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아무리 봐도 카르시온이 피오르를 때려눕힌 후 변명하는 거로밖에 안 보인다.
하지만 피오르 몸에 외상은 전혀 없어 보였다.
결정적으로 카르시온은 피오르와 투덕거려도 항상 동아리실만 엉망이 됐을 뿐, 실제로 외상을 입힌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바닥에 시체처럼 누워 있는 피오르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카르시온으로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그럼 빨리 소파에 눕히든가 깨우든가 하자. 바닥에 저 상태로 있으니까 시체 같아.”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연히 그래야지.”
카르시온은 미동 없이 누운 피오르에게 다가가 이마에 손을 올리더니 마법진을 생성했다.
‘우웅’하는 마법진이 발동하는 소리가 들린다.
애를 깨우라니까 웬 마법을 걸고 있어?
“카온. 지금 뭐 하는 거야?”
“피오르가 피곤한 것 같길래 기력이 솟는 마법을 걸어 줬어.”
카르시온은 내게 고개를 돌려 무해한 얼굴로 마법진을 발동시킨 이유를 설명했다.
그럼 그렇지. 카르시온은 누굴 해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커헉!”
얼마 지나지 않아 피오르가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감싸며 벌떡 일어났다.
“잘 잤어, 피오르?”
“카르시온 이 미ㅊ……!”
“쉿. 듣는 사람도 있는데 일어나자마자 욕하지 말고. 내가 잘 자고 일어났냐고 물었잖아, 피오르.”
피오르는 카르시온의 나긋나긋한 어조에 경악한 얼굴로 굳어 있다가 문 앞에 멀거니 선 나를 흘끔 바라봤다.
“……역시.”
그리곤 카르시온과 다시 눈을 마주치는가 싶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피오르는 카르시온이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나더니 비틀거리며 몇 발자국 걸어가 내 보금자리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자리 뺏겼다.
“리엔 너는 언제 왔어?”
그가 제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물어왔다. 나는 피오르의 질문에 양심이 찔려 잠깐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방금.”
내 대답에 피오르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카르시온을 바라본다. 어디 한번 나에게도 뭐라고 해 보라는 얼굴이었다.
피오르가 연속으로 늦는 날에는 항상 카르시온에게 일방적으로 혼나곤 했으니, 나도 오늘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요즘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는 거야, 리엔?”
그런데 카르시온은 내게 화를 내기는커녕, 걱정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이에 피오르는 체념 어린 얼굴로 ‘그럼 그렇지. 내가 너한테 뭘 바라겠냐.’라고 작게 중얼거린다.
카르시온은 피오르와 나를 이렇게 대놓고 차별하면 내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나 본데, 그건 크나큰 오예다.
오예.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별건 아니고 오늘 시험 본 거 가채점하느라 좀 늦었어. 미안해.”
“아아. 회계 시험? 너무 쉬워서 채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던데, 리엔은 참 꼼꼼하네.”
“…….”
그 문제들이 쉬웠다고?
맞다. 카르시온은 마법사였지.
그 어려운 텔레포트를 어린 나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펑펑 쓸 정도면 재능도 재능이지만 머리가 보통 좋은 것이 아닐 것이다.
왠지 모르게 분한 느낌이 들어 입술을 앙다물고 희망 어린 얼굴로 피오르를 바라봤다.
피오르는 전공과목이 검술이라고 했으니 나를 이해해 줄 거……
“그러게. 그 쉬운 거 틀릴 게 뭐가 있다고 시험지를 보여 달라고 하는지 이해가 좀 안 됐는데, 생각해 보니 리엔처럼 꼼꼼한 애는 그럴 수도 있겠다.”
라는 건 내 생각이구나.
같이 놀았으면서 왜 나만……?
나는 실감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난 후, 굉장히 공부를 게을리했다는 것을.
변명이지만, 정신적으로 편해지니 몸도 편해져서 공부에도 자연스럽게 손을 놨던 것 같다.
아카데미 생활이 생각보다 퍽 즐거웠기도 하고.
안 되겠다.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지.
“얘들아.”
“응, 리엔. 아까 복도를 잠깐 지나가다가 사탕이 보이길래 충동적으로 사 왔는데 먹을래?”
카르시온은 예쁘게 포장된 막대사탕을 들고 해맑게 웃으며 헛소리를 했다.
도대체 아카데미 복도에서 누가 사탕을 팔고 앉아 있어.
나는 그가 내민 사탕을 가볍게 옆으로 치우며 입을 열었다.
“나 오늘부터 시험 전까지 2주 동안 동아리 불참하려고.”
툭.
카르시온이 들고 있던 막대사탕이 힘없이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 * *
부담스러운 시선이 느껴진다.
나는 보던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내 맞은편에는 익숙한 분홍 머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동아리에 불참 선언을 하고 났더니 그때부터 계속 이 모양이다. 내가 어미 새라도 된 듯 어딜 가든지 계속 따라오려고 하고.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카르시온.”
그가 서운하다는 듯 샐쭉한 표정을 하며 입을 열었다.
“카온.”
까다롭긴. 겨우 두 글자 차이인데.
“그래, 카온. 네가 왜 여기 있어?”
“뭐 하긴. 공부하러 왔지.”
확실히 지금 우리가 있는 장소는 아카데미 내 도서관으로, 그의 답은 도서관의 존재 목적에 부합한 대답이긴 했다.
말만.
나는 손가락으로 카르시온이 들고 있는 책을 가리켰다. 그가 들고 있는 책은 방향이 거꾸로 향해 있었다.
“거꾸로 들고 있는 책이나 바로 하고 말하는 게 어때.”
