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말감아.”
“…….”
그녀가 악에 받친 얼굴로 바닥을 노려봤다. 그녀의 뺨에 눈물 자국이 난 곳을 따라 다시 또 눈물이 흘러내린다.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네가 날 싫어하는 건 알아. 물론 나도 널 그리 좋아하지 않고. 하지만 나는 네가 이렇게 된 것을 비웃어 줄 만큼 못되지도 않았어.”
나는 흥분한 그녀의 손에 작은 물약 병을 쥐여 주었다. 액체형 치료제가 담긴 유리병이었다.
“치료제야. 내가 전에 분명 바르몬 크니리나를 바르면 피부가 녹아내린다고 했지? 안면 마비는 부작용의 초기 증세야.”
그녀가 아무 말 없이 내가 건넨 유리병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려 왔다.
“아직 심각한 건 아니니, 며칠 열심히 바르면 금방 나을 수 있어.”
“……내가 널 어떻게 믿어? 의원도, 신관도, 마법사도 고치지 못한 걸?”
다소 진정한 듯한 어조에,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말 안 믿어서 이렇게 된 거잖아.”
“그건……!”
“뭐, 됐어. 믿고 안 믿고는 내가 알 바 아니지. 치료제도 바르는 건 네 자유야.”
나는 분명 말감이에게 바르몬 크니리나를 바르지 말라는 경고를 했었고, 결국 내 말을 듣지 않은 그녀에게 치료제까지 만들어 바쳤다.
이쯤이면 할 만큼은 한 거겠지.
치료제를 바르지 않겠다는 그녀를 설득하는 건, 내가 그녀에게 베풀 수 있는 호의의 한계치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막상 말감이가 내가 만든 치료제를 바르지 않아서 부작용이 심각해진다면 보고만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나는 양호실을 나가기 전 뭔가 생각났다는 듯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말감아. 그거 바르고 다 나으면 밥 한 끼 정도는 사라.”
* * *
방과 후 동아리실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가벼웠다. 아침에 말감이한테 약을 전해 주고 난 후 마음의 짐을 던 느낌이랄까.
가벼운 걸음은 계속됐을 것이다. 동아리실을 가는 길에 마주친 쿤만 아니었다면.
그와 또 신경전을 벌이기 싫었던 나는 부러 아무렇지도 않게 발을 뗐다. 그런데 쿤의 움직임이 뭔가 이상했다.
예절이 몸에 밴 듯 항상 꼿꼿한 걸음으로 걷던 그가, 어쩐지 비척비척 걷는 느낌이었다.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그냥 그를 스쳐 지나치려 했다. 아프면 어련히 양호실에 가겠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순간, 쿤의 어깻죽지에 모기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에 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어깻죽지를 향해 손을 내지르고 말았다.
탁.
앗. 모기 혐오증 때문에 반사적으로……!
내가 본의 아니게 시비를 걸어 버렸다는 것에 당황할 새도 없이 쿤이 흐릿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당신은 진짜.”
털썩.
갑자기 픽 하고 그 자리에 쓰러지는 쿤.
미친. 내가 터치 한 번으로 사람을 죽였어?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몇 초간 얼을 타다가 급하게 쭈그려 앉아 그의 코밑에 손을 댔다.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그래. 손바닥으로 몸 한번 내리쳤다고 사람이 죽을 리가 없잖아.”
진정하고 그를 살펴보니, 그에게서 열사병의 증상이 보였다.
좋아. 원인도 알아냈고 죽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도망인가.
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들자 충격받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카르시온이 시야에 들어왔다.
순간 머릿속에 완전 범죄는 물 건너갔구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아니지. 리엔, 너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범죄야.
그리고 아무리 싫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지, 쓰러진 사람을 두고 그냥 가려고 하다니. 너 인성 상태가 왜 그래?
나는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내 뺨을 찰싹찰싹 쳤다. 그리고 카르시온에게 서둘러 변명 같은 진실을 말하려 입을 뗐다.
“카온 오해하지 말고 들어. 이건…….”
