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카르시온이나 피오르 같은 착한 애만 상대하다가 말감이와 저 자의식 과잉 환자를 상대하려니 하루 사이 십 년은 늙은 기분이었다.
말감이는 앙칼지게 별명을 부정하는 모습이 귀엽기라도 하지, 말이 안 통하는 자의식 과잉 환자는 진짜…….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야.”
하지만 내가 그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플래그성 말을 해 버린 탓일까?
아니면 내 패시브인 파멸의 주둥아리가 발동해 버린 탓일까.
그를 다시 만나게 되는 건 금방이었다.
정말 금방.
* * *
카르시온은 늘 그랬듯 제일 먼저 동아리실에 도착해 리엔과 그 외 한 명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평소였으면 감정 없는 얼굴로 마법 서적을 뒤적이고 있을 카르시온이건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만면에 웃음꽃을 피운 상태였다.
“오늘부터는 실물 리엔이다. 아, 진짜 너무 좋아.”
카르시온은 발까지 동동 구르며 무언가를 손에 들고 카르시온은 연신 행복하다, 너무 좋다 따위의 말을 반복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동아리실 문이 열리며 피오르가 들어왔다.
“나 왔다.”
카르시온은 동아리실 문이 열리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제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교복 재킷 안쪽으로 숨겨 버렸다.
그리고 들어온 사람을 확인하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였냐? 리엔인 줄 알고 놀랐네.”
답지 않은 반응에 피오르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뭔데 그렇게 소스라치게 놀라? 리엔한테 보이면 안 되는 거야?”
“별거 아냐.”
카르시온은 더 묻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별거 아니라고 하면 더 궁금한 법.
피오르가 카르시온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뭔데?”
“저리 꺼져.”
정말 별게 아니었으면 보여 주고도 남았을 텐데 저 반응을 보아하니 뭔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피오르가 뭔가 깨달은 듯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뭐야. 설마 그렇고 그런 거야? 오, 맨날 목석처럼 굴던 애가 어쩐 일이야? 나도 좀 보여 줘.”
흥미가 돋은 듯 점점 더 제게 가까이 다가오는 피오르를 보며, 카르시온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내가 너냐?”
“아 좀 보여 주면 어때서? 닳는 것도 아니고.”
“네 더러운 눈으로 보면 닳는 게 아니라 썩어 버린다고.”
“뭐?”
카르시온의 언사에 기분이 상한 듯 피오르가 발걸음을 뚝 멈췄다.
“하. 더러워서 안 본다. 리엔 오기만 해 봐 네가 동아리실에서 그렇고 그런 거 보고 있었다고 다 불어 버릴 거니까.”
카르시온의 유일한 약점이 리엔인 것을 아는 피오르는, 그것을 인질로 협박하는 데 일말의 주저함이 없었다.
그 협박에 카르시온이 입술을 말아 올렸다. 섬뜩함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한번 말해 봐. 오늘 쓴 네 일기장이 내일이면 유언장이 되어 있을 테니.”
피오르가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이 말했으면 콧방귀를 뀌며 협박도 현실적이게 좀 해 보라고 비아냥거렸을 거다. 하지만 카르시온이 말하니 정말 진심처럼 느껴졌다.
목숨의 소중함을 아는 피오르는, 아쉽지만 이 방법은 봉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갑자기 생각난 일인 듯 입을 열었다.
“아, 맞다. 너 오늘 리엔 동아리 불참한다는 것 들었어?”
“뭐?”
카르시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피오르의 멱살을 잡았다. 초조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왜? 설마 어디 아프대?”
피오르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한쪽 손으로 그의 손을 떼어 내며 여상스럽게 말했다.
“아픈 건 아니고. 아마…….”
“아마?”
피오르는 말을 늘어뜨리며 카르시온의 정신이 리엔의 걱정으로 쏠린 틈을 타, 그의 안쪽 재킷에 손을 넣었다.
