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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26)화 (26/161)

26화

카르시온을 힐끔 보니 그는 리엔의 말이 다 옳다는 듯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사진 정도야 돈만 있으면 누구나 찍을 수 있는데 뭐.”

“어?”

“방학에 나랑 카르시온이랑 같이 사진 한 장 찍었거든.”

사진이라는 말에 속에서 오만가지 상상을 했던 피오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또 당했다.

“……그럼 아까 카르시온이 실실거리며 보던 게 혹시?”

피오르가 정답을 맞히자 카르시온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재킷 안쪽에서 사진을 꺼냈다.

카르시온이 얄밉게 사진을 살랑살랑 흔든다.

마치 ‘너는 이런 거 없지?’ 하며 놀리는 듯한 태도였다.

피오르의 눈매가 점점 위로 올라가자 또 둘이 치고받고 싸울 것 같은 느낌에, 리엔이 협상안을 내놓았다.

“그럼 다음에는 셋이 같이 가서 찍던지.”

카르시온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그가 조금 떨리는 음색으로 리엔이 말을 취소하기를 종용했다.

“리엔.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안 될까? 사진 한 장이 싼 것도 아니고.”

하지만 이미 리엔의 말을 듣고 신이 난 피오르가 옆에서 얄미운 시누이처럼 손뼉을 짝짝 쳤다. 뱉은 말을 무르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이.

“와, 진짜 너무 좋은 생각이다. 어떡해. 벌써 너무 기대되는걸?”

사진을 찍는다는 사실보다 카르시온을 놀릴 수 있다는 사실에 더 신이 난 것 같았다.

드물게 피오르와의 싸움에서 진 카르시온이 분하다는 듯 이를 악물었다.

그들의 하는 양을 지켜보던 리엔이 짧게 혀를 찼다.

“왜 그런 거로 질투해 카온. 너도 사진 한 장 더 늘어나면 좋은 거 아냐?”

“……!”

그녀의 말이 맞았다. 사진 한 장 더 늘어나면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일단 셋이 같이 찍고 나중에 피오르 몫의 사진은 갈취하면 된다.

그리고 사진에서 피오르가 나온 부분만 잘라 내면 완벽.

카르시온이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리엔의 말을 듣고 보니 사진을 찍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 * *

리엔의 오해와 카르시온, 피오르의 싸움이 막이 내리고, 그들은 평소와 같이 동아리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놀았다는 뜻이다.

리엔은 소파에 누워 약초 관련 서적을 읽었고, 카르시온은 바닥에 앉아 등을 소파에 기대고는 피오르와 체스를 뒀다.

동아리실 안에는 책상과 의자가 버젓이 있었다. 하지만 둘은 당연하다는 듯 바닥에 앉아 체스를 뒀다.

카르시온이 리엔이 상시 거주하고 있는 소파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피오르는 항상 반강제로 바닥에 앉아야만 했다.

처음에는 그도 카르시온을 설득해 봤지만, 결국 백기를 든 것은 피오르였다.

방학 끝에 찾아온 익숙하고도 평화로운 동아리 시간.

똑똑.

그 시간을 방해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노크 소리에 당연하다는 듯 리엔과 카르시온의 시선이 피오르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피오르는 턱을 들고 당당히 말했다.

“찾아온 사람이 나면 한 달 동안 리엔의 노예 한다.”

그만큼 자신이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카르시온은 그의 말을 듣고 정색했다.

“그건 벌이 아니라 포상이잖아. 어디서 은근슬쩍 수작질이야? 걸려면 네 손목 정도는 걸어야지.”

피오르가 그건 너한테나 포상이냐며 따지려던 때, 동아리실 문밖에서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다. 문 열어.”

‘나다’라는 말에 세 사람은 시선을 교환하며 눈빛으로 서로 아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들어간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문밖의 사람은 인내심이 좋은 편은 아니었는지 동의 없이 문을 벌컥 열어 버렸다.

