 아닌지 모를 것이 분명한데도.

순간 조지 교수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스쳤다.

설마.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 듣는 둥 마는 둥 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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