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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17)화 (17/161)

17화

조지 교수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고 있을 때, 리엔이 무덤덤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저희 조원들은 다 사정 때문에 참석하지 못해서 저 혼자 했어요. 과제물 제일 앞쪽 페이지 보시면 제 이름만 쓰여 있을 거예요.”

리엔이 앞 페이지에 자신의 이름만 적혀 있는 것을 교수에게 보여 줬지만, 그의 눈에는 이름이고 뭐고 들어오지 않았다.

“……혹시 ‘시고르 자브초’의 효능도 알고 있나?”

과제물에 쓰지 않은 약초를 거론하는 교수의 말에 리엔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저를 시험하는가 싶어 알고 있는 지식을 꺼냈다.

“자브초과 약초죠. 혈액 순환에도 좋고, 정력에도 좋고. 하지만 남용하면 몸에 독소가 쌓이는 부작용이 있는 거로 알아요.”

시고르 자브초가 정력에 좋다는 사실은 정말 극소수의 약초가들만 알고 있는 제한된 정보였다.

약초의 무분별한 채집을 막기 위해서.

한두 명이 아니지 않은가, 정력에 좋다고 소문만 났다 하면 길가에 난 잡초라도 모조리 뽑아 달여 먹을 사람들이.

심지어 여러 약초와 배합하면 피부미용에 즉각적인 효과도 볼 수도 있었으니 가히 꿈의 약초라고도 할 수 있었다.

조지 교수라면 이미 알고 있는 정보일 것 같다고 생각한 리엔은 거리낌 없이 그 사실을 입에 담았다.

리엔의 답을 들은 조지 교수는 덜덜 떨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심각했지만, 어쩐지 환희에 차 보이기도 했다.

그가 큼큼대며 목을 가다듬는다.

“내가 큰 오해를 한 것 같군. 무작정 점수를 준 것과 과제물을 던져 버린 것에 대해서는 사과하마.”

조지 교수가 빠르게 사과하고 제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에, 리엔은 퍽 의외라고 생각했다. 분명 좀 더 고집 있는 성격인 줄 알았는데.

“점수는 두 번 볼 것도 없이 ‘A+’다. 다른 조원들이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도 반영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조치였지만, 리엔은 그에게 고개를 꼬박 숙이며 인사했다.

리엔이 ‘이제 나가도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실행에 옮기려는 순간, 조지 교수가 할 말이 남아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

“자네, 졸업하고 내 밑에서 일해 볼 생각은 없나?”

전혀 예상치 못한, 날벼락과 같은 말이었다.

‘석사, 박사 과정은 절대 밟지 말아야지’라는 다짐을 한 지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리엔은 크게 기함하며 소리쳤다.

“절대 싫어요!”

그러고는 혹여나 조지 교수가 저를 붙잡을까 봐 인사도 없이 부리나케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하지만 리엔은 몰랐다.

그녀는 이미 조지 교수에 눈에 들어 버렸다는 걸.

* * *

“응? 인사만 시켜 줘도 된다니까? 그 후에는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싫다고 했지.”

나는 성가셔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부탁을 단호히 거절했다. 한스는 그날 이후 틈만 나면 내게 제인을 소개해 달라는 말을 했다.

제인이 이상형이라는 말이 농담이 아니었나 보다. 물론 나는 그 당시에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헉. 소개해 준다고? 고마워! 역시 너밖에 없다. 그래서 날짜는 언제로 잡을까?”

“교수님 발싸개 같은 놈. 설레발도 그 정도면 병이야.”

“헉, 거지도 아니고 교수님 발싸개라니. 이젠 그런 심한 욕도 서슴지 않고 하는 거야?”

그는 조별 과제 이후 내게 퍽 친근하게 굴었다.

처음에는 제인 때문인가 싶었었지만 내가 질색하는 반응을 즐기는 걸 보면 딱히 그것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심한 욕이라고는 하지만, 저 생글생글 웃는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

나도 그를 완전히 쳐내진 않고 있었다.

약초학 시간이 덜 지루한 점도 있었고, 무엇보다 한스는 막대하기 좋다고나 할까.

“한스. 하나만 선택해 봐. 토마토 맛 토 vs 토 맛 토마토.”

“뭐? 그게 무슨…….”

“빨리.”

“구, 굳이 고르라면 토 맛 토마토?”

제인과 반대되는 입장이라니.

“너는 그래서 안 돼.”

“에엑?”

나는 한스에게 인제 그만 네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하려 입을 달싹였다.

그때였다. 익숙한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리엔!”

시선이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열린 교실 창문 사이로 제인이 보인다.

그녀는 사뭇 충격받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제인의 등장에, 그녀의 표정에 신경 쓸 새도 없이 급히 한스를 바라봤다.

역시나, 그의 시선은 제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 자식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가다시피 제인에게 향했다. 한스가 뒤에서 나를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뒤늦게 들려온다.

여기서 그에게 쫓아오지 말라고 말해 봤자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게 뻔했다. 그래서 재빨리 교실 문밖으로 나온 후 문을 쾅 하고 닫아 버렸다.

“억!”

누군가 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에 옅게 미소를 그려 내며 그녀를 바라봤다.

“제인, 무슨 일이야?”

내가 무슨 일이냐고 질문하기가 무섭게 제인이 반문했다.

“그냥 잠깐 얼굴이라도 보려고 들렀는데……. 방금 그 앤 뭐야?”

“……누구?”

“방금 네 자리에서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던 애!”

화기애애했던 대화라고 말하기에는 고운 말이 오가진 않았던 것 같은데.