아니, 말의 시작부터가 누가 봐도 변명인데?
내가 뱉은 말에 당황하고 있던 사이, 어느새 카르시온이 내게 다가와 주뼛거렸다. 충격과 혼란스러움으로 얼룩진 얼굴이었다.
“리엔.”
“으응.”
“그렇게 쿤이 싫었으면 내게 먼저 말해 주지 그랬어. 네 손이 더러워졌잖아.”
충격받은 게 쓰러진 쿤이 아니라 그쪽이었어……?
나는 고개를 저으며 혐의를 부인했다.
“내가 그런 게 아니야. 잠시 살펴봤는데, 아무래도 열사병으로 쓰러진 것 같아. 카온, 혹시 회복 마법 좀 걸어 줄 수 있어?”
그러자 카르시온이 입을 쩍 하고 벌리며 급히 물어왔다.
“리엔. 어디 아파?”
나겠냐.
어디서부터 그의 오해를 바로잡아 줘야 할지 몰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누가 봐도 아픈 건 쓰러진 쿤이었지 내 쪽이 아닐 텐데.
“이럴 게 아니라 양호실부터 데려가야겠다.”
그때 의식을 잃은 줄 알았던 쿤이 헐떡거리며 곧 꺼져 갈 듯 위태로움을 자아내는 목소리로 말했다.
“……양호실은 안, 됩니다.”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쓰러진 주제에 참 주문도 까다로운 환자였다.
까다로운 환자님의 부탁대로 우리는 그를 양호실에 데려가지 않았다.
그럼 쓰러진 쿤을 어떻게 했냐고?
당연히 동아리실로 데려왔다.
입술을 비죽 내민 카르시온을 설득해 일단 회복 마법과 냉각 마법 등으로 응급조치를 취하긴 했는데…….
이제 얘를 어떡한담.
나는 내 전용 소파에 누운 쿤을 애물단지 보듯 쳐다봤다.
하지만 그런 나보다 더 좋지 않은 표정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카르시온이었다.
그는 내가 쿤을 동아리실에 데려온 것부터 소파에 쿤을 눕힌 것, 회복 마법을 걸어 주는 것까지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초리였다.
내 부탁에 결국 마지못해 들어주었지만.
“카온. 눈에 힘 좀 풀어 봐. 나도 딱히 내켜서 도와준 건 아니니까.”
그나저나 황자 환자라…….
라임 죽이는데……?
내가 머릿속으로 멍하니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정신을 잃은 줄 알았던 쿤이 다시금 입을 열어 왔다. 메마른 목소리였다.
“……물.”
“네네.”
건방지기 짝이 없었지만,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이니 이번만큼은 봐주기로 했다. 열사병으로 쓰러졌으니 목이 마를 만도 하지.
그렇게 내가 물을 뜨러 일어나려 할 때, 카르시온이 그런 나를 말렸다.
“리엔. 굳이 일어날 필요 없어. 내가 물 마법을 쓸 줄 알거든.”
“오 정말?”
역시 마법 천재. 못하는 게 없는 만능인이었다.
엄지를 들어 올리며 삐진 그를 달랠 겸 대단하다고 칭찬해 주려는 데,
촤아악-!
그 순간 카르시온이 누워 있는 쿤에게 물 폭탄을 선사해 줬다.
“푸학!”
마른하늘에 물세례를 받은 쿤이 손으로 얼굴의 물을 털어 내며 펄떡이는 생선처럼 소파에서 일어났다.
어찌나 많은 양의 물을 뿌렸는지 쿤의 옷은 단숨에 축축하게 젖어 버렸고, 소파는 물론 동아리실마저 온통 물바다로 변해 버렸다.
나는 황당한 마음에 입을 쫙 벌리고 카르시온을 바라봤다.
“카온. 너 뭐 하는 거야……?”
카르시온이 슬쩍 내 시선을 피한다.
“오랜만에 사용하는 마법이라 실수했어.”
실수는 무슨.
