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월터 교수는 성공적으로 리엔에게 일을 떠넘기고 자리로 돌아왔다. 리엔에게 쿤을 떠맡긴 것은 우연이었다.
지나가는 길에 아무 동아리실이나 열어 보고, 그곳에 아는 학생이 있다면 쿤을 떠맡길 셈이었는데 그 레이더에 딱 리엔이 걸린 것일 뿐.
리엔이 불경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긴 했으나, 사실 월터 교수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는 매사가 귀찮음으로 똘똘 뭉쳐 있어서 걸핏하면 심부름에, 학생들에게 제 일을 떠넘겼다.
웃긴 건 귀차니즘이 그렇게 심한데, 수행평가는 또 밥 먹듯이 진행했다는 거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인기는 많았다.
아. 얼굴이 준수한 편이긴 했다.
얼굴이 인기의 이유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지만, 어쨌든 결론은 그가 인기 있다는 거다.
그래서 그런지 월터 교수의 자리에는 가끔 작은 선물과 함께 학생들의 정성이 담긴 쪽지나 편지가 놓여 있곤 했다.
연구실 책상에 올라와 있는 두 장의 편지와 겹겹이 쌓여 있는 서류들에, 월터 교수가 한숨과 함께 질린다는 표정을 지어냈다.
“그냥 다 뒈졌으면.”
험한 말을 꺼낸 것과 달리 그의 손은 이미 편지를 집어 들고 있었다.
아무리 귀찮아도 학생들의 편지를 꼭 끝까지 읽곤 하는 그였다.
[제 적성에 대해 월터 교수님께 진지하게 상담하고 싶습니다.]
“……음.”
가끔은 이런 상담을 원하는 내용의 편지도 있었다.
월터 교수는 조만간 시간을 비워 둬야겠다 생각하며 편지를 보낸 학생의 이름을 찾았다.
“진짜 더럽게 귀찮게 하네…….”
그런데 이게 웬걸, 편지에는 상담하고 싶다는 학생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의문을 느끼며 편지를 마저 읽어 내려가는데,
[저는 인생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아요. 헤헤.]
월터 교수는 ‘그럼 그렇지’ 하며 편지를 와락 구겼다. 그러고는 다른 편지를 열어 읽어 나갔다.
[교수님 잘 지내시나요?]
이번에는 정상적인 편지인 것 같았다. 그는 편지에 대답하듯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것만 빼면 나름 잘 지낸다고 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부탁만 아니었어도 진작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고 있었을 텐데.
하지만 월터 교수는 그다음에 이어진 말에 다시금 편지를 와락 구길 수밖에 없었다.
[왜 잘 지내세요.]
* * *
이튿날 아침.
아직 아침 조회 시간 전인 탓에 교실 안은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로 가득 찼다.
리엔과 제인도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를 배경음 삼아 대화하고 있었다.
“뭐? 전학생이 우리 반으로 배정된 것 같다고?”
“응. 우리 반에 배정됐으니까 월터 교수님이 전학생을 맡았겠지. 물론 그마저도 내게 떠넘기려고 하셨지만.”
“으엑. 네 얘기 들어 보니까 진짜 짜증 나는 스타일이던데 하필이면 같은 반일 게 뭐람.”
“괜찮겠지. 상종하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리엔은 책상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치며 말했다. 별거 아니라는 표정과 말투였다.
그에 제인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모로 기울인다.
“하지만 어제 그렇게 세 번이나 마주친 걸 보면, 상종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오늘도 이상한 일로 엮이게 되는 거 아냐?”
“……불안하니까 그런 플래그 성 짙은 말은 하지 말아 줄래?”
파멸의 주둥아리의 위력을 알고 있는 리엔은 큰 위기감을 느끼고 제인이 플래그를 세울 수 없게 막아 버렸다.
그때 소란스러운 교실 사이로 월터 교수가 누군가와 함께 들어왔다. 그녀들 대화의 주인공, 전학생 쿤이었다.
쿤의 등장에 시끄러웠던 교실 안이 더욱 술렁였다.
