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갑자기 들려온 노크 소리에 리엔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제인은 상가에 살 게 있다면서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하긴, 제인이라면 문을 두들길 필요도 없이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왔을 것이다.
“누구세요?”
“…….”
“누구신지 말씀해 주시지 않으면 열어드리기 곤란해요.”
“……아저씨다.”
금남의 구역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남성인 것에서도 놀랐는데, 아저씨라는 말에 리엔의 눈동자가 절로 동그래졌다.
‘아저씨?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 아저씨?’
리엔은 빠르게 문을 열었다.
“아저씨가 여긴 왜……?”
역시, 문밖에 있던 사람은 리엔이 생각한 아저씨가 맞았다.
제게 아질레아 꽃다발을 받아 간 이후 종종 조언을 바라는 편지를 보내던 그 귀족 아저씨.
요즘 리엔의 짭짤한 수입원이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일그러진 얼굴로 리엔에게 말을 했다.
“급히 상담할 게 있어서.”
리엔의 입이 황당함으로 서서히 벌어졌다.
이 뻔뻔한 아저씨가.
아무리 급해도 여자 기숙사에 쳐들어오면 어떡해요.
정말 얼굴부터 시작해서 하는 행동까지 카르시온을 빼닮은 사람이었다.
뭐만 하면 카르시온이 떠오르는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 같았지만.
“……일단 들어오세요.”
리엔은 이마를 짚으며 일단 남성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동안 보여 온 남성의 행동을 봐서는 남성이 위험하다고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표정이 퍽 심각해 보였기도 했고.
이번에는 정말 크게 부부 싸움이라도 한 걸까?
문을 닫고 나니 어느 정도 안심이 된 리엔은 남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로 이렇게 연락도 없이 갑자기 오신 거예요? 그보다 여기가 여자 기숙사인 건 알고 계시고 온 거 맞죠?”
남성이 슬쩍 리엔의 눈을 피하며 말을 돌렸다.
“저번에 알려 준 방법은 효과가 굉장하더군.”
저번에 알려 준 방법?
리엔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와 주고받은 편지가 벌써 수 통째라 무슨 방법을 말하는지 모르겠다.
아.
“앞치마요?”
남성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그걸 진짜 하셨다고요?”
그 말에 리엔은 본능적으로 남성의 얼굴을 대입에 그 장면을 상상하고 말았다.
헙.
리엔이 충격받은 표정을 하며 입을 틀어막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저씨. 혹시 남는 아들 없어요?”
하지만 그녀는 곧 터무니없는 질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성의 젊은 외모를 봐서는 5살 난 아이나 있으면 다행이었다.
그래도 아이가 성년이 되기까지 기다리는 건 무리지 않은가.
나이뿐만 아니라 신분 차도 걸리기도 했고.
리엔의 남는 아들 없냐는 물음에 제 아들을 떠올린 남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텔레포트를 사용해 급히 리엔을 찾아온 이유도 다 그 도움 안 되는 아들 녀석 때문이었다.
“내 아들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군.”
“아, 죄송해요.”
남성은 그저 제 아내의 관심을 뺏어 간 아들이 괘씸해 떠올리기 싫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리엔은 남성이 자신의 귀한 아들을 거론해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했다.
“그보다, 상담하고 싶은 게 있다.”
남성의 진지한 표정에 리엔이 팔짱을 끼며 귀 기울일 준비를 했다.
‘드디어 본론이로군.’
“아내가 딴 남자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데 어떻게 해야 내게 관심을 돌릴 수 있을까. 요즘은 스킨십도 잘 안 해 주려고 해.”
남성의 날카로운 눈매에 어쩐지 시무룩한 기색이 서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네? 아내분이 딴 남자 생각을요?”
아내분이 바람이라도 나신 걸까. 불륜이라니. 그렇다면 정말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잘생기고 아내 바라기인 분을 놓고 다른 곳에 눈을 돌리셨다고?
새삼 아내분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리엔은 아내분이 요즘 관심을 둔다는 남성이 두 부부의 아들이라는 것도, 카르시온이라는 것도 전혀 모르기에 그런 생각을 한 것이었다.
리엔이 남성을 따라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얼굴을 쭉 훑었다.
잘생겼다. 그것도 장난 아니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그녀가 머릿속으로 계산을 모두 마친 후 굳게 닫힌 입술을 뗐다.
“아저씨. 저 믿죠?”
일단 리엔이 생각하는 남성의 문제점은 이러했다.
과할 정도로 아내에게 집착한다는 것.
지금까지 남성이 했던 행동을 되짚어 보면 그는 분명 아내에게 시도 때도 없이 안기고, 별것 아닌 일에 질투했을 것이다.
처음이야 아내분도 좋았을 것이다. 솔직히 저만 사랑해 주는 남편은 누구나가 갖는 로망이지 않은가.
하지만 과도한 집착은 진저리를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사실 리엔이 남성에게 이것저것 조언해 주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남성의 아내분은 자신과 취향이 무서울 정도로 같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저씨가 해야 할 행동은 딱 하나뿐.
“아저씨는 맨날 아저씨가 먼저 아내분께 달라붙고 스킨십 하시죠?”
정답이었다.
남성이 놀란 듯 천천히 눈을 키웠다. 소름이 돋았다는 표정.
“그걸 어떻게…….”
리엔이 세상 진중한 얼굴을 하며 그에게 당부했다.
