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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29)화 (29/161)

29화

아이들이 빠르게 강사님 앞에 줄을 서 제비를 뽑았다. 제인도 어서 줄을 서자며 재촉했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먼저 서. 나는 남은 거 가져갈래.”

제인은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는 듯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줄을 서서 제비를 뽑아 왔다.

“나는 8번이야.”

제인이 뽑아온 제비를 내 앞에서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때, 누군가 제인의 어깨를 툭툭 친다.

“제인 네가 내 파트너구나. 나도 8번이야. 앞으로 잘 부탁해.”

“오, 그래? 나도 잘 부탁해.”

그녀의 파트너는 다행히도 성격상 딱히 모난 것 없는 아이였다.

제인과 그의 파트너가 대화 나누는 것을 구경하는 동안 모든 사람이 제비를 뽑았나 보다.

강사 선생님의 앞으로 서 있던 아이들이 모두 흩어진 상태였다.

느릿하게 걸어가 마지막 남은 제비를 내가 가져가려는데,

“어머? 미안해요. 제가 학생들 인원을 착각했나 봐요.”

강사 선생님의 손에 들린 제비는 없었다.

“그럼 저는 파트너 없이 해야 하는 건가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카르시온이 내가 누군가와 춤을 춘다는 것을 알면 또 울먹일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은 그저 꿈일 뿐이었는지 강사님이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이 반은 남녀 짝수가 똑같거든요. 제가 실수한 건 제비뽑기의 개수일 뿐이죠. 학생처럼 제비를 못 뽑은 남학생과 파트너를 하면 된답니다.”

그 말에 나는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아까 줄을 설 때 그 재수 없는 얼굴을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설마?

“어머나. 선남선녀가 파트너가 됐네요.”

강사 선생님이 입을 가리며 흐뭇한 표정을 했다.

나는 뻣뻣한 움직임으로 강사 선생님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번 학기 내 춤 파트너는,

쿤이었다.

나는 내 파트너를 확인한 후 꽤 오랫동안 멍을 때렸다. 이 정도면 누군가 내 운명을 조작한다고 해도 믿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 물론 나만 싫어한 건 아니었다. 쿤 그 자식도 내가 파트너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썩은 얼굴을 했다.

누가 더 화나는 상황인데…….

“오늘은 간단히 기본 스텝을 배워볼게요.”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오늘은 파트너가 필요 없는 기본 스텝이었다.

“아. 다음 준비물은 상대 파트너에게 선물할 꽃입니다. 한 송이라도 좋으니 상대 파트너에게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꽃을 준비해 보아요.”

꽃을 준비해 오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쿤을 힐끔 바라봤다.

쟤는 꽃 꺾는 거 싫어하지 않나?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얼굴에 딱히 큰 불만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왜 화내지 않지? 설마 그때는 그냥 나한테 시비를 걸고 싶어서 화냈던 건가?

왠지 그러고도 남을 것 같은 느낌에, 오랜만에 혈압이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났다. 그에게 정말 잘 어울릴 만한 꽃이.

* * *

리엔의 춤 수업이 끝나고.

다음 춤 수업은 카르시온과 피오르 반의 차례였다. 카르시온은 마지막으로 남은 제비를 강사의 손에서 가져오며 작게 중얼거렸다.

“리엔이랑 같은 반이었으면 무슨 수를 쓰든 내가 파트너 자리를 차지했을 텐데…….”

그러다 문득, 카르시온의 머릿속에 한 가지 큰 깨달음이 스쳤다.

……미친.

이 수업은 학년 전체가 받는 공동 수업이었다. 즉, 리엔도 자신처럼 파트너가 정해졌을 거란 뜻이다.

리엔의 파트너?

누군가가 리엔을 마주 보며 그녀의 손을 잡고, 더 나아가서는 허리를 잡는다고?

카르시온의 두 눈이 흉흉하게 번뜩였다. 누군지도 모를 리엔의 파트너를 당장이라도 찾아 찢어 죽일 듯한 눈빛이었다.

