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카르시온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침을 꿀꺽 삼켰다. 툭 튀어나온 그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오르내리는 게 선명히 보인다.
“뭐, 뭘 하려고?”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상한 생각 마. 동아리실로 텔레포트 해 달라고 잡은 거니까. 여기는 여자 기숙사인데 나갈 때 다른 사람한테 들키면 큰일 나잖아.”
꼭 여자 기숙사가 아니더라도 같이 걸어가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소문을 입증시키는 꼴밖에 되지 않으니까.
그와 내가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는 곳은 동아리실밖에 없었다.
카르시온은 내가 잡은 셔츠 자락을 내려다보더니 갑자기 괴롭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흑. 리엔 조그만 손 너무 귀여워어…….”
“헛소리 말고. 혹시 둘이 같이 이동하는 거는 어려워?”
내 질문에 그는 일그러진 얼굴에 약간 곤란한 빛을 띄웠다.
“그런 건 아니야.”
“그럼?”
나는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카르시온을 바라봤다.
그는 요리조리 눈을 굴리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리엔, 네가 먼저 텔레포트 해 달라고 한 거다.”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카르시온이 대뜸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내 얼굴은 자연스레 그의 가슴팍에 파묻혔고, 시야는 암전되었다.
당혹스러운 마음도 잠시, 그의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려오자 실소가 터져 나왔다.
텔레포트를 하려면 신체 접촉이 필요한가 보다.
이렇게까지 많이 접촉해야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벌써 두 번째였다. 홀릴 듯한 그의 체향을 이렇게 가까이서 맡는 것도.
나는 더 깊게 그의 향을 맡고 싶단 마음에 본능적으로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너희 뭐 하냐……?”
불현듯 피오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히 언짢은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놀라 카르시온의 가슴팍을 팍, 하고 밀어냈다.
하필이면 피오르가 이 장면을 목격할 줄이야.
게다가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라고는 하나, 그를 꼭 끌어안았다니. 스스로가 이렇게 자제력이 없는지 몰랐다.
“테, 텔레포트 하려면 신체 접촉이 필요하대서. 이렇게 순식간에 이동될 줄은 몰랐네. 하하.”
급히 피오르를 보며 변명했지만, 그는 여전히 흐린 눈동자로 나와 카르시온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부탁인데 연애는 나가서 해 주면 안 될까. 보시다시피 난 공부 중이라.”
“그런 거 아니라니까.”
나는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적당히 피오르의 말을 부정했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 말을 할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괜히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의 맞은편에 책을 꺼내 놓으며 물었다.
“근데 피오르 너는 왜 어울리지도 않게 공부하고 있어?”
“……지금이 시험 기간이라는 걸 인지하고 하는 말이지, 그거?”
“어제까지만 해도 안 하던 애가 갑자기 책을 펼치니 하는 말이지.”
저런. 안 하던 행동을 하면 뒈질 때가 된 거라고 하던데.
곧 가겠네.
“너 죽으면 네가 동아리실에 가져다 놓은 체스판 내 거.”
“갑자기 내가 죽는 이야기는 왜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60년 후라도 괜찮으면 가져가든지.”
“고마워. 가지고 놀다가 질리면 체스 말도 네 무덤 옆에 하나하나 꽂아 놓을게.”
“농담이지?”
“글쎄.”
피오르는 내게 직접 뭐라 하지는 못하고, 호의를 원수로 갚는다는 둥 농담도 진심인 것처럼 말한다는 둥 툴툴거렸다.
그러다 피오르가 뭔가를 발견한 듯 다시 흐려진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본다. 나 또한 자연스레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돌이 되어 버린 카르시온이 멀거니 서 있었다.
부끄러워할 줄은 알았지만 저렇게 돌처럼 굳어 버릴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것도 자기가 먼저 끌어안았으면서.
텔레포트가 잘된 것을 보면 또 그럴 정신은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 내가 품에 파고들어서 그런가.
“야, 카르시온. 정신 차려.”
보다 못한 피오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르시온의 눈앞에서 짝하고 손뼉을 쳤다.
그러자 석화에서 벗어난 그가 뻣뻣한 움직임으로 고개만 간신히 피오르 쪽으로 돌렸다.
카르시온이 피오르만 들릴 듯한 아주 작은 음성으로 뭔가를 속삭였다. 그러고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기계 같은 움직임으로 동아리실을 척척 빠져나간다.
문이 닫히자 나는 곧바로 피오르에게 물었다.
“피오르. 카온이 뭐래?”
“몰라. 찬물로 샤워 좀 하고 올 테니까 그동안 리엔 너한테 친한 척하지 말라는데?”
피오르는 의리 없이 내게 카르시온이 했던 말을 술술 불었다. 그러고는 별 미친놈을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문 쪽을 응시한다.
“샤워? 갑자기 샤워는 왜?”
“글쎄. 내가 그걸 알면 이런 표정을 짓지도 않았겠…….”
피오르는 말을 하다 말고 뭔가 깨달은 듯 입을 서서히 벌렸다. 그가 당황한 표정으로 다급히 입을 연다.
“너, 너랑 껴안은 게 긴장돼서 땀을 많이 흘렸나 봐. 워낙 깔끔 떠는 성격이니 찝찝했겠지.”
그런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생각했다. 다음에 직접 제조한 땀 억제제를 좀 나눠줘야겠다고.
* * *
동아리실은 책장 넘기는 소리와 깃펜으로 무언가 끄적이는 소리만 들려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피오르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책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로 입을 열었다.
“리엔.”
“응.”
“생각해 보니까 좀 억울한 거 있는데. 내가 동아리실에서는 펑펑 노는 것처럼 보여도 열심히 공부하는 편이야.”
