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피오르?”
“……아. 이야기 중에 미안. 사실 아까부터 화장실이 조금 급했거든.”
“왜 참았어. 그냥 다녀오지.”
“하하, 그러게. 그럼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나는 급하게 빠져나가는 피오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의 두 귀가 어쩐지 조금 붉어져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형이 싫었으면 생각하는 것만으로 귀까지 벌게졌을까.
안된 마음이 들어 짧게 혀를 찼다. 나는 익숙하게 소파에 일자로 누워 생각에 잠겼다.
바로 옆에 리시안셔스 공작가라는 가장 좋은 패가 있는데도 그를 이용하지 않으려는 것은, 카르시온은 진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이러니 착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나.
잠시만.
생각해 보니까 그럼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친구를 사귄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이름을 일곱 번이나 헷갈렸다고 하는 거 보니까 꽤 많은 애들이랑 사귀었던 거 같은데…….
이야 확실히 쓰레기는 쓰레기네.
나는 그가 했던 행동들을 되짚어 보고는 빠르게 생각을 고쳐먹었다.
역시, 카르시온만한 남자는 없는 듯했다.
* * *
화장실에 간 피오르와 아직 동아리실에 오지 않은 카르시온을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냥 오든 말든 상관없이 평소처럼 잤다는 표현이 맞겠지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끼고 잠에서 깼다.
눈을 떠 누군지 확인할까 했으나 동아리실이니 카르시온이 아니면 피오르이겠거니 하고 그대로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런데 잠에 완전히 들기 전, 비몽사몽한 정신 속에서 카르시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학 동안 나는 대체 어떻게 버텨야 할까.”
평소보다 낮게 깔린 듯한 목소리. 그리고 울적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목소리였다.
“너를 매일 보는 게 이렇게나 익숙해졌는데. 주말에 만나지 못하는 것도 겨우겨우 참아 왔는데.”
그는 한참을 끙끙거리다가 내 손가락 끝을 살짝 건드렸다. 건드렸다기보다는 스쳤다는 표현에 가까운 접촉이었다.
……저 소심쟁이.
그의 절절한 모습을 보니 괜히 마음이 약해진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아는데.
여기서 더 가까워지면 안 되는 걸 아는데도.
조금만.
조금만 더 허락하자. 친구끼리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잖아.
그렇지?
나는 결국 혼자 합리화한 후 번쩍 눈을 떴다.
갑자기 눈을 뜰 줄 몰랐는지 카르시온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콰당-!
그가 앉아 있던 의자는 보기 좋게 넘어갔다.
“어, 언제 일어났어……?”
그는 빠르게 고개를 반대로 돌리며 말을 했다. 어떻게든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눈치다.
“카온.”
“으응.”
나는 카르시온의 뺨에 살포시 양손을 얹었다.
그가 몸을 크게 한번 움찔했지만 거부하는 듯한 기색은 없었다.
얼굴만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을 뿐.
손에 힘을 줘 그의 고개가 정면을 향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눈을 최대한 아래로 깐다.
극한의 귀여움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려 했다.
정말 눈 마주치기도 어려운 사람이라니까.
그의 긴 속눈썹이 내 엄지손가락에 닿을 듯 말 듯 간지러웠다.
나는 괜히 그의 속눈썹을 한번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러자 속눈썹이 그에 반응하듯 파르르 떨려온다.
“나는 이번 방학 때 집에 안 갈 거야.”
“……어?”
“그러니까 심심하면 아카데미에 나 보러 놀러 와.”
한 번쯤은.
긴 방학 동안 한 번쯤은 어울려 줘도 괜찮겠지.
카르시온이 한동안 얼을 타다가 중간에 말을 이해하고는 순식간에 얼굴을 폈다.
그는 홍조가 발그레 올라온 얼굴로 해사하게 대답했다.
“응!”
그런데 해사해도 너무 해사한 표정에, 나는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그렇다고 나를 따라서 집에 안 간다거나 하는 생각을 하진 않을 거라 믿어, 카온.”
순간 우리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집에 안 가려고 했구나.
몇 초가 더 흐른 후에야 카르시온은 입술을 끌어 올리며 웃었다.
“하하, 당연하지.”
그의 티 나는 반응에 깊은 불신이 생겨, 나는 급히 조건을 하나 덧붙였다.
“정정할게. 딱 하루만 상대해 줄 테니까 정말 참을 수 없을 때 찾아와.”
“그런……!”
카르시온이 몹시 불합리한 제안을 받은 듯 억울하고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그런 표정 지어도 소용없어.”
이번에는 정말 한 번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었는지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카온, 대답.”
“……응.”
그는 내 재촉에 마지못해 현실을 받아들이고 굳게 닫힌 입술을 열었다.
나는 상으로 그의 분홍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착하네.”
서운했던 표정은 어디 가고 금세 표정이 풀리는 카르시온이었다.
이럴 때 보면 그는 고양이 보다는 강아지에 가까운 것 같은데 말이지.
부농 강아지라고 불러야 하나.
* * *
다행히 아레나 아카데미는 방학 동안에도 기숙사를 운영했다.
나는 기숙사에 남아 있을 예정이었으니, 바쁜 일이 없어 제인이 짐을 싸는 것을 도왔다.
제인은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심심하다는 핑계를 대며 옆에서 티 나지 않게 조금씩 도왔다.
나는 그녀의 옷가지를 개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제인 너는 집이 어느 지역이야? 아카데미에서 멀어?”
제인은 내 질문에 가방에 갠 옷가지를 꾹꾹 눌러 담으며 대답했다.
“고향은 남부 끝자락이야.”
아레나 아카데미는 중앙 수도와 비교적 가까운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남쪽 끝자락이면 확실히 멀다고 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근데 며칠은 수도에서 보낼 것 같아. 내가 원래 일하고 있던 곳에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리고 아카데미로 급히 오게 된 거라.”