그녀가 제가 아닌 다른 사람과 춤을 춘다니.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절대.

* * *

“얘들아. 나 어디 다녀와야 해서 오늘은 동아리 빠져야 할 것 같아.”

리엔의 말에 동아리실에 있던 남정네 두 명이 동시에 그녀를 바라봤다. 그중 카르시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당장이라도 리엔을 따라갈 기세.

“어디? 오늘 밖에 엄청 덥던데.”

“누구한테 줄 꽃 캐러 아카데미 뒷산에. 아 정확히 말하면 꽃은 아닌가?”

리엔이 누군가에게 줄 꽃을 캐러 간다는 말에 카르시온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누구라고 하는 걸 봐선 자신에게 줄 꽃은 아닌 것 같고,

설마.

“……혹시 그 찾는다는 꽃이 춤 수업 파트너에게 줄 꽃이야?”

“응.”

그녀의 가벼운 끄덕임을 본 카르시온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 갔다.

사서 주는 것도 돌아 버릴 판에, 뭐? 직접 꽃을 찾아서 줘?

대체 어떤 의미가 담긴 꽃을 선물하려고.

그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흉흉했던 기세가 흐트러졌다.

감히 리엔을 보며 살기를 뿜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서러운 감정이 북받치면서 그의 눈가가 서서히 붉어졌다.

“무……슨 꽃을 줄 건데?”

카르시온이 울음을 참듯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리엔이 별거 아니라는 듯 방긋 미소 짓는다.

“개쉽싸리.”

“뭐…… 라고?”

“개쉽싸리 풀. 내 파트너에게 참 잘 어울리는 풀이야.”

리엔이 정말 활짝 웃으며 내뱉는 말에, 카르시온이 작게 당황했다.

“그런 풀이 있긴 해? 아니, 그보다 꽃을 따러 간다면서 풀을 캐는 거야?”

“실제 존재하는 풀이야. 그리고 내 손톱보다 작게 피긴 하지만 꽃이 피긴 피거든. 큰 꽃을 선물하라는 말은 없었잖아?”

“……그렇게까지 고생하면서 줘야만 하는 거야? 그냥 아무것도 안 주면 안 돼?”

예쁘고 좋은 의미가 담긴 꽃이 아닌 건 다행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개쉽싸리’라는 욕과 같은 풀이라도 그녀의 귀한 시간을 투자해서 뭔가를 준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자식한테 엿만 먹일 수 있다면 이 정도 고생쯤은 해야지. 겸사겸사 다른 약초도 캐고…….”

리엔이 채집 도구를 챙기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개쉽싸리 풀은 연못이나 물가 등 습지 근처에서 자랐다.

방학 때 약초를 캐러 몇 번이나 산에 오른 탓에 물가의 위치 정도는 꿰고 있으니, 찾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터였다.

꽃을 선물 받는 사람에게 엿을 먹이고야 말겠다는 리엔의 의욕에, 카르시온의 내려갔던 눈꼬리가 천천히 정상을 찾아갔다.

아니, 오히려 유쾌한 듯 보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리엔은 파트너에게 쌓인 분노가 상당한 한 것 같았다.

리엔에게 뭔 일이 있었냐며 당장이라도 물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카르시온은 굳이 묻지 않았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그 자식이 뭔 짓을 해서 리엔에게 미움을 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그 여자’가 곧 제게 보고해 올 테니.

리엔의 기분을 나쁘게 만든 대가는 천천히 갚아 주면 그만이었다.

카르시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화사하게 웃었다.

“내가 찾는 거 도와줄까?”

“응. 도와주면 나야 고맙지.”

리엔이 파트너를 썩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 일단 그녀 파트너의 손목을 몰래 슥삭 하는 방법은 보류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한편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피오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긴 정말 정상이 한 명도 없나 보다. 으휴, 나라도 정상이라 다행이지 진짜.”

* * *

이튿날.

어제 성공적으로 개쉽싸리 풀을 찾은 나는 들뜬 마음으로 무용실을 찾았다.

오늘 꼭 쿤 그 자식의 일그러지는 면상을 꼭 보고야 말리라.