“헉. 저분인가 봐.”
“잘생겼다.”
“근데 좀 무섭게 생겼다, 그치.”
확실히 그의 큰 덩치도 덩치이지만, 치켜 올라간 눈매는 쿤을 더욱 위협적이고 사나워 보이게 했다.
물론 잘생긴 얼굴 덕분에 위험하면서도 묘하게 섹시한 느낌을 자아내긴 했다.
그의 눈동자가 짙은 보랏빛인 것도 그런 분위를 만드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반 아이들이 쿤을 보며 술렁이고 있을 때 리엔은 속으로 짜증을 토해 내고 있었다.
‘아, 역시 우리 반이었네.’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달갑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탁탁. 일정 속도로 책상을 치던 손놀림이 빨라졌다. 언짢은 심리가 그대로 드러난 행동이었다.
제인이 리엔의 옆구리를 툭 치며 물었다.
“쟤야? 어제 그 자의식 과잉?”
“응.”
쿤을 바라보는 제인의 시선은 절대 곱다고 할 수 없었다. 어제 기숙사에서 리엔에게 들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여자 많이 울렸을 것 같이 생겼네. 안 타는 쓰레기 같은 자식.”
제인의 표현에 리엔은 흠칫하고 말았다.
‘안 타는 쓰레기라는 별명은 피오르 건데.’
그러다 얼마 전 피오르를 타는 쓰레기로 승격시켜 줬다는 것을 깨달은 리엔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안 타는 쓰레기는 이미 사용한 것이었으니, 다른 별명을 붙여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쓰레기 앞에 ‘안 타는’ 말고 다른 수식어는 없나?”
리엔의 말에 제인이 잠시 쿤의 얼굴을 노려보며 고민하더니, 뭔가 떠오른 듯 의견을 내놓았다.
“음. 섹시하게 생겼으니까 섹시한 쓰레기는 어때?”
“그럼 줄여서 섹…….”
텁.
“거기까지.”
제인은 급하게 리엔의 입을 틀어막았다.
가까스로 ‘쓰’를 이어 말하는 것을 막아서 다행이었다. 0.1초만 늦었어도 정말 큰일이 일어났을 거다.
“이 별명은 안 되겠다. 별명을 줄여 부르는 순간 리엔 너의 순수하고도 맑은 입술이 오염되어 버려.”
리엔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몇 초 후 그녀는 제가 무슨 말을 뱉으려 했는지 깨닫고 제인에게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말하는 감자를 줄여 말감이라고 불렀듯 자연스럽게 줄여 부르려 했는데, 저 별명은 차마 줄여 부를 수 없는 별명이었다.
제인이 리엔의 입에서 손을 떼어 내자마자 교탁에서 월터 교수의 음성이 들려온다.
여느 때처럼 귀찮음이 듬뿍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다들 조용.”
하지만 그리 크게 말하지 않은 탓일까, 그의 말에 교실이 조용해지는 일은 없었다.
학생들이 입을 다물 기색이 보이지 않자, 월터 교수는 조용히 시키는 것마저도 귀찮다는 듯 애들이 듣거나 말거나 제 할 말을 했다.
“전학생이다. 우리 반에 배정됐으니 앞으로 잘 지내도록.”
월터 교수가 교실 맨 뒤의 빈자리를 턱짓한다.
“저기가 네 자리다.”
뭔가 많은 생략에, 쿤이 다소 당황한 듯 눈을 떨었다.
“제 소개는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까?”
“방금 했잖아?”
월터 교수는 뭐가 잘못됐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쿤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월터 교수의 성향을 단번에 파악한 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쿤의 끄덕임을 본 월터 교수가 만족스러운 눈을 하며 손뼉을 크게 한 번 쳤다.
순식간에 반 아이들이 입을 다물고 교수를 바라본다.
“그럼 아침 조회는 이거로 끝내도록 하겠다.”
처음부터 손뼉을 쳤으면 됐을 것을 왜 나갈 때가 되어서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월터 교수가 교실에서 빠져나가고, 쿤이 배정받은 제 자리로 천천히 이동했다.