“……교수님?”

“어, 리엔.”

허락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리엔 반의 담임 교수 월터였다. 리엔은 읽던 책을 접어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아리실까지 무슨 일이세요?”

매사 귀찮다는 말을 달고 사는 그가, 다른 사람을 통해 저를 부른 것도 아니고 직접 찾아왔다니 의외인 일이었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다.”

“부탁이요?”

월터 교수가 크게 하품을 하며 느릿하게 리엔의 말에 대답했다.

“그래, 부탁. 그래서 말인데 시간 좀 내줄 수 있니?”

“시간이라면 낼 수 있죠.”

흔쾌히 대답하는 듯 보였으나, 리엔은 부러 ‘시간’이라면 내줄 수 있다는 말을 내뱉었다.

무슨 부탁을 할지 몰랐기 때문에 빠져나갈 구석을 만든 것이다.

월터 교수의 성격이라면 귀찮은 일을 떠넘기고도 남을 성격이었다.

왜 하필 많은 학생 중에 저를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나는 월터 교수님 따라 먼저 가 볼게.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니까 동아리 시간 끝나면 둘 다 먼저 들어가.”

리엔은 저를 바라보고 있는 둘에게 기다리지 말라는 말을 남기며 월터 교수를 따라 나갔다.

그렇게 카르시온과 피오르 둘만 남겨지고.

카르시온이 리엔이 떠난 자리를 바라봤다. 미련이 가득 남은 얼굴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카르시온이 대뜸 입을 열었다.

“피오르.”

“뭐.”

“너는 리엔이 착하다고 생각하냐?”

“……객관적으로?”

“뭐든.”

피오르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답했다.

“악마지 악마.”

그러자 달리 감정이 서리지 않았던 카르시온의 눈에 깊은 분노가 서렸다. 지금 뭐라 지껄였냐는 표정이었다.

“리엔이 악마라고? 우리 착하기만 한 리엔이 어디가 어때서? 눈깔 삐었냐?”

피오르는 잠시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말을 정정했다.

“……착한 것 같기도 하고.”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네가 감히 리엔을 마음에 담아? 넌 뒈졌다 이 새끼야.”

농담이 아니었다는 듯 카르시온의 주변으로 온갖 마법진이 생성된다.

범상치 않은 느낌에 피오르가 소파에 있던 담요를 들어 제 앞을 가렸다.

빈약하기 짝이 없는 방패였다.

“이, 이 미친놈이. 이럴 거면 왜 물어본 건데! 그리고 착하다는 게 왜 좋아한다는 거로 직결되는 거냐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카르시온의 귀에는 피오르의 황당하다는 외침 따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오늘도 ‘피고동’은 어김없이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해냈다.

* * *

월터 교수님을 따라 교무실에 도착한 나는 이게 뭐냐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교수님이 어깨를 으쓱이며 제 옆에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전학생이다.”

나는 얼굴을 와락 구기며 교수님이 소개한 전학생을 쳐다봤다. 오늘 내 어이를 훔쳐 간 도둑, 자의식 과잉 환자였다.

그도 네가 왜 여기 있냐는 듯 불만스레 눈썹을 꿈틀거린다.

월터 교수님은 우리의 싸늘한 시선 교환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리엔 너도 편입 시험을 쳐서 들어온 케이스이니, 전학생의 마음을 잘 알고 있겠지. 비슷한 입장이었으니까 네가 학교 소개를 좀 해 주면 좋을 것 같아서.”

역시, 귀찮은 일을 떠넘기려고 날 찾아왔구나…….

나는 배신감이 담긴 눈빛으로 월터 교수님을 바라봤다.

“이러려고 동아리실까지 찾아오신 거였어요?”

“이분…… 아니, 얘는 전학생이라 아직 학교에 대해 잘 몰라.”

“저도 아직 잘 모르는데요.”

“얘보다는 낫겠지.”

“하지만…….”

