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23)화 (23/161)

23화

나는 금세 도착한 기숙사에서 종이 나이프를 찾아 가장 먼저 익명의 편지를 열어 봤다.

“……칫.”

안타깝게도 편지는 행운의 편지가 아니었다.

다행인 것은 편지를 보고 한눈에 발신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는 것.

발신인은 얼마 전에 내가 꽃다발을 강제로 안겨 줬던 그 남성이었다.

사실 그때 꽃다발을 안겨 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남성의 수하가 나를 찾아왔었다.

사례하고 싶다며 제 주인이 나를 한번 만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내 아잘레아 꽃다발이 생각보다 더 큰 일을 해냈나 보다.

하지만 나는 뭔가를 바라고 한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례는 필요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남성의 수하가 재킷 안쪽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내밀었다.

슬쩍 열어 보니 주머니 안에는 금화가 잔뜩 들어 있었다.

“이래도 만나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에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내며 ‘하, 지금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돈이었다.

그래서 주머니를 두 손으로 공손히 돌려주고는 대화는 부담스럽다고 전했다.

주소를 알려 드릴 테니 하실 말씀이 있다면 편지로 해 달라는 말도 남겼고.

그런데 예의상 알려 줬던 주소로 정말 편지를 보내올 줄은 몰랐다.

심지어 편지 내용도 예상을 완전히 깨 버리는 내용이었다.

나는 무슨 감사 인사라도 적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말은 일절 없었다.

내게 조언을 얻으려는 두 문장만 적혀 있었을 뿐.

[부부 싸움을 했다. 해결 방법 좀 알려 다오.]

“유부남이셨구나.”

아니 근데 내가 무슨 연애 전문가도 아니고 이런 걸 물어?

감사 인사도 하나도 없고.

물론 보답이나 감사 인사를 들으려고 한 행동은 전혀 아니었다.

그저 내 오지랖을 주체할 수 없어서였지. 그러나 이번 부탁 건은 조금 달랐다.

그쪽에서 먼저 조언을 얻으려 하는 편지이지 않나.

사례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감사 인사라도 했었어야 했다. 저런 성의 없는 편지가 아니라.

기분이 나빠서라도 그냥 무시해야겠다. 나중에 따져 물으면 편지 받은 적 없다고 잡아떼지 뭐.

라고 생각한 순간 편지 봉투 안에 수줍게 숨어 있던 수표가 시야에 들어왔다.

“제게 이런 걸 물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돈이 궁한 건 아니었지만 원래 돈이란 건 많을수록 좋은 것이지 않나.

나는 이름 모를 귀족 남성에게 감사하며 당장 답장을 쓸 준비를 했다.

근데 막상 조언하려고 하니 머릿속이 멍해졌다.

돈을 받긴 받았으니 해결 방법을 제시해 주긴 해야겠는데…….

나는 연애해 본 적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분 아내의 취향을 하나도 몰랐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내분이 아잘레아 꽃다발을 받고 좋아하셨다는 것뿐.

나는 한참을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리다가 결국,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편지를 써 내려갔다.

아 몰라.

돈은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보내온 거니까 내가 꼭 완벽한 해결 방법을 제시해 줘야 하는 건 아니잖아?

[딱 붙는 와이셔츠에 예쁜 앞치마를 입고 아내분께 정성이 담긴 아침을 차려 주세요. ‘딱 붙는 와이셔츠’와 ‘앞치마’가 제일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명심하세요.]

아저씨가 내 편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와이셔츠와 앞치마의 조합은 정말 환상인데 말이지.

마음 같아서는 더욱 제대로 된 방법을 알려 주고 싶지만…….

나는 잠시 모든 행동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후. 마음의 평화.

하지만 정말 내 멋대로 적었다간 아저씨가 날 찾아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꾹 참았다.

솔직히 지금 보낸 내용도 보고 화나 안 내면 다행이었다.

체면을 중시하는 귀족이 정말 앞치마를 입고 아침을 차리는 행위를 할 리 없었다.

집에 아내만 있는 게 아니라 수많은 사용인이 있을 것 아닌가.

만약 진짜 실행한다면 참사랑을 인정해 줘야만 했다.

그 정도면 아내분의 정수리 냄새도 향기롭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편지의 답신을 쓴 후 다른 편지를 차례로 열어 보기 시작했다.

제인과 이모에게 온 편지는 안부를 묻는 내용이었다. 평범한 내용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이모의 편지를 쭉 읽어 내렸다.

[……네가 이번 방학에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게 너무 슬프구나. 혹여나 일이 일찍 끝난다면 시간 내서 와줬으면 해. 나뿐만 아니라 이모부도 루카도 에르한도 널 굉장히 보고 싶어 한단다.]

나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아 편지를 구겨 멀리 던져 버렸다. 놀란 탓인지 심장이 두근거린다.

에르한이 날 보고 싶어 한다고?

끔찍한 소리.

그 자식의 이름은 물론이고 필체조차 보기 싫어 매번 편지를 무시해 왔는데. 이모의 편지로 전해 들을 줄은 몰랐다.

정화. 내 썩은 눈을 정화할 게 필요했다.

나는 아껴 두었던 카르시온의 편지 봉투를 열어 편지를 펼쳐 봤다.

[죽을 만큼 참았어. 지금 보러 갈게.]

지금?

“이게 대체 언제 만나러 온다는 소리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발신 날짜를 가늠하고 있을 때, 창가에서 툭툭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새라도 날아온 걸까.

설마……?

