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좋군.”
리엔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떠올랐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잘게 떨리는 눈으로 힐끔 남성의 시선을 따라 옮겼다.
맙소사.
남성의 시선은 아까 그 무식하게 큰 다이아몬드 반지에 꽂혀 있었다.
리엔은 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제발요. 아니라고 해 줘요.’
그러나 남성은 리엔의 외침을 듣지 못했는지, 고개를 한번 끄덕이며 발을 보석 상점 쪽으로 뗐다.
리엔은 저도 모르게 움직여 남성의 소매를 잡았다.
“저기요.”
소매를 잡자 남성이 스산한 눈빛으로 리엔을 바라봤다.
남성이 장신인 탓에 리엔은 턱을 한껏 올려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남성의 위압감을 배로 증가시켰다.
“뭐지?”
하지만 리엔이 어떤 사람인가. 일대 다수의 상황에서도 절대 주눅 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리엔은 정면으로 마주친 사내의 얼굴에 조금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분위기는 정반대였지만, 묘하게 카르시온을 떠올리게 하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저 무식하게 크기만 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연인이나 아내분께 드리려고 하는 건 아니시죠?”
남성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맞는 말이었다.
그가 자신의 돈을 어디에 호구같이 갖다 버리든 그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리엔의 관점에서는 도무지 저런 걸 왜 사는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남성의 말대로 이것은 리엔과 상관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괜히 마음속에 오지랖이 샘솟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걸 사 갔다간, 저 남성은 애인이나 부인한테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을 것 같았다.
아무리 돈이 넘쳐도 저건 욕먹을 수밖에 없다. 실용성이 개뿔도 없지 않은가.
차라리 보석을 선물하는 게 낫지.
묘하게 카르시온이 떠오르는 얼굴만 아니었어도 그녀는 남성이 호구 잡히는 것을 내버려 뒀을지도 몰랐다.
이건 다 순진무구한 카르시온을 떠올리게 하는 저 남성 탓이었다.
리엔은 잠시 심호흡을 한 후, 자신에 손에 들려 있던 꽃다발 중 제일 그럴듯한 꽃말을 가진 꽃의 다발을 남성에게 내밀었다.
아니, 거의 품에 강제로 안겨 줬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축제에 연인분이랑 같이 오셨죠? 그럼 줄 때까지 시들 일도 없겠다, 제게 속는 셈 치고 다이아몬드 반지 말고 이거 한번 선물해 보세요.”
엉겁결에 꽃다발을 품에 안게 된 남성이 달리 감정이 서리지 않은 눈빛으로 리엔을 내려다봤다.
아니, 자세히 보니 조금은 당황한 눈치였다.
“꽃의 이름은 아잘레아. 꽃말은 사랑의 기쁨이랍니다.”
리엔은 그 말을 끝으로 제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뒤를 돌았다.
“연인분이 좋아하셨으면 좋겠네요. 그럼 저는 이만.”
남성은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리엔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남성이 느긋하게 손을 들어 허공에 손짓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검은 복장의 사내가 나타나 남성의 앞에 부복했다.
“부르셨습니까.”
“먼저 마차에 가 있을 테니 저것 좀 매수해 오도록.”
남성이 턱짓으로 가리킨 곳은 상점의 진열대였다. 진열대에는 다이아몬드 반지 말고도 많은 주얼리가 전시되어 있었다.
남성의 충실한 부하는 그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려 반문했다.
“……다이아몬드 반지 말씀입니까?”
“아니.”
남성은 단호하게 말했다.
“상점을 인수해.”
“존명.”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닌 듯, 부하는 별다른 이의 제기 없이 그의 말에 순응했다.
“그 꽃다발은 폐기 처분할까요?”
남성은 고민하듯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독이나 해로운 마법은 걸려 있지 않은 것 같군.”
가져가겠단 뜻이었다.
* * *
남성이 마차에 들어가자마자 누군가 밝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남성의 죽고 못 사는 아내였다.
“잠깐이라더니 왜 이렇게 늦었어요.”
탓하는 말이었지만, 아내의 눈에는 은은한 웃음기가 맴돌았다.
그녀는 읽고 있던 책을 덮은 후 고개를 들어 마차에 들어온 제 남편을 바라봤다.
무언가를 발견한 듯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여보, 혹시 그걸 사 오려고 잠깐 기다려 달라고 했던 거예요?”
남성은 아내의 놀란 표정에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그 위압감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순한 표정이었다.
“아아, 여보. 정말 감동이에요! 당신에게 이런 센스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저는 당신이 또 선물이랍시고 상점을 인수한다든지 실용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액세서리 같은 걸 사 올까 걱정했는데……!”
남성이 몸을 크게 한번 움찔했다.
하지만 여성은 차오른 감동에 남편의 이상한 반응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가 기쁜 듯 활짝 웃으며 꽃다발을 받아 들고 향을 맡았다.
“어머, 지금 보니까 이거 ‘아잘레아’잖아요?”
여성이 조금 달뜬 얼굴로 제 남편을 바라봤다.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이건 정말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당신은 이 꽃의 꽃말, 알고 있어요?”
아내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던 남성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아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꽃말을 기억해 냈다.
“……사랑의 기쁨.”
“세상에, 정말 알고 있었을 줄이야! 당신이 이렇게 세심한 선물을 줄 수 있는 사람인 줄 몰랐어요!”