“누가 뭐래?”
“……아까 어울리지도 않게 공부한다며.”
사뭇 울적해 보이는 음성에 리엔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피오르도 어느새 책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카르시온 그 자식과 달리 노력파라고. 특히 전공인 검술은 뒤처지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데.”
“그건 좀 의외네. 너도 카르시온처럼 검술 천재쯤 되는 줄 알았는데.”
리엔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느끼는 바를 솔직히 표현하자 피오르가 픽 웃었다.
“그 괴물이랑 비슷하게 생각해 줬다니 고맙네. 뭐, 그래도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못하는 건 아냐.”
“순위로 따지면?”
“다섯 손가락 안에서 벗어난 적 없을 정도?”
리엔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피오르를 바라봤다.
검술을 전공하는 사람의 수는 아카데미에서 압도적으로 많았다.
즉, 다섯 손가락 안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을 정도면 절대 재능이 없다고 말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뜻이다.
잠시 후 집 나간 어이를 데려온 그녀는 입을 열어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너는 자기 자랑을 아닌 것처럼 잘 포장해서 말하는구나. 그 처세술 나도 좀 가르쳐 줄래? 수강료는 카온이 사랑의 매로 대신 지불해 줄 거야.”
“딱히 자랑하려고 꺼낸 말은 아니었어.”
“그래, 그렇겠지.”
리엔은 피오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다시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다 팔을 잘못 움직였는지 옆에 두었던 펜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저 멀리 데구루루 굴러가는 펜을 보며 리엔은 극심한 귀찮음을 느꼈다.
‘저렇게 멀리 갈 건 또 뭐람.’
그냥 대충 펜을 쓰지 않고 공부하자고 결심하고 있을 때였다. 피오르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펜을 주위 그녀의 앞에 놓았다.
리엔은 상당히 오묘한 표정이 되어 제 앞에 놓인 펜을 바라봤다. 피오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그래? 어디 부러졌어?”
“아니. 새삼스럽지만 어쩌다 들어 온 이 동아리에 너와 카온처럼 착한 애들을 만난 건 어쩌면 정말 천운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어.”
“푸하하, 그게 뭐야.”
피오르는 간만에 정말 웃긴 소리를 들었다는 듯 하하거리며 웃다가, 별안간 뚝 웃음을 멈췄다.
그의 표정이 이상해진다.
“잠시만, 리엔. 나는 그렇다 치고 설마 카르시온이 진심으로 착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카온이 뭐가 어때서? 까칠하고 예민해 보여도 천성은 착하잖아.”
???
피오르의 얼굴에 물음표가 가득 떠올랐다. 그는 마치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들은 듯 경악스러운 표정을 했다.
“카르시온이 나한테 하는 짓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그야…… 너희 둘은 불x 친구니까 그런 거 아냐?”
피오르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맙소사. 진짜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카르시온이 리엔 앞에서 내숭을 부리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리엔이 카르시온의 무성한 소문을 듣고도 그의 본래 성격을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카르시온 이 새끼는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피오르가 제 친구의 미래를 걱정하는 동안, 리엔은 공부에 대한 집중이 깨져 자신과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아, 공부 싫어. 약초 백과사전이라면 수백 번도 더 읽을 수 있는데…….’
그녀의 시선이 안락한 소파와 포근한 담요로 향한다. 분명 물건들은 가만히 있는데, 꼭 저를 향해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
리엔은 고민 끝에 딱 30분만 잠을 청하기로 하고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향했다.
그새 담요까지 고른 리엔이 소파에 벌렁 드러눕는다.
“피오르. 나 30분 뒤에 깨워 줘.”
“뭐? 하나도 안 졸려 보였는데 이렇게 갑자기 자 버린다고?”
“그래, 고마워. 믿고 있을게. 아, 참고로 늦게 깨우는 건 괜찮은데 일찍 깨우면 조금 화낼지 몰라.”
“……리엔? 진짜 잘 거야?”
피오르는 황당한 마음에 그녀의 눈앞에 대고 손을 몇 번 휘저었다. 분명 기척이 느껴질 텐데도 미동도 없다.
그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행동력 한번 좋네.”
그는 눈을 감은 리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끼긴 했지만, 확실히 예쁜 얼굴이었다. 새하얀 피부라든지 오목조목한 이목구비라든지.
성격도 알면 알수록 매력 있었다. 무뚝뚝해 보여도 누구보다 장난기가 가득한, 또 은근 물렁한 구석이 있는.
성격 파탄자인 카르시온이 그녀의 앞에만 서면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구는 것도 이해가 갔다.
비단 카르시온뿐만 아니더라도 함께 지낸다면 리엔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리엔에게 가진 호감이 다른 것으로 발전하지 않기를 바랄 뿐.
한편, 잠을 청하려 눈을 감은 리엔은 머릿속에 문득 카르시온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카온 얘는 샤워가 아니라 반신욕을 하고 있나. 왜 이렇게 안 와?’
‘……시간이 꽤 지났으니 곧 올 것 같은데. 지금 이 모습을 보면 줄곧 놀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 아냐?’
그러면 좀 억울할 것 같았다.
리엔은 잠을 청하는 것을 카르시온이 온 뒤로 미뤄두기로 하고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가, 갑자기 뭐야.”
기겁하는 음성에도 리엔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어나 흐느적흐느적 책상으로 향했다.
피오르는 털썩 의자에 앉은 그녀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잔다며?”
“너 때문에 잠이 다 깨 버렸으니까 책임져.”
“뭐?”
피오르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제가 줄곧 리엔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