나는 설마 싶으면서도 홀린 듯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열어젖혔다.

그런데 역시나.

“카온!”

카르시온인 것을 확인하자마자 재빨리 창문을 열어 그를 끌어당겼다. 내가 지내는 기숙사는 3층이었다.

마법으로 몸을 띄웠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괜히 떨어질까 무서웠다.

나는 그의 가슴께를 세게 쳤다.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기야? 깜짝 놀랐잖아!”

게다가 이 말도 안 되는 타이밍은 뭐란 말인가. 마치 내가 편지 열기를 기다렸다가 나타난 것처럼.

순식간에 방 안으로 들어오게 된 카르시온은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또 시작이네 생각하며 그의 석화가 풀리기를 기다렸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반가울 만도 하지.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가 너무 오래 굳어 있자 이상함을 느낀 나는 그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카온?”

“……진짜다. 진짜 리엔이야.”

뚝.

카르시온의 눈에서 아무런 전조 없이 눈물이 뚝 하고 흘러내렸다.

……어?

어, 어어어?

그의 눈물을 본 리엔이 속으로 비명을 악악 질렀다.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나도 그렇게 세게 때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갑자기 창문에서 나타나니까 걱정돼서……!”

리엔은 드물게 패닉 상태가 되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줄도 모르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

“그러게 내가 걱정할 일은 하지 말았어야지! 아, 아니 이게 아니라.”

그러고는 불현듯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와 그의 눈물을 닦아 냈다.

카르시온이 울먹이는 모습은 가끔 보긴 했다. 하지만 진짜로 눈물을 흘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얌전히 제 얼굴을 리엔에게 맡기며 입을 열었다.

“아니야. 리엔이 때린 건 하나도 아프지 않았어. 눈물이 나온 건 그냥……. 오랜만에 보는 네가 너무 반가워서.”

그의 말에 분주히 움직이던 리엔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리엔이 그를 알게 된 것은 반년이 채 안 되는 시간이었다.

만나지 못한 것은 한 달이 채 안 되는 시간이었고.

그 짧은 사이에 이렇게까지 저를 좋아할 수가 있나?

‘내가 뭐라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보고 싶었으면 좀 더 빨리 찾아오지 그랬어.”

“하지만 일찍 너를 보고 나면, 남은 방학은 어떻게 해?”

그녀의 말문이 턱 막혔다.

사실 조건을 달았던 것은 너무 자주 찾아오지 말라는 의미에서 붙여놓은 것이었다.

리엔은 카르시온이라면 조건이고 뭐고 몇 번이고 찾아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

그의 눈가는 여느 때보다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실 몰래 보고 갈까 하는 나쁜 생각도 했는데 리엔 네가 싫어할까 봐, 하지 않았어.”

“……왜?”

충동적인 물음이었다.

카르시온은 고개를 푹 숙이며 마른 입술을 뗐다.

“네가 날 싫어하지 않았으면 해서. ……좋아해 달라고는 하지 않을게. 미워하지만 말아 줘.”

급기야 카르시온이 커다란 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애처로운 모습에 리엔의 마음이 한없이 약해졌다.

“안 미워해. 내가 널 왜 미워해. 나쁜 행동 몇 번 한다고 해서 널 싫어하게 될 일은 절대 없어. 그런 말 하지 마.”

하지만 리엔은 몰랐다.

틈 없이 가려진 그의 얼굴에 익히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려 있었다는 것을.

눈물은 그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는 것을.

즉, 우는 척만 했을 뿐 카르시온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는 거다.

물론 리엔이 죽도록 보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라, 처음 그녀를 눈에 담았을 때는 감격의 눈물이 찔끔 나긴 했다.

그러나 흘러가는 상황에, 눈물은 금방 쏙 들어갔다.

‘아. 당황한 리엔 귀여워.’

당황한 리엔이 심각하게 귀여웠기 때문이다.

자신의 울먹이는 모습 하나에 패닉에 빠진 모습이란.

카르시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리엔의 머릿속에는, 그의 기분을 전환시켜 줘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리엔이 그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카온, 나랑 어디 좀 가자.”

그녀가 카르시온을 데리고 나온 곳은 아카데미 주변 상점가였다. 그곳에서 리엔은 조금 특별한 가게를 찾았다.

“여긴……?”

카르시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리엔을 바라봤다. 그녀는 씩 웃으며 이곳에 온 목적을 설명했다.

“사진관이야. 같이 찍은 사진이라도 있으면 좀 괜찮을까 싶어서.”

차마 언제든지 찾아와도 된다고는 하지 못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사진관은 요 몇 년 사이 폭발적으로 그 수가 늘어났다.

사진 한 장의 가격은 절대 싸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평민들도 큰마음을 먹으면 못 찍을 것도 없는 가격이었다.

잠시 후.

마법으로 인쇄된 사진을 보며 카르시온의 얼굴이 흐물흐물해졌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이었다.

그가 소중하게 들고 있는 사진 속에는,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카르시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리엔. 그리고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힌 그가 담겨 있었다.

행복한 기분을 느끼며 카르시온이 자연스럽게 계산을 하려 하는데…….

리엔이 그런 카르시온의 손목을 붙잡았다.

“됐어, 내가 찍자고 했잖아. 누나가 살게.”

“하지만…….”

“걱정하지 마. 최근에 꽁돈 생길 일이 있었거든.”

리엔이 짧게 한 번 윙크했다.

그 모습에 카르시온이 한 번 더 리엔에게 반해 버린 것은 어쩌면 숨을 쉬는 것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