그녀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남편의 뺨을 잡고 마구잡이로 얼굴에 키스를 퍼부었다.
“선물 정말 고마워요, 여보.”
무뚝뚝해 보였던 남성의 얼굴이 흐물흐물해진다.
남성은 생각했다.
오늘 인수한 보석 상점은 아내에게 절대 들키지 않게 처분해야겠다고.
한동안 꽃다발을 보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여성은 돌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카르시온도 축제에 같이 왔으면 참 좋았을 텐데…….”
남성은 아내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그가 단박에 질투 어린 눈빛을 하며 아내를 세게 끌어안는다.
“실비아. 내 앞에서 다른 남성의 이름을 입에 담는 행동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자 여성이 눈매를 가늘게 뜨며 남편의 등을 세게 팡팡 쳤다.
아주 세게.
“다른 남성이라니요! 당신과 내 아들이잖아요, 이 철없는 사람아!”
그렇다.
남성은 카르시온의 아버지.
즉, 리시안셔스 공작이었다. 그의 아내인 실비아는 리시안셔스 공작 부인이었고.
만족할 만큼 남편의 등을 때린 공작 부인은 슬쩍 남편을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카온이 요즘 도통 기운이 없어서 걱정이란 말이에요.”
공작이 별소리를 다 들었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공작 부인은 팔짱을 끼며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 카온이 몇 달 전쯤에 제게 누구 좀 아카데미에서 퇴학시켜 달라고 부탁해 왔거든요?”
“그 카르시온이?”
“네. 그 카온이요.”
“일단 사정을 들어 보니 명분은 타당해서 오랜만에 제 이사장 권력 좀 쓰긴 했는데…….”
“그 녀석이 당신에게 퇴학 처리를 부탁할 만한 성격이던가? 신체를 잘라 버리든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면 몰라도. 확실히 이상한 일이군.”
“근데 그로부터 얼마 후 묘한 소문이 돌더라고요.”
“……무슨?”
“우리 아들이 누굴 좋아한다는 소문이요!”
공작이 충격을 받은 듯 작게 입을 벌렸다.
“그래서 설마 하고 이름을 대조해 보니까 글쎄, 퇴학 사건의 피해 학생과 카르시온이 좋아한다는 여학생 이름이 같더라고요.”
“그럼 기운이 없다는 게…….”
“지금 방학이라 좋아하는 여학생을 못 봐서 우울한가 봐요. 귀엽기도 하지. 이렇게 보니까 우리 아들도 평범한 아이 같네요, 그쵸?”
공작이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걱정되는 부분이 있어요…….”
공작 부인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아무리 우리 아들이라지만 장점이라고는 얼굴 하나뿐인데……. 그 여학생은 불쌍해서 어쩌죠?”
그 말을 들은 공작의 입에서 안타까움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
하지만 공작은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랑일 수도 있지.”
“그러네요. 카온의 변덕일 수도 있으니 조금 더 지켜보다 정 안 되겠을 때 학생을 불러 설득해 봐야겠어요.”
공작 부인의 말이 끝나자 공작은 슬며시 그녀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넣었다.
“그럼 이제 해결됐으니까, 아들 말고 내 생각 좀 해 줘.”
공작 부인은 제게 안겨 오는 덩치 큰 남편을 보며 피식 웃었다.
“우리 남편은 질투가 너무 많다니까.”
* * *
나는 교내 식당에서 적당히 배를 채운 후 기숙사로 향했다.
아레나 아카데미는 이래서 좋다. 방학 때 기숙사를 개방하는 것도 모자라서 교내 식당까지 운영해 주다니.
바람도 솔솔 불어오고 햇볕도 따스하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혼자 밥 먹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네.”
개학이 얼마 남지 않은 건 아쉬웠지만, 다시 친구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마냥 아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카르시온은 왜 날 찾아오지 않는 거지?
솔직히 일주일도 못 버티고 찾아와서는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밀 줄 알았는데.
날 잊은 건 아니겠지……?
아니다. 그렇게 날 좋아하는 애가 날 잊을 리 없다. 바빠서 못 온 거겠지.
이런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서둘러 이유를 찾으려 하는 모습이라니. 누가 보면 짝사랑하는 줄 알겠네.
카르시온이 나를 좋아하는 일방적인 관계일 뿐인데.
내게 아직 카르시온은 친구 그 이상이 아니었다.
물론 앞으로도 그래야겠지.
나는 섭섭해지려는 마음을 넣어 두고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 내 앞으로 온 편지를 확인했다.
“응?”
항상 두 통의 편지가 들어 있던 우체통에, 오늘은 무려 다섯 통이나 되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잘못 온 건가 싶어 편지를 확인하는데 모두 내 앞으로 온 편지가 맞았다.
기숙사로 걸음을 옮기며 발신인을 확인했다. 두 통은 예상했듯 이모와 그 자식이 보낸 편지였다.
나머지 세 통은…….
카르시온과 제인에게서 온 편지.
그럼 마지막은 당연히 피오르겠거니 싶어 확인해 보니 이게 웬걸 익명의 사람에게서 온 편지였다.
행운의 편지는 아니겠지?
‘이 편지는 oo에서부터 최초로 시작되어……’로 시작하는 그 편지 말이다. 미신은 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달가운 건 아니었다.
“진짜 행운의 편지라면 저녁 먹으러 나갈 때 한스의 우체통에 넣어 둬야지.”
갑자기 행운의 편지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