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농담이었는데 왜 이렇게 놀라? 그냥 공부 좀 더 하다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졸리면 자려고 아껴 둔 거니까 신경 쓰지 마.”
말은 그렇게 해놓고 공부하기 싫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리엔이었다.
처음 동아리 불참 선언을 했을 때와 확연한 차이가 나는 태도.
리엔이 대뜸 세상 아련한 표정을 지어냈다.
언뜻 고달픈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듯한 표정이기도 했다.
“후, 너희는 이런 거 피우지 마라.”
라는 피 같은 조언을 남기며 그녀는 마침내 닫아 놓았던 책을 펼쳤다.
리엔이 하는 양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피오르는 배를 잡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정말이지 세상에 둘도 없을 캐릭터였다.
* * *
동아리실 소파에 앉아 아직 열어 보지 않은 따끈따끈한 성적표를 꺼내왔다.
방학 바로 전날에 성적표를 나눠 주다니…….
네 성적표를 한번 보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방학 동안 공부 좀 하라 뭐 이런 뜻인가.
나는 작게 투덜거려 준 후 성적표를 펼쳤다.
성적은 예상한 만큼 받아서 그런지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만 총 학점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잘 나와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혹시 뭔가 잘못된 거 아닌가 하며 성적표를 다시 한번 훑어 내렸다.
“……어?”
동아리 점수가 만점이다.
내가 동아리에서 한 것이라고는 카르시온, 피오르와 놀거나 잠을 잔 것뿐인데.
가만히 놀고만 있어도 동아리 실적 점수를 채워 주겠다고 한 것이 거짓말은 아니었나 보다.
근데 이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채워 놓을 줄이야.
사실 아카데미에 별별 이상한 동아리가 많은 만큼, 실적 점수를 채우는 방법은 꽤 다양했다.
연구나 활동 내용의 보고서 또는 소논문을 쓴다든지. 교내 외부를 가리지 않고 동아리와 관련된 대회에 입상하든지.
마물을 토벌하거나 괄목한 성과를 보여 교수님의 인정을 받든가 하는 방법도 있었다.
“음. 우리 동아리는 아마 전에 토벌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했으니, 그걸로 실적 점수를 채웠을 것 같은데…….”
카르시온이 처음부터 놀아도 된다고 하긴 했으나, 괜히 양심이 콕콕 찔려왔다. 난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따지고 보면 이것도 조별 과제 비슷한 것일 텐데.
이렇게 되면 나는 말감이와 아이들을 욕할 자격이 없었다.
다음 학기에는 토벌에 데려가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동아리 점수 옆에 적혀 있는 동아리명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한 학기가 지나도록 동아리 명조차 모르고 있었다.
어디 보자 우리 동아리 이름이,
“피고동?”
피에 물든 고통의 동아리, 뭐 이런 건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동아리명의 풀네임을 추론하는데 순간 한 동아리가 머릿속에 스쳤다.
불과 몇십 초 전까지도 생각하고 있던 그 동아리가.
풀네임 모기 고문 동아리. 줄여서 모고동.
“설마, 피고동이 피오르 고문 동아리의 줄임말은 아니겠지?”
나는 현실을 부정하며 피고동의 다른 의미를 찾기 위해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성은 ‘피오르 고문 동아리’가 틀림없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래서 둘이 눈만 마주치면 그렇게 싸웠던 건가……!
생각해 보니 내가 이런저런 일로 피오르를 타박할 때 카르시온의 표정이 흐뭇했던 것 같기도 하다.
벌컥.
때마침 동아리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는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카르시온에게 동아리명의 진실을 알려 달라고 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의외로 피오르였다.
그는 항상 제일 늦게 동아리실에 들어오곤 했는데 오늘은 어쩐 일일까.
그것도 뺨에 붉은 자국이 선명한, 누가 보더라도 ‘나 뺨 맞고 왔어요.’ 하는 얼굴로.
응? 뺨을 맞아?
나는 놀라 커진 눈으로 그의 얼굴을 살폈다.
“피오르. 너 얼굴이 왜 그래?”
“아, 이거?”
피오르는 멋쩍은 듯 발갛게 부어오른 제 뺨을 어루만졌다.
“별건 아니고. 잠시 헷갈려서 여자친구 이름을 잘못 불렀지 뭐야. 그것 때문에 어쩌다 보니까 헤어졌어.”
“뭐?”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만인의 연인 같은 느낌이었던 그에게 숨겨진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에도 놀랐지만, 겨우 그런 이유로 헤어졌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람이 살다 보면 이름 좀 잘못 부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일곱 번.”
“?”
“일곱 번 잘못 불렀거든. 오늘 부른 것까지 합치면.”
“야 이…….”
쓰레기야.
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겨우 삼키고는 흡사 변태 직전의 장구벌레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피오르를 바라봤다.
그는 부은 뺨이 아프지도 않은지 입꼬리를 씩 올려 웃고 있었다.
“굳이 왜 사귄 거야? 딱 보니까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여자친구와 헤어진 일이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작태가 그 증거였다.
“음…….”
피오르는 다소 난감한 표정을 하며 내 눈을 피했다. 그러고는 탁, 한숨을 한번 크게 내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 너는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내 진짜 성격을 어느 정도 봐 왔으니까. 나중에 분명 내 이중적인 태도에 대해 의심할 거, 미리 설명해 두는 것도 괜찮겠지.”
진짜 성격?
내가 그의 말에 의문을 느낄 새도 없이 그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나는 사실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착하지 않아. 카르시온이 매일 내게 하는 말마따나 모두 연기고 가식이지.”
