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30)화 (30/161)

30화

개쉽싸리 풀을 바라보는 쿤의 표정이 서서히 썩어 갔다. 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걱정하지 마. 뿌리는 상하지 않게 잘 캤으니까, 다시 심으면 죽지는 않을 거야.”

쿤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는 썩은 표정을 하고도 꾸역꾸역 내가 내민 개쉽싸리 풀을 받았다.

그러고는 내가 준 풀을 잠시 응시하다가 갑자기 쿡쿡 웃음을 내뱉었다.

그의 웃음을 보자 기분이 더러워진다.

왜 웃어? 더 화내란 말이야.

쿤이 어쩐지 뿌듯해진 표정으로 내 손에 들린 장미를 보며 입을 뗐다. 승리자의 웃음 같기도 했다.

“당신. 그 장미꽃의 이름이 뭔지 알고 있습니까?”

나는 쿤을 향해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네가 그 말을 언제 하나 기다렸다, 이 자식아.

“응. 존넨쉬름이잖아. 꽃말은 거절. 근데 파트너를 거절하고 싶은 건 난데 왜 네가 이런 걸 주는지는 모르겠다.”

단숨에 쿤의 얼굴에서 웃음이 싹 사라졌다. 나는 통쾌한 기분을 느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너만 ‘존넨쉬름’ 같은 이름의 꽃을 준비한 줄 아니?

“아. 그럼 너는 혹시 그 풀의 이름이 뭔지 알아?”

쿤의 눈에서 불안한 기운이 스친다. 그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냥 아무 풀이나 뜯어 온 것 아니었습니까……?”

“어머. 내 파트너에게 줄 꽃인데 아무 풀이나 뜯어 왔을 리가. 내가 그렇게 무정한 사람으로 보였어?”

“네.”

솔직한 아이로군.

나는 상으로 그에게 진실을 알려 주기로 했다.

“개쉽싸리.”

“……?”

물음표가 가득 떠오른 얼굴을 보며 약간의 희열을 느꼈다.

그래, 나는 저런 얼굴을 보고 싶었다고.

나는 비로소 거짓으로 지어내지 않은,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웃음을 지어낼 수 있었다.

“너랑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이지 않아? 개쉽싸리라니.”

쿤이 어이없다는 듯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어, 왜 그런 눈으로 봐? 나는 풀의 이름을 말한 것뿐이야. 개쉽싸리.”

“…….”

“응? 개쉽싸리야 뭐라고?”

“…….”

“어휴, 우리 개쉽싸리가 쿤씨밥세끼 잘 챙겨 드시라고 전해 드리라네. 세심하기도 하지.”

“……그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더 놀리려고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침 강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다들 주목. 이제 얼추 꽃 교환은 끝난 것 같으니,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갈게요. 일단 인사 후 손부터.”

강사 선생님과 보조로 오신 선생님이 가볍게 서로에게 인사했다. 남성분인 보조 선생님 손 위로 강사 선생님이 사뿐히 손을 올린다.

나는 강사 선생님을 따라 쿤에게 인사 후, 그가 손을 내밀기를 기다렸다.

남성이 여성에게 손을 내밀면 여성이 그 위에 손을 올리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쿤이 내게 손을 내미는 일은 없었다. 올라갔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린다.

지금 해 보자 이건가?

“야.”

“……네.”

“손 안 주고 뭐 해?”

“싫습니다.”

저 고집 어린 표정을 보니 괜한 오기가 생겼다.

나는 스킨십을 좋아했으나 웬만큼 친하지 않고는 신체 접촉을 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상황인 만큼 예외를 두기로 했다.

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턱 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유혹하듯 손가락을 그의 목덜미로 유려하게 미끄러뜨렸다.

“무슨…….”

갑작스러운 터치에 당황했는지 그는 뒷걸음질을 쳤다. 나는 그가 당황한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손을 재빨리 붙잡았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탁-!

그가 굉장한 힘이 서린 힘으로 순식간에 내 손을 쳐냈다. 나는 놀라 아픔도 느끼지 못하고 멍하니 쿤을 바라봤다.

