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나는 제인과 함께 등교하다가 어수선한 등굣길에 의문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봤다.
“개학 첫날이라 그런지 엄청 어수선하네.”
“그것도 있지만, 아마 전학생 때문일걸?”
“전학생?”
“귀하신 분이지. 우리 아그라스 제국이랑 아바스칸투스 제국이랑 평화협정 20주년을 기념해서 황자를 아카데미에 보냈대.”
“그쪽 황자님이 우리 아카데미에 오신다고?”
“응. 우리 쪽 황자님은 아바스칸투스 제국 아카데미에, 그쪽 황자님은 우리 쪽 아카데미에.”
처음 듣는 사실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왜 나는 처음 들었지?”
“그야 귀족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알려진 소문이니까. 우리 아카데미는 신분 언급 금지잖아? 뭐, 개학했으니 소문이 퍼지는 건 시간문제겠지만.”
“그럼 기념하는 의미가 없지 않나? 대놓고 알려야 기념이지.”
제인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높으신 분들 생각하는 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리고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신분이야 다 알게 되어 있으니까.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음.”
“사교계가 있는 이상 신분을 완전히 숨기는 건 불가능하니까. 우리 아카데미만 봐도 그래, 완전 눈 가리고 아웅이잖아.”
“하긴. 듣고 보니 그러네.”
의문을 해소하고 다시 길을 걷는데, 갑자기 제인이 뭔가 생각난 듯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악! 나 기숙사에 전공 책 놓고 왔다! 미안, 리엔 너 먼저 가 있을래? 나는 기숙사에 들러야 할 것 같아.”
오늘은 오전이 전공 수업. 그리고 오후가 공통 과목 수업이었기에 점심시간에 책을 가져올 수도 없었다.
나는 혀를 쯧쯧 차며 제인을 보냈다.
“늦지 않게 다녀와.”
“응!”
제인을 보내고 난 후 나는 아카데미에 도착해 홀로 약초학 강의실로 향했다. 오랜만에 일찍 일어나서 그런지 아직도 비몽사몽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반쯤 눈을 감고 복도를 걷고 있는데 앞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오른쪽으로 몸을 비켰다.
하필이면 앞사람도 같은 방향으로 피한다. 나는 다시 왼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런데 타이밍이 참 묘하게도 그 사람이 또 나와 같은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는 거 아닌가.
나는 문제점을 눈치채고 이번에는 가만히 서 있었다. 둘 다 옆으로 피해 가려고 하니, 앞이 막힐 수밖에 없지 않나.
내가 가만히 몸을 움직이지 않자, 앞에 있던 사람이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길막인가?
나는 아래로 깔고 있던 시선을 올려 앞사람을 바라봤다.
앞사람도 내가 길을 일부러 막았다고 생각했는지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길을 막은 사람은 짙은 남색 머리카락에 자안.
다소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과 달리 어쩐지 정순한 느낌이 드는 남학생이었다.
얼굴 보니까 인기 좀 있겠는데.
“이게 무슨 수작입니까?”
오, 목소리도 좋네.
……응? 수작?
뭔 소리인가 싶어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니 그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라그라스는 좀 덜할 거라고 믿은 제가 바보 같군요.”
갑자기 우리 제국 이야기는 왜 나오는 거지. 수작은 또 무슨 소리고.
입을 열어 물어보려 했지만, 먼저 입을 연 것은 그였다.
“다음부터는 이런 방법으로 제 시선을 끌려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제 할 말만 내뱉고는 싸늘한 얼굴로 나를 지나쳤다. 언뜻 경멸이 담긴 듯 보이기도 했다.
설마 내가 자기한테 관심이 있어서 길을 막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어처구니없는 그의 오해에, 순간 잠이 확 달아난다.
와, 쟤 뭐지?
자의식 과잉도 저 정도면 중증일 것 같은데.
* * *
오전 수업을 모두 마치고 점심시간.
나는 제인과 함께 교내 식당에서 밥을 먹는 중이었다.
무심히 돌린 시선에 신난 듯한 말감이가 보였다. 그녀는 제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대화하고 있었다.
별 감흥 없이 다시 시선을 돌리려는데, 문득 말감이의 접시에 구운 감자가 눈에 들어왔다.
헙.
감자가 감자를 먹다니. 저거 동족상잔 아닌가?
나는 충격을 받고 재빨리 시선을 내 접시로 고정했다.
어휴. 말세다, 말세야.
아무리 맛있어 보여도 그렇지 저런 인륜…… 아니, 감륜을 저버리는 짓을 하다니.
다행히 말감이와 그녀의 친구들은 내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접시를 들고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근데 너 요즘 피부 엄청 좋아졌다. 비법이 뭐야? 오늘 감자만 엄청 퍼온 걸 보니까 혹시……?”
친구의 추리에 말감이가 꺄르륵 웃었다.
“그럴 리가. 내가 이번 방학에 거금을 들여 피부에 좋다는 화장품을 샀거든.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건데 운이 좋았지.”
제 친구들에게 뽐내듯 말하는 말감이의 피부는 확실히 반질반질 윤이 났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모기가 앉아도 미끄러질 것 같은 느낌이랄까.
“바를 때 특유의 화한 냄새가 나서 기분 나쁘긴 하지만 몇 번 바르지도 않았는데 효과가 바로 보이는 걸 보니, 또 못할 것도 없더라고.”
나는 포크로 샐러드를 뒤적이다가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확 쳐들었다.
바를 때 특유의 화한 냄새가 난다니…….
설마.