놀랍게도,
별로 놀랍지 않은 고백이었다.
피오르가 겉과 속이 조금 다르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일단 그가 카르시온에게 구는 것만 봐도 그랬다.
동아리실이 아닌 곳에서의 그는 항상 얼굴에 웃음을 지우지 않고 상대를 대했다.
하지만 동아리실에 돌아오는 순간, 그의 그린 듯한 웃음은 싹 지워졌다.
감정 없이 굴었다는 건 아니다.
그는 동아리실에 들어오면 긴장을 푸는 듯했다. 웃고 싶을 때는 웃고 화내고 싶을 때는 화내는, 좀 더 자유로워진 느낌이랄까.
특히 카르시온을 대할 때는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전부 드러내는 듯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의 본모습을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 저렇게나 선명히 보이는데.
게다가 어쨌든 카르시온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착하게 군 건 맞지 않는가?
사실 따지고 보면 누구나가 가식적으로 살아간다.
피오르에게만 엄중한 잣대를 들이밀 수 없는 일이었다.
해서, 나는 별다른 감흥 없이 입을 열 수 있었다.
“알고 있었어.”
“응?”
“알고 있었다고. 네가 마냥 호구처럼 착한 게 아니란 거.”
“호구라니…….”
피오르는 떨떠름한 음색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내 성격을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왜 그 자식은…….”
“그 자식이 누군데? 혹시 카온?”
피오르가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카르시온을 가리킨 말이 맞는 듯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카온이 조금 퉁명스러워 보여도 본성이 나쁘지 않은 건 사실이잖아.”
나는 카르시온이 한 번도 피오르를 제외한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본 적 없었다.
딱 한 번, 그가 다른 사람과 함께 있던 것을 목격한 적이 있긴 하다.
넘어진 누군가를 일으켜 주던 것 말이다. 이것만 봐도 딱 답이 나오지 않는가.
카르시온과 관련해 떠도는 나쁜 소문을 믿기에는, 나 또한 거짓으로 범벅된 소문에 시달린 사람이었으니.
카르시온이 내게 더욱 착하게 구는 것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날 좋아하니까.
그러나 정말 카르시온이 소문만큼 성격 파탄자라면 내가 동아리에 들어온 지 두 번째 되는 날.
그때 내게 무심히 담요를 건넨 이유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물론 피오르 너도 착해.”
피오르도 다른 사람 앞에서 가면을 쓰고 행동하는 구석은 있었으나 천성이 나쁜 건 아니었다.
이건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마지막 말은 예상 밖의 말이었는지 피오르의 얼굴이 복잡함으로 뒤엉켰다. 그는 한참을 말문이 막힌 채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가 겨우겨우 마른 입술을 뗀다.
“아카데미에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야.”
음.
“혹시 네 위로 형제가 있어, 피오르?”
아레나 아카데미가 제국 내 최고의 명문 학교라는 것은 명실상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고위 귀족 가문의 ‘후계자’들은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않고 가문에서 따로 가주로서의 교육을 받는 게 일반적이었다.
때문에, 아카데미는 대부분 평민이나 가문을 이어받지 못하는 귀족 자제들이 입학하곤 했다.
카르시온처럼 공작가의 후계자가 아카데미에 오는 것은 상당히 특이 케이스에 속하는 것이었다.
“내 위로 형이 한 명 있어. 형은 아버지가 지금의 어머니와 결혼하기 전에 이름 모를 평민과 낳은 사생아야.”
그의 사뭇 진지해 보이는 표정에 나는 괜히 허리를 바로 하며 경청의 자세를 취했다.
“형은 12살 즈음 뒤늦게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게 밝혀지면서 우리 가문에 들어왔어. 내가 막 7살이 되었을 때였지.”
피오르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곧 힘을 풀고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어린 마음에 형이 생긴 게 좋았는데, 형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형은 내가 아카데미에 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 나를 이곳으로 내몰았어.”
“그럼 네가 아카데미에 입학한 건 형 때문이었던 거야?”
“우스운 일이지. 내게는 후계자 자리 따윈 중요하지 않았는데도.”
그는 같잖다는 표정으로 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누군가를 조소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원하던 것은 그저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거였어.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같은 지붕 아래에서 밥을 먹고 생활하고…….”
“형도 함께?”
형이라는 말이 나오자 피오르는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 형에게 뺏긴 내 자리를 찾을 거야.”
나는 피오르의 울분 섞인 눈동자를 바라봤다.
자세한 사정을 들어 보지는 않았지만, 그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피오르는 아카데미에 쫓겨나기 전에도 형에게 모진 일을 많이 당했다는 것을.
“그거랑 네가 다른 사람 앞에서 가면을 쓰는 거랑 무슨 관련이 있는데?”
“내가 아카데미에 있는 동안 형은 가문의 사람들을 제 편으로 만들 거야. 내게는 그에 대항할 힘이 필요해.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인맥을 만드는 거지.”
“으음…….”
그것참.
“뭣 같겠다. 다른 사람 비위 맞춰 주느라 힘들겠네.”
순간 피오르의 눈이 홉뜨였다.
동그란 눈동자가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냐고 따지는 듯 보이기도 했다.
“왜 나를 욕하지 않는 거야?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일인데? 리엔 너는 그런 거 싫어하잖아.”
저게 무슨 소리지. 내가 언제부터 정의감이 넘쳤다고.
“다른 사람 같은 거 알 게 뭐야. 내 친구는 넌데.”
그때였다. 피오르의 몸이 시간이 멈춘 듯 굳어 버린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