심지어는 도서관에 있는 동안 저 책은 다음 장으로 넘어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저 정도면 거의 외우겠는데……?
카르시온이 조용히 뒤집힌 글씨를 확인하고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인다.
“가끔 거꾸로 읽기도 해.”
뻔뻔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적어도 무안해하는 기색은 보일 줄 알았는데.
“거짓말 마. 누가 책을 거꾸로 읽는다고.”
“내가.”
그는 씨익 웃으며 내 쪽에서 바로 보이도록 책을 펼쳐 보였다. 덕분에 카르시온은 책을 거꾸로 보고 있는 형태가 되었다.
“마나는 모든 생명체의 원천이 되는 힘으로서, 자연의 법칙에서 어긋나 그 힘이 뒤틀리게 되면 마물이 탄생한다. 마나가 자연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가끔 거꾸로 읽는다는 게 거짓이 아니었는지, 그는 망설임 없이 책을 빠르게 읽어 나갔다.
“쉿, 그만. 너무 크게 떠들면 민폐잖아.”
황급히 내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으며 주위를 살폈다.
사실 아레나 아카데미의 도서관은 자유로운 토론이 허용됐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해서 괜히 눈치가 보였다.
다행히 우리가 앉은 곳 주위로는 사람들이 앉지 않은 탓인지 우리를 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어. 그러고 보니 진짜로 뭔가 이상하다.
카르시온이 있는데 왜 아무도 이쪽을 힐끔거리지 않는 걸까.
그가 아니더라도 평소 나를 향하던 시선조차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도서관에 있는 모두가 책에 코를 박고 있었다.
책에서 시선을 떼면 큰일이라도 날 듯한 분위기.
다들 우리 쪽에 신경 쓸 새 없을 만큼 열심히 공부하는구나……!
따라잡히지 않으려면 나도 어서 공부해야 할 듯했다.
나는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사고가 정지된 듯한 카르시온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에게서 도망치려면 지금이 적기인 것 같았다.
* * *
“카온.”
“응, 리엔.”
도서관에서 카르시온을 놓고 도망쳤지만, 어느새 그는 내 옆에서 같이 걷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뚝 멈추고는 카르시온을 응시했다. 그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접으며 푸스스 웃는다.
“이제 쫓아오는 건 그만하고 네 할 일을 하러 가면 안 될까?”
“……내가 필요 없어진 거야?”
카르시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누가 보면 실컷 이용하고 버린 줄 알겠다.
“모르는 문제 있으면 내가 최선을 다해 알려줄게, 리엔.”
“……그건 좋네.”
하지만 이렇게 같이 다니는 건 좋지 않았다.
카르시온이 날 좋아한다는 소문에 신빙성만 더해 줄 뿐.
그렇지 않아도 요즘 소문이 더욱 퍼져 곤란한 상황이었다.
분명 카르시온에게 소문에 대해 말했을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아니었는데…….
왠지 그에게 소문에 대해 털어놓은 후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느낌이었다.
마치 카르시온이 작정하고 소문을 퍼뜨리기라도 한 것처럼.
물론 진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나는 둘째 치고, 카르시온 자신에게 타격이 오는 일이니까.
저런 소문이 퍼져 봤자 이득 되는 건 하나 없지 않나.
어쨌든 아카데미에 쫙 퍼진 소문 때문에 어느 곳에서든 나만 나타났다 하면 쳐다보고 수군거리기 바빴다.
가끔은 말감이처럼 소문이 진짜냐고 물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것에 대한 답변을 나는 썩은 표정으로 대신해 주었다.
아, 피곤해.
이러다 나중에 리시안셔스 공작님이나 공작 부인이 나를 찾아오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네가 우리 가문의 귀한 아들을 홀렸냐고.
뺨 맞는 건 싫은데. 만날 때 미리 가득 찬 물을 앞에 둘까…….
아 물론 화상 입으면 안 되니까 찬물로.
화가 난 상태에서 가득 찬 물을 보면 뿌리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오르는 건 인지상정. 그 유혹을 버텨 내기 힘들지 않을까.
“리엔?”
카르시온의 의문 어린 목소리에 겨우 정신이 돌아왔다.
상념이 너무 길었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걱정해서 뭐 한담. 상상력도 참 풍부하지.
나는 픽 웃으며 주먹으로 그의 복부를 가볍게 툭 쳤다.
“귀여운 표정이나 짓고. 영악하긴.”
그러고는 카르시온이 쫓아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지금 내가 가는 곳은 여자 기숙사이고, 그곳은 금남의 구역이니 쫓아오지 못할 것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그러고 보니 카르시온은 이미 금남의 구역에 침입한 적 있는 전과자였다.
이 미친놈이.
나는 황당한 얼굴로 기어이 기숙사 방 안까지 따라온 카르시온을 바라봤다.
“여기까지 따라오면 어떡해. 나는 그렇다 치고, 내 룸메이트한테는 무슨 민폐야? 전처럼 나 혼자 쓰는 공간이 아니란 말이야.”
“그럼…….”
“나 혼자 쓰는 방이라도 안 돼.”
뭐라 말을 하려던 카르시온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조용히 기숙사 안에 있던 제인을 바라본다.
“실례야?”
“아뇨. 실례일 리가요.”
제인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실례가 아님을 피력했다. 과하게 흔드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말이 거짓말이라고 여기기에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고 제 의견을 당당히 말하는 제인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았다.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오갔나 의심이 짙어질 무렵.
카르시온이 해맑게 웃으며 제인에게 향했던 시선을 내게 돌렸다.
“실례 아니래.”
……나한테 실례인데.
나는 결국 내려놓았던 책가방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카르시온의 셔츠 끝자락을 잡았다.
그의 직진에 항복을 선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