“내일부터 정식으로 등교니까 오늘 같이 돌아다니면서 알려 주면 딱이겠네. 그럼, 잘 부탁한다.”

내가 거절을 말할 새도 없이 월터 교수님은 내 어깨를 툭툭 두들기고는 재빨리 연구로 쏙 들어갔다.

평소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빠른 움직임이었다.

이럴 때만 재빠르지.

나는 황당한 얼굴로 굳게 닫힌 교무실 문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체념 어린 마음으로 고개를 돌려 자의식 과잉 환자를 바라봤다.

생각해 보니까 전학생이면 아침에 제인과 이야기를 나눴었다.

아바스칸투스 제국의 황자가 전학 왔다고 했지.

그럼 저 자의식 과잉 환자가?

슬쩍 명찰 부분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는 아직 교복에 이름을 새기지 않아 확인할 수 없었다. 나는 제일 먼저 이름을 물었다.

“이름이 뭐야?”

그는 불만 어린 표정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물음에 답했다.

“……쿤입니다.”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쿤 에드가 아바스칸투스겠지.

근데 황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왜 존댓말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뭐 내 알 바는 아니지만.

“그래, 쿤. 보아하니 오늘 아카데미에 처음 온 모양인데, 혹시 오늘뿐만 아니라 모르거나 힘든 일 있으면…….”

나는 방긋 웃어 보였다.

“절대 내게 뭘 물어보거나 하지 말고 힘들게 혼자 고생했으면 좋겠다.”

“……네?”

“나는 막 편입했을 때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잘 헤쳐 나갔거든. 아, 혹시 귀한 몸이라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건가?”

실은 나 혼자 잘 헤쳐 나가긴 개뿔, 고생 오지게 했다.

‘귀한 몸’이라는 말이 퍽 당황스러웠는지 쿤은 그 자리에서 굳은 채 나를 바라봤다. 그를 뒤로하고 나는 내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그를 스쳐 지나갔다.

“웃기네. 분명 우리 아카데미는 평민과 귀족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러자 쿤이 자리를 벗어나려는 내 손목을 급히 잡았다. 맨손으로 잡았다기에는 의아한 감촉이었다.

시선을 내려 잡힌 손목을 보니 그는 어느새 손수건으로 제 손을 돌돌 말고 있는 상태였다. 그의 행위에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와아.”

닿기도 싫다는 건가. 이런 귀족이 있다는 건 소문으로만 들어왔는데. 조금 신기한걸.

입을 벌리며 손수건을 멍하니 보고 있으려니 머리 위로 그의 묵직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그런 거 아닙니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뭐가 아닌데?”

결벽증? 자의식 과잉?

“우대, 아닙니다. 제가 교수님께 개인적으로 부탁드린 거지.”

“아 그거. 차별이 아니라서 다행이네.”

“오해가 풀리셨으면 이제…….”

“근데 어쩌지 내가 오늘 점심시간에 누구 때문에 바닥에 주저앉은 충격으로 꼬리뼈가 박살이 나서 말이야. 걷는 게 좀 힘드네.”

나는 잡힌 손을 비틀어 빼내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럼 혼자 잘해 봐.”

나는 보란 듯이 파워 워킹을 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오늘 당했던 것을 조금 갚아 줬다는 것 때문일까, 쿤을 다시 만나 더러워졌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느낌이다.

그래. 쟤가 내 말을 안 듣는다면 그냥 처음부터 상대를 안 하면 되지.

라고 생각하며 다시 동아리실로 향하던 나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발걸음을 뚝 멈췄다.

가만. 아바스칸투스 황자는 분명 병약하기로 유명했는데……?

내가 본 쿤 에드가 아바스칸투스는 병약은 무슨, 돌도 씹어 먹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전혀 아픈 사람의 기색이 없었다는 뜻이다.

언제부터 병약의 기준이 그렇게 낮아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픈 게 머리 쪽이라면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래서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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