쿵-!
하지만 피오르의 수작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피오르의 손이 재킷 안쪽으로 향하는 것을 눈치챈 카르시온이 그의 손목을 잡고 그대로 벽에 밀어 버린 것이다.
“감히 리엔의 이름을 팔아서 개수작을 부려?”
피오르는 카르시온의 손에 잡혀 얼얼한 제 머리를 손으로 움켜쥐지도 못하고 신음만 작게 흘렸다.
“으으, 머리 깨지는 줄 알았네.”
그러고는 괴물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카르시온을 바라봤다. 감탄 반 징그럽다는 느낌이 반반 섞인 눈빛이었다.
‘마법사 주제에 반사 신경이랑 힘은 왜 이렇게 좋은 거야?’
그러다 카르시온이 불현듯 미친 사람처럼 입술을 씰룩이며 웃음을 토해 냈다.
“푸흡, 흡.”
피오르는 멍하니 그런 카르시온을 쳐다봤다.
원래 정신이 나간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맛이 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르시온이 입술을 씰룩이며 거만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보고 싶냐? 보여 줄까?”
“안 보여 준다며?”
진지하게 카르시온을 정신과 상담을 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고민에 휩싸였다.
그때였다. 리엔이 문을 벌컥 열고 동아리실에 들어온 것은.
“늦어서 미안, 잠깐 놓고 올 게 있어서 기숙사 좀 들리느ㄹ…….”
리엔은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묘한 포즈의 카르시온과 피오르를 보고 머리가 정지했기 때문이다.
벽에 붙어 카르시온에 의해 두 손이 결박되어 있는 피오르.
카르시온은 어딘가 변태스러워 보이는 웃음을 짓고 있었고, 피오르는 어딘가 체념 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
리엔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호모나 세상에 게이 뭐람.”
그러고는 몸을 굳힌 채 눈만 이리저리 굴리다가 슬그머니 뒷걸음질 친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문을 닫는 리엔.
달칵.
“아악!”
“으아아아악!”
리엔이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동시에 서로를 밀쳐내는 카르시온과 피오르.
그들은 곧바로 뭔가 단단히 오해한 듯한 리엔을 데리러 뛰쳐나갔다.
결국, 둘의 손에 잡혀 온 그녀는 소파에 앉아 두 남성의 해명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리엔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얼굴에 다 지워내지 못했고, 동아리실은 어쩐지 어색한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나는 너희들의 취향을 존중해.”
리엔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둘을 쳐다봤다.
그 눈빛에 피오르가 제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답답하다는 듯 열변을 토해 낸다.
“정말 네가 생각하는 일은 없었다니까! 카르시온이 재킷 안쪽에 뭘 숨기고 안 보여 주길래 몰래 뺏어 보려다가 그런 거야!”
카르시온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러게 왜 남의 사생활을 들추려고 해?”
“네가 이상한 반응을 보이지만 않았어도 나도 그렇게 파고들 일 없었거든?”
“그렇게 야한 게 보고 싶었으면 네 침대 밑에 있는 거나 열심히 보라고. 내가 가지고 있던 건 그런 숭한 게 아니었으니까.”
카르시온의 까발림에 리엔이 묘한 눈빛으로 피오르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피오르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부정한다.
“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없어.”
리엔은 피오르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피오르.”
“으응?”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좋은 거 있으면 공유하자.”
순간 동아리실에 정적이 내려앉는다.
제가 뱉은 말에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리엔이 눈치를 보며 작게 입을 열었다.
“……농담이야.”
하지만 멈춘 카르시온과 피오르의 시간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미 변명하기에는 늦었다는 것을 깨달은 리엔은 뻔뻔해지기로 했다.
“할 말 있어?”
“아, 아무것도 아니야.”
둘은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에 리엔은 눈썹을 씰룩이며 다른 주제를 꺼냈다.
