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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33)화 (33/161)

33화

내가 당황한 사이 얼추 옷을 말린 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굉장히 늦었지만, 첫 만남 때 제 관심을 끌려 했다고 오해한 것도 죄송합니다.”

쿤이 진심이 담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후 당신이 제게 대하는 태도를 보니 그것은 순전히 제 오해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국에 있을 때 워낙 당한 게 많아서…….”

그러고 보니 아바스칸투스 제국은 우리 라그라스 제국과 반대로 여성이 저돌적으로 대시하는 경우가 파다했다.

쿤의 지위와 외모라면 수많은 영애가 달려들었겠지. 노이로제가 걸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꽃의 모가지 좀 땄다고 버럭 화낸 것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진심 어린 사과도 듣고 오해도 풀었더니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그의 다한증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이놈의 주체할 수 없는 오지랖.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나는 동아리실을 나가는 쿤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만, 그를 불러 세우고 말았다.

“쿤. 내일 방과 후 시간에 잠깐 우리 동아리에 찾아와.”

“왜…… 아니, 알겠습니다.”

그는 의문이 담긴 얼굴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쿤이 동아리실에 나가고 나는 내 머리를 잡아 뜯었다.

“아오, 나는 왜 그냥 넘기지를 못할까.”

아니다. 생각해 보면 그는 무려 제국의 황자이지 않은가. 그의 다한증을 치료해 주고 큰돈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 비즈니스.

비즈니스라고 생각하자.

그렇게 혼자 합리화를 하며 쿤이 말리고 간 소파에 털썩 앉는데, 문득 멀거니 서 있는 카르시온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가. 나름 상처받지 않게 돌려 말한 거였는데.

“카온?”

“……리엔 말이 맞아. 난 쓰레기야. 존재할 가치도 없지.”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아니, 게다가 조금 낯설다고 한 게 그렇게 우울해할 일이라고?

카르시온은 급기야 바닥에 쭈그려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눈가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붉어진다.

“하지만 리엔. 너와 관련된 것은 나도 내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해? 나도 이런 내가 낯설고 싫어.”

그가 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울음의 징조였다.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큰 뜻이 담긴 말은 아니었어, 카온. 내 말 하나하나에 일일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하지만 결국, 그의 손 틈새에서 자그마한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고 말았다.

나는 급히 그를 따라 쭈그려 앉아 그를 달랬다.

“미안. 그 말은 취소할게. 내가 어떻게 해야 네 기분이 나아질까?”

“아냐. 리엔은 잘못한 거 없어. 다 맞는 말인걸. 내 역겨운 질투심 때문에 네가 곤란한 상황이 되는 게 난 싫어.”

으아아아아.

언젠가 겪은 일 같으면서도 나는 그의 울음 섞인 목소리에 또 정신이 혼미해졌다.

한순간에 대역 죄인이 된 느낌. 나라를 팔아먹어도 이런 죄책감은 느껴지지 않았을 것 같았다.

나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그의 등을 서투르게 두들겼다.

“곤란하지 않았어. 오히려 난 네가 질투할 때마다 귀엽다고 생각했는걸.”

“…….”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그의 흐느낌 소리가 들려온다.

아 어떡해.

당황이 계속되니 머리가 새하얗게 되고 어딘가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나는 오로지 카르시온의 기분을 풀어 줘야 한다는 생각에 그만, 충동적으로 그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말았다.

쪽.

그리고 내 입술 위에 따듯한 체온이 느껴지자 그제야 깨달았다.

금기를 저지르고 말았다는 것을.

나는 카르시온의 반응이고 뭐고 살필 겨를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도망치듯 동아리실을 빠져나갔다.

미쳤어. 미쳤어……!

* * *

피오르는 미간에 깊은 골을 만들며 제 룸메이트를 관찰했다.

어제 다른 학생들과 적당히 친목을 하고 동아리실에 도착했을 때,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동아리실은 반파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반파된 동아리실 가운데에서 상기된 얼굴로 멍을 때리고 있던 카르시온.

그때부터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부서진 동아리실은 다행히 카르시온이 마법으로 복구시켰다. 그러나 카르시온은 절대 제게 동아리실이 왜 반파되었는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러더니 틈날 때마다 어울리지도 않게 계속 실실 웃기나 하고.

“피오르. 오늘은 나 먼저 등교한다.”

게다가 항상 늦장을 부리다 텔레포트로 지각 1분 전에 등교하곤 하던 그가, 저보다도 먼저 준비하고 기숙사를 나서겠단다.

“야. 근데 너 세수는 안 하냐?”

마법으로 청결을 유지할 수 있으면서도 항상 꼬박 물로 씻곤 했던 놈이.

피오르의 물음에 카르시온이 지금 무슨 끔찍한 말을 하는 거냐는 듯 대꾸했다.

“세수? 그런 걸 왜 해? 아깝게. 평생 안 할 거야.”

진심이 담긴 얼굴이었다.

피오르가 질색하며 제 옆에 있던 수건을 집어 던졌다.

“더럽게 뭔 소리야? 기름기 좔좔 흐르는 얼굴로 나타나면 리엔이 퍽이나 좋아하겠다.”

움찔.

바늘로 찔러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것 같던 카르시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잠시 후 하얗게 질린 얼굴이 서서히 벌겋게 변한다.