“일하던 분들이랑 사이가 좋았나 보네.”
“응. 자세히 말하기는 조금 조심스럽지만, 고위 귀족 부인의 말동무 시녀로 일했었거든. 마님은 정말 좋은 분이셨어.”
나는 새삼스러운 얼굴로 제인을 바라봤다.
제인은 귀족이었구나.
하녀랑 시녀는 다르다. 고위 귀족의 시녀가 되려면 적어도 귀족 영애쯤은 되어야 했다.
“그런 눈으로 볼 거 없어. 아카데미를 휴학하게 된 게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져서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니까. 이름 있는 가문도 아니고.”
아. 맞다. 어쩌다 좋은 기회가 생겨 다시 복학했다고 했지.
가문 사정이 나아진 걸까?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었다.
근데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제인은 왜 급하게 아카데미에 입학했을까.
1학기까지는 아카데미를 다녔다고 했으니, 천천히 2학기부터 다녀도 됐을 텐데.
그런 내 생각을 꿰뚫어 보듯 제인이 망설이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리엔 사실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하자 그녀의 눈이 흐려졌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어쩐지 죄책감이 담긴 얼굴이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제인의 저런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네가 말하고 싶지 않다면 뭐냐고 물어보지 않을게. 하지만 털어놓고 싶은 게 있다면 언제든 말해. 들어줄게.”
제인의 눈이 촉촉해졌다. 정말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넌 정말…….”
나는 그런 그녀에게 다정히 웃어 주었다.
* * *
느리게만 흐를 줄 알았던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제인에게 피해가 갈까 하지 못했던 약초 연구나 실험 따위를 하니 눈 깜빡할 사이에 이 주가 흘러 있었다.
역시 ‘방학이 영원히 안 끝나면 어쩌지’라고 했던 생각은 괜한 걱정이었던 거다.
물론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의 부재가 크게 느껴지긴 했다.
항상 옆에서 조잘거리던 제인도 없었고 1일 1 놀림을 했던 카르시온도, 화려한 입담으로 재미있는 일화를 풀어 주던 피오르도 없었으니 당연했다.
그렇게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 시작한 약초 연구는 한번 각 잡고 시작하니 어느새 무아지경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온 나를 봤다면 셋은 분명 이런 말을 했을 거다.
‘리엔. 약초도 좋지만, 건강부터 챙기면 안 될까? ……회복 마법? 아, 그래. 내가 리엔 옆에서 계속 마법을 걸어 주면 되겠다!’
‘약초로 힐링? 내가 보기엔 힐링이 아니라 킬링 같은데…….’
‘꺄아악! 리엔. 너 얼굴이 왜 그래?! 맙소사, 너 한 달간 약초 압수야!’
귀에 선명히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작게 웃었다.
그래도 지금은 어찌어찌 약초연구에서 빠져나온 상태이긴 했다.
곧 부모님의 기일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무덤이 있는 곳은 아카데미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마을이었다.
어렸을 때 부모님과 함께 오순도순 살았던 마을이라 그곳에 부모님의 자리를 마련했었는데…….
마침 아카데미와 가까워서 다행이었다.
나는 느긋하게 준비해서 마차를 타고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도착한 마을은 평소와 다르게 소란스럽고 들뜬 느낌이었다.
마을에서는 일 년에 한 번 축제를 열었는데 이번에는 날이 겹친 모양이었다.
나는 마을에서 하루를 머물고 갈 셈으로 여관을 잡아, 짐을 풀고 상점가로 나왔다.
한창 축제가 진행 중이라 다들 웃고 떠드는 모습이 시야에 담긴다.
어렸을 때 부모님의 손을 잡고 축제를 즐겼던 것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나와 같이 축제를 함께해 줄 사람이 없었다.
나는 조금 울적해진 마음으로 꽃집으로 향했다.
이곳 마을 축제는 이제 나와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꽃집으로 가는 길에 보석 상점이 보여 나는 유리 진열장에 짧게 시선을 줬다.
진열장에는 무슨 주먹만 한 크기의 다이아몬드가 있었다.
크기에 놀라 ‘오’ 하고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다이아몬드 밑에 아주 작은 링이 붙어 있었다.
링만 붙이면 반지가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푸흡.”
나는 머릿속으로 저 반지를 만든 사람을 비웃었다.
와 대체 저런 걸 누가 산담.
조금 유쾌해진 기분이었다.
* * *
리엔은 꽃집에서 평소보다 많은 꽃을 충동적으로 사 버렸다.
괜히 이것도 예뻐 보이고 저것도 예뻐 보인 탓이었다.
그녀는 약초가 아닌 평범한 꽃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카르시온이 제게 종종 꽃을 선물해 주기 시작한 후 조금씩.
그녀 자신도 모를 정도로 아주 조금씩 꽃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만한 아주 작은 변화였다.
결국, 리엔은 한 아름 꽃다발을 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겨우 앞을 볼 수 있을 만큼 많은 양이었다.
바로 무덤에 갈 수도 있었지만, 제초를 위해 가져온 물약을 깜빡해서 짐이 있는 여관에 들러야만 했다.
그렇게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데, 아까 큰 웃음을 줬던 보석 상점 앞에 한 남성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2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외모. 은발에 벽안을 가지고 있는 남성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굉장한 미남이었다는 거다.
복장은 단출했지만, 남성에게는 숨길 수 없는 귀티가 뿜어져 나왔다. 평민인 척 축제를 즐기러 온 귀족 나리인 듯했다.
리엔은 잠시 남성에게 시선을 뺏겼다가 곧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고는 남성을 지나치려 했다.
희미하게 들려온 남성의 말만 아니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