“그래? 화장품 이름이 뭔데?”
“바르몬 크니리나.”
“와,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인데 엄청 고급스러워 보인다.”
나는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리엔?”
나는 제인의 부름을 뒤로하고 성큼성큼 걸어가 말감이를 불러 세웠다.
“말감아.”
말감이라 부르는 말에 그녀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겉으로는 싫어해도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말감이라는 것을 인정한 듯했다.
“나, 나 감자 아니거든!”
그녀는 자신이 말감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듯 버럭 소리쳤다.
말감이의 큰 목소리에 식당 안 학생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린다. 나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말감아. 너 당장 그 화장품 갖다 버려.”
“뭐야, 너 지금 우리 대화를 엿들은 거야? 그리고 네가 뭔데 내 화장품을 버려라 명령질이야?”
“네가 바르고 있는 제품은 일시적이고 즉각적인 효과를 위해 개발된 거야. 처음 몇 번은 괜찮지만 지속적으로 사용하면 피부가 녹아 버려.”
말감이가 말했던 ‘바르몬 크니리나’ 이 제품은 시고르 자브초를 원료로 만든 화장품이다.
시고르 자브초는 지속적으로 사용하면 독소가 쌓이는 약초.
피부에 독소가 쌓이면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사실 ‘바르몬 크니리나’는 옛날에 귀부인 사이에서 웃돈을 주고 구매하곤 했던 유명한 화장품이었다.
하지만 제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단종되었다. 바르몬 크니리나의 부작용으로 인한 피해자가 속출했기 때문이다.
말감이가 구한 저 화장품은 아마 그때 당시 판매했던 제품에 보존 마법을 걸어 새것처럼 유지시킨 제품일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냐고?
바르몬 크니리나의 부작용 치료제를 만든 건, 돌아가신 우리 엄마였으니까.
바르몬 크니리나로 인해 생긴 부작용은 이상하게도 신성력,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
의원들도 고개를 저으며 치료할 수 없는 것이라 입을 모았다.
하지만 엄마는 결국 그 화장품의 원료가 시고르 자브초라는 것을 알아내었고, 이후 노력 끝에 치료제를 개발해 냈다.
“거짓말하지 마. 몇 번 바른 것만으로도 이렇게 피부가 좋아졌는데. 뭐? 지속적으로 바르면 피부가 녹아내려?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말감이는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한 듯 코웃음 쳤다.
“아, 입맛 떨어졌어. 오늘은 밖에서 먹자. 내가 사 줄게.”
그녀는 나를 짜증스럽게 쳐다보며 제 친구들을 데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나와 말감이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제인이 내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내가 처리할까?”
제인이 사륵 눈을 접었다. 다정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그녀의 몸 주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사납기 그지없었다.
잡히면 그녀를 나노 단위로 분해해 버릴 것만 같은 분위기.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나설 필요 없어. 나는 미리 경고했고, 내 말을 듣지 않아 생긴 결과는 오로지 자기가 짊어지겠지.”
* * *
제인은 과제 때문에 점심을 먹고 먼저 교실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를 먼저 보내고는 생각도 할 겸 소화도 시킬 겸 아카데미 주변 정원을 돌았다.
책임은 말감이가 지는 거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 이후로 속에 무언가로 턱 막힌 듯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말감이가 내 경고를 새겨듣고 사용을 자제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녀가 제 피부의 변화를 보고 위기감을 느낄 때쯤,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을 전해 줘야 할 것 같았다.
바르지 말라면 바르지 말지, 왜 굳이 일을 만드는지 모르겠다.
하긴, 거금을 주고 산 화장품을 대뜸 버리라고 하면 바로 ‘그래!’ 하면서 버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심지어 그녀와 나는 사이도 좋은 편이 아닌데.
아니, 그래도 그렇지……!
에효.
화를 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정원을 걸었다.
그때, 이런 내 기분을 달래 주듯 내 시야에 한 약초가 담긴다. 귀한 것은 아니나, 지금 한창 진행 중인 연구에 필요한 약초였다.
나는 반색하며 쪼르르 달려가 꽃이 예쁘게 핀 약초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똑.
하고 단번에 꽃과 줄기 부분을 분리해 버렸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누군가 소리치는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혹시 정원사인가 싶어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니, 아침의 그 자의식 과잉 환자가 성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 당신. 아침의 그 사람이군요.”
“아니, 저기 이건…….”
“변명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교내 정원이 당신 소유라도 되는 줄 아십니까? 당신은 정말 극악무도한 사람이군요.”
“뭐? 극악무도?”
“아무 이유 없이 꽃을 따 버리는 태도도 정말 끔찍합니다. 식물이 하나의 꽃을 피워내기까지 얼마나 노력하는지, 당신은 알고나 있습니까? 다음에 한 번만 더 이런 짓을 저지른다면 그때는 정말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그는 너 같은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는 듯한 표정을 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나는 그가 떠난 자리를 노려보며 이쯤 되니 오늘 내게 마가 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쟤 진짜 다른 사람 말은 죽어도 안 듣는구나.”
그저 재미로, 또는 심심해서 꽃을 딴 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꽃을 딴 이유는 이 식물은 꽃을 따야 비로소 열매가 자라기 때문이다.
원래도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꽃 부분을 잘라 내고 열매를 피워내지만, 나는 그 과정을 단축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필요한 부분이 꽃 부분이기 때문에 잘라 낸 것이 진짜 이유긴 하다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저렇게 비난받을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아카데미 정원에 난 식물을 내가 무단으로 훼손할 리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