좌표가 조금만 어긋나도 큰일이 일어나는 텔레포트를 숨 쉬듯 사용하는 그가, 겨우 이런 마법의 조절을 실수했을 리 없었다.
아무리 질투가 난다고 해도 정도가 있지.
“카온. 난 네가 지금까지 까칠하게 구는 고양이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오늘 네가 보여 준 모습은 뭐랄까…….”
그래.
“조금 낯설다.”
나는 말을 뱉어 놓고 부러 카르시온을 바라보지 않았다. 보나 마나 무슨 얼굴을 할지 뻔했으니까.
시선을 쿤에게 돌리자 물세례에 정신을 차린 그가 의외로 카르시온을 옹호하고 나섰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아요. 물세례를 맞을 때는 깜짝 놀라긴 했습니다만, 시원해서 그런지 오히려 살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는 쿤의 젖은 교복과 물바다가 된 동아리실을 훑었다.
저건 다 어떻게 해.
내 생각을 읽은 듯 쿤이 설핏 웃으며 ‘실프’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습을 드러내는 작은 초록색의 정령.
중급 바람의 정령 실프였다.
“쿤, 너 전공이 정령학부야?”
“네. 바람 계열의 정령사입니다.”
그는 실프의 도움을 받아 옷을 말리며 여상스럽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멋쩍은 웃음을 지어내며 내 눈을 마주쳐온다.
“먼저 도와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솔직히 당신이라면 본 척도 하지 않고 가던 길을 갈 줄 알았어요.”
“…….”
나는 잠시 눈을 굴렸다.
도망치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라 양심이 찔려 왔던 탓이었다. 내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자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며칠 전에 손을 세게 친 것도 죄송합니다. 제 손을 잡아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저도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부분 다한증이지? 그거.”
턱짓으로 손을 가리키자 쿤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손을 제외하고는 다른 곳에서 땀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름이면 체온 조절이 잘되지 않아 종종 열사병으로 쓰러지곤 하죠.”
무한증. 다한증과 반대되는 병으로, 땀이 나지 않는 증상이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쿤은 무한증과 부분 다한증을 동시에 가진 환자라는 것이다.
“그럼 열사병은 한두 번 겪어 본 게 아닐 텐데 증상이 나타난다 싶었을 때 양호실에 갔었어야지.”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쓰러졌다는 것을 가족들이 알게 되면 걱정을 많이 하실 겁니다. 양호실에 가면 진료 기록이 남으니…….”
아레나 아카데미는 학생이 양호실에 가면 그 기록이 그대로 집에 전해진다.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알겠는데 너무 미련하잖아.
“그럼 혹시 네가 연약하다는 소문이 열사병으로 종종 쓰러진 것 때문에 퍼진 거야?”
“네? 제게 그런 소문이 있는 걸 어떻게…….”
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어왔다.
어떻게 아냐니 그거야,
“유명하잖아. 아바스칸투스 제국의 둘째 황자가 연약한 건.”
쿤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제 신분을 알고 계셨습니까?”
“아카데미 내에 모르는 사람도 있어?”
물론 나도 제인이 알려 주지 않았더라면 몰랐겠지만, 지금은 알고 있지 않나.
설령 몰랐더라도 그의 몸에 밴 아바스칸투스 제국식 예절 따위를 보면 알아채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우리 라그라스 제국과 은근 다른 점이 많았으니.
쿤이 허탈한 듯 헛웃음을 토해 냈다.
“완벽하게 녹아들었다고 생각했는데요. 일부러 존댓말도 연습했습니다.”
그래서 존댓말을 쓴 거였냐.
무섭게 생긴 인상과 달리 생각보다 허술한 사람인 것 같았다.
나는 어쩐지 철없는 막냇동생을 보는 듯한 눈빛이 되어 쿤을 바라봤다.
“반말이 당연한 동급생들 사이에서 존댓말을 쓰면 더 수상해 보일 거라 생각해 본 적은 없고……?”
“전혀.”
그의 단호한 표정에 나는 그만 말문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