쿤도 자신이 그렇게 세게 칠 줄은 몰랐는지,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맞은 손이 아려오긴 했지만, 화가 나진 않았다.

내가 한 잘못도 있을뿐더러, 쿤의 손을 잡는 순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가 왜 점수를 포기하면서까지 파트너와 춤을 추지 않으려 했는지. 그리고 내 손을 잡는 것을 거부했는지를.

쿤의 손을 잡았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건 습기였다.

아니, 습기라고 하기에는 그의 손은 흥건할 정도로 많은 물기가 있었다.

손을 씻었다기에 지금은 한창때인 여름이었고, 물기가 마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나는 짧은 사이에 깨달을 수 있었다.

쿤. 그는 부분 다한증이었다.

부분 다한증이라고 판단한 것은, 다른 땀이 잘 나는 부위인 이마나 목 뒤가 뽀송뽀송했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는 틈이 날 때마다 손수건으로 제 손을 닦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그냥 귀하신 몸이라 결벽증이 있나 보다 했는데.

“쿤. 너…….”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어찌할 줄을 모르고 방황하던 보랏빛 눈동자가 내 눈을 향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나와 쿤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것은.

“와, 둘이 싸우는 거야?”

처음 보는 남학생이었다. 분명 친하지는 않아도 반 아이들의 얼굴 정도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씩 웃었다.

“아까부터 조금 지켜봤는데 이 새…… 아니, 쿤은 파트너와 춤을 추기 싫어하는 것 같은데, 맞아?”

우리는 둘 다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어안이 벙벙한 탓이었다.

남학생은 무안하지도 않은지 대답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이었다.

“내 파트너가 집안에 일이 생겨서 공교롭게도 몇 주간 아카데미를 빠지게 됐거든.”

“…….”

“그래서 난 파트너 없이 홀로 춤 연습을 해야 하는데……. 마침 보니 쿤이 춤을 추기 싫어하는 것 같아서. 괜찮다면 내가 리엔의 파트너가 되는 건 어떨까?”

남학생이 대뜸 내게 제 손을 내밀었다.

“어때?”

그는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어왔다. 쿤의 의사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천천히 그의 손에 내 손을 얹었다. 어쩐지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남학생의 손을 잡자 쿤은 잠시 그와 내가 잡은 손을 응시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러고는 강사 선생님께 가서 뭐라 말한 후 그대로 무용실에서 나가 버렸다.

눈 깜빡할 사이에 파트너가 바뀌게 된 나는 손을 잡은 남학생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게다가 아이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

분명 지금도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것 같달까.

슬쩍 그의 이름표를 확인했다. ‘사이먼.’ 내가 아는 이름이었다. 근데 사이먼이 이렇게 생겼었나?

사이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다시 그의 얼굴을 보니 어쩐지 그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아, 리엔. 사실 말을 못 한 게 있는데.”

나는 사이먼의 목소리에 생각을 넣어 두고 그와 눈을 맞췄다. 그러자 사이먼이 화들짝 놀라며 내 눈을 피했다.

“내가 좀 숙맥이라 긴장을 좀 많이 할 수 있어.”

뭔 소리인가 싶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 문득 사이먼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심장 박동도 함께 느껴질 정도였다.

“풋.”

나는 그만 짧게 웃음을 토해 내고 말았다. 그렇게 여유로운 척하더니.

왠지 모르게 카르시온을 떠올리게 하는 아이였다.

“내 파트너가 되어 줘서 고마워, 사이먼.”

진심으로 말이다.

* * *

한편, 카르시온과 피오르의 반에서는.

피오르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중 카르시온이 평소와 다르게 수업을 열심히 듣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오 어쩐 일이래.’

하지만 몇 분이 지나도 거의 미동조차 하지 않는 카르시온을 보며 피오르는 조금 이상함을 느꼈다.

피오르는 손을 뻗어 카르시온의 등을 쳤다.

“야, 너 아까부터 어떻게 미동 하나 없…… 냐……?”