“아저씨. 지금 이 순간부터 아내분께 스킨십 금지예요.”
리엔의 말에 남성이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을 홉떴다.
그가 자신의 험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말을 더듬는다.
“어, 어떻게 그럴 수가.”
남성의 충격받은 얼굴을 보며 리엔이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 들어요. 일단 스킨십을 끊고 며칠 거리를 두면 아내분이 알아서 이상함을 느끼고 아저씨에게 다가올 거예요.”
남성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괴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움직이지 않는 제 고개를 억지로 끄덕였다.
나비의 날갯짓과도 같은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챈 리엔이 말을 이었다.
“그럼 그때 우세요.”
“뭐……?”
남성이 잘못 들었다는 듯 리엔의 말에 반문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단호했다.
“우시라고요. 엉엉.”
남성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동안 아무리 리엔에게 도움을 받아서 아내와의 관계가 좋아졌다고 한들, 이번에 제시한 방법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는 행위는 남자답지 못하지 않나.”
그러자 리엔이 짧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 그렇게 따지면 와이셔츠에, 프릴 달린 고양이 발 앞치마는 어떻게 입으셨어요? 아직도 그런 구시대적인 생각을 하고 계시니 아내분의 관심을 쟁취하지 못하시는 거예요.”
남성이 프릴 달린 고양이 발 앞치마를 입었다는 것은 순전히 리엔의 망상이었지만…….
어쨌든 그런 단호한 리엔의 말에 남성이 조금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말 그 방법이 먹힐까……?”
불안한 눈빛의 남성을 보며 리엔이 거만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른 분은 몰라도 아저씨 아내분은 좋아하실 거예요. 장담해요.”
왜냐하면, 제가 우는 남자에게 약하거든요. 그게 잘생긴 사람이면 더더욱.
“아저씨. 전적으로 저를 믿으셔야 해요.”
남성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리엔을 바라봤다.
그러다 지금까지 그녀의 말을 들어서 손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윽고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후기는 편지로 알려 주도록 하지.”
그의 결심에 리엔이 응원하는 마음으로 마주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을게요.”
* * *
주말 동안 말감이의 치료제를 만든 나는 전공 수업 때가 되어 그녀를 찾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항상 옆 친구와 왁자지껄 떠들던 말감이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말감이의 친구에게 다가가 물었다.
“얘. 너랑 항상 같이 앉던 말감이는 어디 있어?”
그녀가 경계 어린 표정을 했다.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을 보니, 아무래도 전에 급식실에서 그녀와 함께 있던 친구 중 한 명인 듯했다.
“네가 아밀라는 왜 찾아?”
“아밀라?”
맞다. 말감이의 이름이 아밀라라고 했지. 이제는 말감이라 부르는 것이 익숙해져서 이름이 어색해 보이기만 했다.
어? 근데 나는 분명 말감이는 어디 있냐고 물었는데 그렇게 바로 아밀라는 왜 찾느냐고 하면…….
말감이의 별명을 인정하는 거 아닌가?
역시 우리 말감이. 친구들한테도 이미 인정받았구나.
이 엄마는 말감이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서 기쁘단다.
말감이의 별명 창시자인 나는 다소 뿌듯함을 느끼며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아밀라에게 줄 게 있어서.”
그녀는 잠시 못마땅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탁 쉬며 말했다.
“뭔지는 몰라도 오늘 아밀라 상태 안 좋은 거 같으니까 주려면 다른 날 줘.”
나는 ‘시작됐구나’라고 생각하면서도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왜? 어디 아프대?”
“피부가 얼굴 근육이 잘 안 움직인다나 뭐라나. 그래서 양호실에 간 참이야. 뭐, 신성력 좀 받으면 금방 낫기야 하겠지만.”
“……음. 알려 줘서 고마워.”
“뭐? 너 지금 아밀라에게 가려는 건 아니지?”
나는 그녀의 물음을 뒤로하고 곧바로 양호실로 향했다.
아레나 아카데미에는 분명 실력 있는 의원과 사제, 마법사가 고루 있었다.
하지만 바르몬 크니리나로 인한 부작용은 오직 엄마가 개발한 치료제로만 고칠 수 있었다.
말감이의 상태가 더 안 좋아지기 전에 빨리 치료제를 건네주어야 할 것 같았다.
타이밍 좋게 약을 만들어 와서 다행이었다.
양호실에 들어가자 눈물범벅이 된 말감이가 보인다.
아직 외관상 피부에 큰 변화가 없는 것을 보니 심각한 단계는 아닌 듯했다.
가벼운 안면 마비라면 며칠간 치료제를 바르면 나을 수 있는 정도였다.
“말감아.”
내가 그녀를 부르자 고개를 떨군 채 흐느끼고 있던 말감이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뭐야? 지금 나를 조롱하러 온 거야?”
“그런 거 아니야.”
“뭐가 아니야!”
그녀가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를 빽 질렀다.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치료할 수도 없대. 신성력도 통하지 않고, 회복 마법도 통하지 않는다고! 네가 이 상황을 비웃으러 온 게 아니면 뭐야?”
음. 발음이 어눌하지 않은 걸 보니 아직 초기 단계인 것 같은데.
……확 며칠 있다가 줘 버릴까 보다.
하지만 늦게 주면 늦게 줄수록 마음이 불편해지는 건 오히려 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대체 누굴 닮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