“아, 진짜.”

카르시온이 탄식 어린 말을 내뱉고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피오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자식이 진짜 미쳤나. 아 원래 미쳤지.’

울먹이던 카르시온이 대뜸 피오르를 불렀다.

“피오르.”

“왜.”

“내 장점이 얼굴이랑 뭐가 있냐.”

“얼굴밖에 없지.”

“……역시 그렇지?”

평소라면 피오르의 진실의 주둥이를 막아 버렸을 카르시온이, 순순히 그의 말을 받아들이며 세상 슬픈 얼굴을 했다.

“나 씻는다…….”

결국, 씻으러 들어가는 카르시온을 보며 피오르는 생각했다.

자신이 이 자리에서 죽었어도 절대 저런 표정은 짓지 않았을 거라고.

* * *

수백 번을 고민했다.

오늘 동아리를 빠져야 할지 말지.

“하…….”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동아리고 뭐고 기숙사에 처박혀 최소 몇 주는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무단으로 동아리를 빠진다고 하더라도 카르시온이 기숙사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이미 수많은 전과가 있지 않은가.

결국,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동아리실에 오긴 했는데…….

문제는 차마 카르시온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거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오늘따라 늦는 카르시온과 피오르를 기다렸더니, 마음속 어디선가 근거 없는 희망이 샘솟기 시작했다.

시험 전날 갑자기 모든 문제를 다 맞힐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이 솟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래. 혹시 모르지.

이마에 닿은 게 내 입술이 아니라 다른 부위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또 내가 뽀뽀를 했다는 사실이 너무 충격적인 나머지 기억을 잃었을 수도……!

솔직히 두 번째 생각은 내가 생각하면서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 희망을 붙들 수밖에 없었다.

그때, 동아리실 문이 열리고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그 카르시온이 동아리실에 들어왔다.

“리엔!”

“……응.”

나는 어색함이 듬뿍 묻어나오는 표정으로 카르시온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생각했다.

‘뭣 됐다.’라고.

카르시온의 표정은 절대 어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사람의 행복도를 0부터 10점 만점까지라고 쳤을 때, 족히 100점을 채우고도 남을 표정.

그렇다. 행복의 정도가 도를 넘었다는 뜻이다.

카르시온의 행복도를 바로 잡아 줄 필요가 있었다.

사귈 것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행동한 것은 분명 내 잘못이었다. 선을 지켰어야 했는데.

지금까지 내가 그에게 했던 다른 행동들은 친구 사이에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으나, 입맞춤은 달랐다.

희망 고문과 다를 게 없잖은가.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슬쩍 운을 뗐다.

“카온.”

“응, 리엔!”

“어제 일은 그냥…… 별 의미 없었던 거 알지?”

카르시온은 순진한 눈망울로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이내 내 말이 무조건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알고 있지.”

“내가 실수로 그랬다는 것도……?”

“그럼 그럼.”

카르시온의 명쾌한 대답에 가슴속의 응어리가 어느 정도 풀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은 아니구나 생각하며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카온. 어제 그 일…… 잊어 줄 수 있을까?”

순식간의 일이었다. 카르시온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 것은.

그의 표정 변화에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카르시온이 낮은 저음으로 느릿하게 입을 뗐다. 천천히 한 자, 한 자 아주 선명하게.

“리엔.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

“어……?”

내가 잘못 들었다는 듯 멍청한 얼굴로 반문하자, 카르시온이 금방 다시 얼굴에 미소를 띠며 헤실거렸다.

“내가 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오늘 아침에 세수한 것도 아까워 죽겠는데.”

아.

진짜 일 났다.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동자만 이리저리 움직였다.

대화가 단절되어 분위기가 어색해져 갈 때, 마침 누군가가 동아리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쿤이었다.

“문이 열려 있어서 노크 없이 들어왔습니다. 다음 날 찾아오라고 하셔서 왔는데…….”

쿤이 어쩐지 어색한 분위기인 나와 카르시온을 번갈아 봤다.

“혹시 지금 바쁜 거면 내일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아냐. 딱 좋을 때 왔어.”

나는 애써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며 서둘러 가방을 뒤졌다.

쿤을 만난 후 처음으로 그의 존재가 쓸모 있다고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쿤의 다한증을 치료해 줄 약을 꺼내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자, 이거.”

쿤이 내가 건넨 물약 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게 뭔가요?”

“다한증 치료제.”

“……네?”

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가 놀라는 반응은 이미 예상하던 일이라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약에 관해 설명했다.

“너는 문제 부위가 손바닥이니, 앞으로 이 치료제를 네 손바닥에 오일 바르듯이 3일에 한 번 발라. 그러다가 차츰 땀이 나지 않기 시작하면 2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으로 바르는 기간을 늘려 가면…….”

“잠시, 잠시만요!”

나는 왜 그러느냐는 듯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왜?”

“치료가 가능하다고요? 제 다한증을?”

그의 물음에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전에 손 말고는 다른 부위에 땀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지? 하지만 바꿔 말하면 아예 나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니잖아. 막혀 있는 곳을 뚫는 건 힘들어도 그 정도면 충분히 정상으로 만들 수 있어.”

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다소 경직된 어조로 물어왔다.

“……다한증뿐 아니라 땀이 잘 나지 않는 것도 치료할 수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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