제 자리를 찾아가던 쿤은 무심히 시선을 돌리다가 저를 반쯤 노려보다시피 하는 리엔을 발견했다.
쿤의 발걸음이 리엔의 앞에서 뚝 멈춘다.
“당신…….”
그의 미간에 단숨에 깊은 골이 파였다. 어제 리엔이 저를 덩그러니 놓고 간 것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뭐, 왜. 할 말 있어?”
리엔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쿤의 시선을 받아쳤다. 그에 쿤이 뭐라 입을 열려 할 때,
“리엔!”
누군가 리엔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해사한 미소를 걸치고 있는 카르시온이었다. 그는 쿤에게는 일말의 시선 한 톨조차 주지 않고 리엔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카온?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카르시온이 저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질 대로 퍼졌다.
해서, 그녀는 이제 다른 사람이 보거나 말거나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리엔의 물음에 카르시온이 씩 웃으며 아공간을 소환해 낸다.
“어제 아카데미 상점가에 갔다가 네 생각이 나서 뭐 좀 사 왔거든.”
라는 말을 하며 아공간에서 뭔가를 잔뜩 꺼내는 카르시온. 그는 리엔의 책상에 온갖 과자와 초콜릿 등을 꺼내 놓았다.
리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부터 단 음식이 계속 생각나던 참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뭘 또 가져왔냐고 했을 리엔의 얼굴에 희미한 기쁨이 떠오른다.
“이건 너무 많은데…….”
곤란하다는 듯한 말을 내뱉긴 했으나,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는 것을 눈치챈 카르시온이 흐뭇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선물을 받은 리엔보다 더 기쁜 듯한 밝은 웃음이었다.
사실 카르시온은 리엔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녀의 작은 반응 하나하나를 기민하게 받아들이며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과자와 초콜릿을 그냥 준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는 리엔이 어제 화장실을 몇 번이나 간 것. 아주 짧은 순간 살짝씩 눈을 찌푸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독 두꺼운 담요를 덮었다는 것도.
“너무 많으면 두고두고 먹으면 되지.”
아무리 카르시온이 원해서 제게 선물을 하는 것이라고는 하나, 매일 받기만 하기 뭐했던 리엔은 그에게 뭐라도 보답해 주기로 했다.
“고마워. 다음에는 내가 근사한 곳에서 저녁 한번 사 줄게.”
리엔의 말에 카르시온의 얼굴이 기쁨으로 상기됐다.
교내 식당이 아닌 다른 곳에서 저녁을 먹으려면 아카데미 주변 상점가로 나가야 했고, 카르시온 입장에서 그것은 곧 데이트와 다름없었다.
그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핀다.
“진짜? 그럼 약속 먼저 해 줘.”
카르시온이 수줍게 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에 리엔이 픽 하고 웃으며 그의 새끼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마주 걸어 주었다.
같은 새끼손가락이지만 그와 리엔의 손가락의 크기 차이는 꽤 상당했다.
카르시온은 그에 당연하다는 듯 리엔의 작은 손가락에 매료되어 시선을 뺏겼다.
그사이 리엔이 이쯤 하면 됐겠지라는 생각으로 손가락을 뺐다. 그가 멍하니 리엔을 바라본다.
그녀가 소중한 것을 앗아 가기라도 한 듯한 표정. 미련이 가득 남은 모양이었다.
“리엔. 근데…….”
카르시온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리엔의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새ㄲ…… 아니, 얘는 누구야?”
분명 표정은 웃고 있는데,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낮은 음성이었다.
리엔은 쿤에게 쓱 한번 시선을 주고는 말했다.
“전학생.”
“흐응.”
의미를 알 수 없는 감탄사를 내뱉은 카르시온이 쿤을 쳐다봤다.
쿤의 자안과 카르시온의 벽안이 허공에서 맞부딪친다.
멀대 같은 애 둘이서 서 있으니 리엔의 앞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리엔은 생각했다.
이제 둘 다 제 자리에서 꺼져 줬으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