하지만 그녀의 오해를 풀어 주려면 제인에게 한스에 대해 설명해야만 했고, 그것은 곧 그가 원하던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았다.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짧지만 길었던 시간이 흐르고, 제인의 눈매가 매섭게 치켜 올라갈 무렵.

아무리 생각해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자 나는 최후의 수단을 꺼내 들었다.

선즙필승.

나는 과거에 있었던 온갖 슬픈 일들을 생각하며 빠르게 눈가를 촉촉하게 만들었다.

“……제인은 몇 시간 만에 만난 나보다 처음 보는 그 애의 안부가 더 궁금한 거야?”

내 촉촉한 눈망울과 떨리는 음색을 마주한 제인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아냐! 나는 그저……!”

“그래 그럴 수 있지. 내가 뭐라고.”

애처로운 표정 연기에, 안절부절못하더니 그녀는 결국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걔한테는 관심도 없었고 앞으로도 절대 없을 예정이라고 땅땅 못을 박았다.

나는 그녀의 품 안에서 흐뭇한 미소를 걸쳤다.

당분간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왜 벌써 시험 기간인 거지.”

뜬금없다고?

나도 안다. 하지만 내게 이건 정말 중요한 사항이었다.

아레나 아카데미는 한 학기에 딱 한 번만 시험을 봤다.

사실 시험을 보는 것 자체는 크게 상관없다.

문제는 시험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방학이 시작된다는 거다.

……돌아가지 않고 최대한 버텨야겠지.

편지로 매번 내가 너무 보고 싶다고 하소연하는 이모께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절로 한숨이 나오려던 때, 같이 복도를 걷고 있던 제인이 한껏 울상을 지으며 소리쳤다.

“으아아아, 교수님 바보! 내가 공부한 거 하나도 못 맞추셨어!”

“그러게. 내가 공부한 것도 많이 틀리셨더라.”

공부 좀 더 하시지.

……학생 수준 공부.

“리엔 너는 나름 잘 본 것 같던데 뭘. 오늘 가채점한 내 시험지는 정말 엄청났다고.”

“교수님 사정으로 회계만 2주 일찍 본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다른 과목은 공부할 시간이 남은 거잖아?”

“그건 그렇지만 벌써 한 과목을 날렸다는 게 정신적인 타격이 큰걸.”

“방학 동안 한 번 더 수강할 정도는 아니지?”

제인은 머릿속에 과락한 과목을 다시 재수강하는 미래를 그려 본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으, 아무리 못 봤어도 나는 두 번째 보는 시험인데 그 정도는 아니야.”

“음. 그건 좀 아쉽네.”

“너무해애…….”

저런. 아쉽다는 말은 진심으로 한 말이었는데.

나는 방학 동안 아카데미를 떠나지 않을 예정이었으니까.

제인과 시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동아리실 앞이었다.

“나 먼저 들어가 볼게, 제인. 너도 동아리 시간 잘 보내고 이따가 기숙사에서 보자.”

“응! 리엔은 오늘도 힘내고! 아자아자! 힘들면 언제나 내게 털어놔도 좋아.”

제인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계속 뒤를 돌아보며 내게 쉼 없이 응원을 날렸다.

오늘도 저러네.

분명 동아리실에서 잠만 자다 온다고 몇 번이나 말했으나, 그녀는 항상 내가 무슨 큰일이라도 하다 오는 것처럼 응원했다.

뭐,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으니.

입가에 살짝 미소를 걸치고 제인을 바라보다가 동아리실의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런데 손잡이를 돌리려 손에 힘을 주자마자 동아리실 안에서 ‘쾅’하는 큰 소리가 귀를 때렸다.

갑자기 안으로 들어가기 싫어졌다. 또 둘이 이상한 거로 싸우는 건가.

나는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려, 조심스럽게 문에 귀를 밀착시켰다. 희미하게 그들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오늘도 신성한 동아리 시간에 늦은 거에 대해 변명해 봐, 피오르.”

“내가 오늘은 정말 제시간에 오려고 했는데, 다른 애들이 시험지 좀 보여 달라고 하는 바람에…… 하하.”

“변명 끝?”

“미안.”

“피오르.”

“응.”

“네가 이 말을 들어 본 적 있나 모르겠다.”

“무슨 말?”

“살인 한 번이면 참을 인 세 번을 면한다.”

“……말의 순서가 반대로 된 거 아냐?”

“하하, 못 들어 봤으면 어쩔 수 없네.”

“악! 너 그 마법진은 뭐야! 당장 캔슬하지 못해?”

피오르의 당황스러운 외침이 문 사이로 선명하게 들려왔다.

물론 카르시온이 진짜로 피오르를 해칠 일은 없겠지만, 저 비명을 보아하니 확실히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나도 이틀째 지각인데 어떡하지. 심지어 오늘은 피오르보다 늦게 왔다.

카르시온이 더 화나기 전에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사과해야겠다.

벌컥.

“늦어서 미안해, 카온.”

껌뻑껌뻑.

나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당황하며 눈을 껌뻑였다.

아까까지 비명을 지르고 있던 피오르는 바닥에 죽은 듯 엎드려 있는 상태였다.

카르시온은 온화한 얼굴로 엎드린 피오르의 등을 검지로 쿡쿡 찌르고 있었고.

“리엔 왔어?”

카르시온이 나를 보더니 더없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달려왔다. 쓰러져 있는 피오르를 내버려 둔 채.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카온. 피오르 죽은 거 아니지?”

“그냥 자는 거야. 피오르가 갑자기 잠이 온다면서 바닥에 눕는 바람에 입 돌아갈까 봐 깨워 주는 중이었어.”

“자는 중이라고?”

그럼 방금 밖에서 듣고 온 목소리는 누구의 목소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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