나는 제인과 함께 기분 좋게 들어간 무용실에서 강사 선생님과 대화하고 있는 쿤을 발견했다.

“……점수는 최하로 주셔도 괜찮으니, 파트너와 춤추는 것만은 제외해 주셨으면 합니다.”

와, 얼마나 나와 파트너를 하기 싫었으면 점수를 최하로 받으면서까지 혼자 추려고 해? 그래도 나는 꾸역꾸역 같이 해 주려고 했는데.

고까운 마음에 눈을 가늘게 뜨며 쿤을 노려보는데, 문득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노란 꽃이 시야에 들어왔다.

꽃을 가져왔네……?

그렇게 자연을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굴더니 저게 뭐람. 완전 선택적 자연 지킴이잖아?

내가 속으로 쿤의 이중적 태도를 비아냥거리고 있을 때, 그와 마주한 강사 선생님은 곤란하다는 듯한 눈빛을 하며 입을 열었다.

“따로 이유가 있나요?”

“저는 어지간한 춤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굳이 연습이 필요하지 않아요.”

강사 선생님이 사뭇 엄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잘 들어요, 학생. 이 반에서 제가 가르치는 춤을 이미 알고 있는 학생은 쿤 학생뿐만이 아니에요. 어쩌면 저보다 잘 추는 학생도 있을 수 있겠죠.”

아레나 아카데미에는 귀족 자제들도 많이 다니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귀족이라면 어렸을 때부터 사교계 춤은 기본으로 배웠을 테니.

“게다가 이건 쿤 학생만 점수를 포기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학생과 파트너가 된 여학생에게 피해가 가는 일이라고요.”

“…….”

“학생도 지금 억지 부리고 있다는 거 알죠?”

입을 꾹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쿤을 보며 강사 선생님이 한숨을 작게 쉬었다.

그러다 쿤의 손에 들린 꽃을 힐끔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꽃은 성실히 챙겨 왔으니 진심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여기까지만 할게요. 이만 자리로 돌아가세요.”

“……알겠습니다.”

점수를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던 처음 패기로운 모습과 달리, 그는 강사의 말에 금방 수긍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물론 얼굴에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 명백히 드러나 있었지만.

쿤이 터덜터덜 걸어 내 앞에 섰다.

그때 강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쿤과 대화할 때와 다른, 조금 들뜬 듯한 목소리였다.

“자, 일단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파트너와 꽃을 교환하도록 할까요?”

쿤이 잠시 나를 집 안에 출몰한 바퀴벌레 바라보듯 바라보다가 제 손에 들고 있던 꽃을 내밀었다.

“……잘 부탁합니다.”

아까 멀리서 봤을 때는 그냥 노란색 꽃이구나 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가 가져온 꽃이 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활짝 피어난 노란빛의 장미.

나는 그가 내민 꽃을 아무것도 들지 않은 한쪽 손으로 받으며 활짝 미소 지었다. 그가 가져온 꽃보다 더 활짝.

……이 개자식이.

노란 장미의 꽃말은 질투와 시기.

내가 여기까지만 알고 있었어도 그냥 깜찍한 것을 가져왔구나 하고 생각하며 그냥 넘어가 줬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가져온 노란 장미는 그냥 노란 장미가 아닌, 특별한 이름이 있는 종이었다.

내가 저 장미의 이름과 뜻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겠지.

나는 예쁜 장미를 받아 기쁘다는 듯 얼굴에 미소를 유지한 채, 등 뒤로 숨겼던 개쉽싸리 풀을 쿤에게 건넸다.

“전에 보니까 너는 꽃 모가지 따는 걸 사람 모가지 따는 것처럼 혐오하는 것 같아서…….”

일부러 캔 상태 그대로 가져온 탓에, 내민 개쉽싸리 풀에서 흙이 후드득 떨어진다.

쿤의 흔들리는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흙으로 향했다가 다시 내게 고정되었다.

“그래서 특별히 너를 위해 뿌리까지 캐 왔어. 엄청 신선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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