“그보다 둘 다 방학 동안 뭐 하고 지냈어? 잘 지냈지?”
평범하게 안부를 묻는 말이었으나 피오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야 뭐, 매일 매일 전쟁이었지. 형이랑 기 싸움 하느라 진이 다 빠졌어. 여기 오니까 좀 살 것 같네.”
리엔에게 고정되어 있던 카르시온의 시선이 힐긋 피오르에게 향했다.
피오르가 리엔에게 사정을 털어놨다는 것은 전해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여기서도 맨날 카르시온이랑 전쟁이잖아.”
“그래서 나도 신기해하던 참이었어. 여기가 더 나을 줄은 몰랐네. 형 이 자식은 어떻게 매년 갈구는 능력이 좋아지냐.”
리엔 또한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카르시온이 다시 리엔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피오르가 방학 동안 어떤 시간을 보냈건 전혀 관심 없다는 태도였다.
“여자친구들이랑 데이트는 잘했고?”
리엔의 짓궂은 물음에, 피오르는 억울하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전에 헤어진 애가 마지막이었어. 그리고 자주 바뀌긴 했지만, 문어발인 적은 없다고. 날 뭐로 생각하는 거야?”
“쓰레기……?”
“마음은 없었어도 사귈 때는 나름 잘해 줬거든?”
“그래그래.”
리엔은 ‘귀찮으니까 인정하는 척해 줄게’라는 느낌으로 대충 대답했다. 그녀의 반응이 미적지근하자 피오르가 주먹을 꼭 말아 쥐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제 마음에도 없는 사람이랑은 안 사귈 거야.”
어쩐지 진심이 느껴지는 모습에 리엔은 생각했다.
안 타는 쓰레기가 타는 쓰레기로 진화했다고.
그에 대한 평가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피오르의 말이 다 끝난 듯 보이자 리엔은 카르시온에게 시선을 옮겼다.
“카온 너는? 어때, 그래도 ‘그게’ 있으니까 좀 낫지?”
카르시온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실물 리엔이 훨씬 좋아.”
“무슨 소리야? 그게 뭔데?”
둘만 아는 듯한 내용에 피오르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어왔다. 리엔이 대단한 건 아니라는 듯 다리를 꼬며 입을 열었다.
“그냥 뭐…….”
리엔이 말해 줄 듯 말듯 뒷말을 흐리자, 안달이 난 피오르가 눈썹을 그러모으며 뒤에 나올 말을 기다렸다.
피오르의 궁금하다는 눈빛을 마주한 리엔의 입가에 돌연 웃음이 올라왔다. 장난기가 발동됐다는 신호였다.
“비밀.”
“아, 너까지 이러기야?”
피오르가 눈을 세모꼴로 뜨며 불퉁스럽게 입을 비죽였다. 그가 애원의 눈빛을 담아 카르시온을 바라봤다.
“뭘 봐.”
하지만 카르시온은 이미 리엔과 눈빛으로 작당 모의를 마쳤는지 비웃음을 걸치며 눈빛을 받아칠 뿐이었다.
‘그래, 내가 너한테 뭘 기대하겠냐.’
피오르의 시선이 다시 리엔에게 향했다.
리엔은 아닌 것 같아도 마음이 여렸으니 기분 상한 척하면 장난이 오래가지는 않을 거다.
“정 알려 주기 싫으면 힌트라도 줘 봐.”
“음.”
리엔은 잠시 무슨 힌트를 줄까 고민하다가 그를 골릴 생각으로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단어를 선택했다.
“아주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거지.”
“뭐?”
“방학 동안 보지 못하는 나를 대신할 수 있는 물건이기도 하고.”
“너, 너희 벌써 성인의 전유물에 손을 댄 거야……?”
“허어. 성인의 전유물이라니. 알 거 다 아는 애가 샌님처럼 굴지 마, 피오르.”
그러자 피오르의 동공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 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