하지만 그의 손은 카르시온을 때리지 못했다. 피오르의 손이 카르시온의 몸을 불쑥 통과했기 때문이다.

“미친. 이게 뭐야.”

피오르는 기겁하며 손을 치웠다. 카르시온인 줄 알았던 것은, 알고 보니 잘 만들어진 환영이었다.

피오르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흐린 눈빛을 했다.

카르시온이 또 어떤 정신 나간 짓을 하려고 마법으로 환영을 만들어 두면서까지 수업을 빠진 건지 모를 일이었다.

애먼 사람이 죽어 나가지만 않기를 바랄 뿐.

* * *

“어?”

지금 보니 어제 쿤에게 맞은 손이 지나치게 멀쩡했다.

나는 멍이 잘 나는 편이라 당연히 다음 날쯤에는 새파랗게 멍이 들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면 사이먼과 손을 잡고 나서는 아릿한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누가 치유 마법이라도 걸어 준 듯이.

내 착각이겠지만.

뭐, 멍이 나지 않은 것은 반길 일이었으니까.

나는 찌뿌둥한 몸을 풀려 가볍게 기지개를 켠 후 이모께 보낼 편지를 써 내려갔다.

주말에는 이모께 보낼 편지를 쓰는 것이 굳어진 일과였다.

이모께 보낼 편지를 쓰는 도중 갑자기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신성한 주말 아침부터 그 얼굴이 떠오르다니, 운이 좋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에르한 그 자식이 보낸 편지가 벌써 서랍 한 칸을 거의 꽉 채워 갔다.

무심코 편지가 든 서랍을 열었다. 훅 끼쳐 들어오는 라벤더 향기에 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그의 가식이 너무나도 역겨웠다.

나는 폐부에서부터 끌어나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아카데미라 ‘그들’을 볼 일이 없지만, 졸업하고 나면 내가 어딘가에 취직하기 전까지는 이모네에서 신세를 져야 할 것이다.

“마주치지 않으려면 졸업하자마자 독립해야 해.”

……그럼 돈이 필요할 텐데 어디서?

사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적 우리 집은 굉장히 부유한 편이었다.

아빠는 집안일을 도맡아 했기 때문에 돈을 벌어 오시지 않았지만, 엄마가 능력 있는 약초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모님이 이름 모를 병에 걸리신 이후, 부모님의 병을 고치려 용하다는 의원도 불러 보고 사제를 부르는 건 기본.

귀한 약초를 사들여 부모님께 복용시키거나 병을 고치는 연구를 하거나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재정은 바닥나 있었다.

사실 말이 약초가지 연금술도 접목해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료비는 두 배 그 이상이 들었다.

결국, 부모님은 세상을 떠나셨지만 나는 그 돈에 대해 미련은 없었다. 오히려 돈을 아꼈더라면 후회가 남을 테니까.

그리고 혼자 남겨진 나를 이모가 부족함 없이 키워 주셨으니 된 거 아니겠는가.

돈이라.

일단 지금껏 신세 진 이모에게 염치없이 손을 벌릴 수는 없는 일이고…….

내게는 꽤 유용한 약초 레시피들이 있었으니 이걸 어떻게 잘하면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모르겠다.”

복잡한 생각에 책상에 머리를 쿵 하고 박으며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그 상태로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전에 말려 뒀던 약초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슬슬 말감이의 피부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할 때였다.

“치료제부터 만들어 줘야겠네.”

얄밉긴 하지만, 나는 그녀의 피부가 녹아 내려가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둘 만큼 냉정하지 못했다.

게다가 바르몬 크니리나의 치료제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유일했으니까 더더욱.

돌아가신 엄마가 만들어 낸 레시피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말감이를 위한 치료제를 만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것저것 약초를 고르다 보니 다오 트란토가 눈에 들어왔다.

땀 억제제.

다른 말로 다한증 치료제를 만들 수 있는 다오 트란토.

“말감이까지는 몰라도 너만큼은 절대 안 도와줄 거야.”

나는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혼잣말을 내뱉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