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린다.
“내가 생각하기에, 너는 다른 부위에 날 땀이 손에 몰린 것 같아. 그러니 손에 땀이 나지 않으면 자동으로 다른 곳에서 땀이 배출되겠지. 어느 형태로든 땀은 나와야 하니까.”
나는 얼떨떨한 표정의 쿤을 보며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어내었다.
“다한증도 치료하고 무한증도 고치고. 일석이조 아니겠어?”
“마, 말도 안 됩니다! 제 다한증을 치료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원……!”
“그래서.”
나는 쿤의 손에 들린 물약 병을 앗아 가 그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익히 마녀 같은 미소를 지으며.
“필요 없어?”
“…….”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야. 아, 근데 공짜는 아니다.”
저번에 다오 트란토 군락을 발견했다 한들, 사이도 좋지 않았던 상대에게 그냥 베풀고 싶지는 않았다.
같은 맥락으로 말감이에게도 식사 대접을 요구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다한증 치료제를 만드는 데 비단 다오 트란토만 드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내 수고비도 있고.
쿤이 제 아랫입술을 한 번 악물었다가 뭔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정말 그 물약으로 다한증을 고칠 수 있다면 뭐든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한도 내에서지만요.”
“내게 뭘 줄 수 있는데?”
“돈이 필요합니까? 아니면 작위가 필요합니까. 제 권한으로 높은 작위는 무리지만, 준남작 정도는 가능합니다.”
작위라는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작위는 무슨. 내 선한 호의를 흐리지 말라고. 게다가 네가 말한 작위는 라그라스도 아니고 아바스칸투스의 작위잖아.”
선한 호의라고 하기에는 공짜가 아니라고 못 박아 놓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치료제를 빌미로 정말 한몫 챙겨 보려는 건 아니었다.
해 봤자 금화 몇 개 정도.
말하는 것을 들어 보니 지금껏 치료를 위해 천문학적인 금액을 쏟아부은 듯한데, 그에 비하면 금화 몇 개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쿤의 간절한 표정을 보니 그것 또한 받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다.
그의 절박함을 인질 삼아 뭔가를 받아 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작위는 됐고, 다음에 밥이나…….”
나는 밥이나 한번 사라고 말을 하려다가, 무심히 돌린 시선에 입을 벌린 채 경악 어린 표정을 지은 카르시온을 발견하고 급하게 말을 바꿨다.
“……돈으로 줄 수 있을까?”
작위는 됐고, 돈으로 달라는 말에 쿤이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힐끔 카르시온을 바라보니 그가 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내가 왜 카르시온의 반응에 일일이 신경 쓰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다시 쿤에게 약병을 쥐여 주었다.
“내가 쓸 것만 소량으로 제작해서 지금 가지고 있는 건 그게 전부야. 그러니까 떨어질 때쯤에 다시 나를 찾아와. 미리 만들어 놓을게.”
그러자 쿤이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걱정이 서린 것 같기도 했다.
“리엔 당신도 다한증인가요?”
“응? 아니?”
“그럼 왜 다한증 치료제를……?”
의문이 담긴 쿤의 물음에, 순간 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저걸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아무리 여름에 땀이 차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는 하나, 친하지도 않은 상대에게 당당히 말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 부위가 남에게 습도 상태를 알리고 싶지 않은 곳이라면 더더욱.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빽 외쳤다.
“대체 그런 걸 왜 물어보는 거야? 눈치가 없는 거야, 아니면 시비 거는 거야?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려!”
갑작스러운 내 외침에 쿤이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다.
“죄, 죄송합…….”
팟-!
말이 다 끝나기도 전, 쿤은 마법처럼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니, 정말 마법이었던 것 같다. 얼마 전까지 쿤이 서 있던 자리에 희미한 마법진이 남아 있는 걸 봐서는.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지라는 외침에 카르시온이 옳다구나 하고 이동시켜 버린 모양이다.
없어진 쿤의 자리를 노려보고 있노라니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겨드랑이는 뽀송한 편인데. 땀 억제제를 바르는 건 오금뿐이라고.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온 카르시온이 말을 걸어 왔다.
“리엔.”
하지만 나는 아직도 창피함과 억울함이 가시지 않아, 그의 말에 대답할 생각도 못 하고 홀로 씩씩거렸다.
“리엔.”
“…….”
“그래서 우리 데이트는 언제 할까?”
“뭐?”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에, 홱 고개를 쳐들어 카르시온을 바라봤다. 긴장으로 몸이 굳어진다.
설마 어제 그 이마 뽀뽀를 사귀자는 뜻으로 받아들인 건 아니겠지?
그러자 카르시온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는 듯 입술을 말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전에 리엔 네가 근사한 식당에서 저녁 한 번 사 주기로 했잖아.”
아. 그거.
탁, 하고 몸에 잔뜩 줬던 힘이 긴장과 함께 풀렸다. 그가 이상한 오해를 한 게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그게 무슨 데이트야. 평범하게 밥 먹는 거지.”
큰 고비를 넘겼더니 왠지 모르게 저녁 한 번 먹는 건 별거 아니게 느껴졌다. 이마 뽀뽀 건에 대해서도 얼추 넘긴 것 같고.
……물론 없었던 일로 하는 건 실패했지만.
어차피 같은 동아리인 이상 계속 안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사그라들 기억이었다.
사그라들겠지……?
나는 불안감을 떨쳐 내려 짧게 도리질 치며 카르시온에게 물었다.
“카온. 그러면 말 나온 김에 오늘 먹으러 갈래?”
가볍게 던진 말에, 카르시온이 눈이 동그랗게 홉 뜨였다.
“나, 나는 아직 준비가 덜 됐는데.”
“준비할 게 뭐가 있어. 몸만 가면 되지.”
몸만 가면 된다는 말에, 그가 울상을 지으며 제 손을 꼼지락거렸다.
“아직 리엔 너와 데이트할 마음의 준비가…….”
글쎄, 데이트가 아니라니까.
하지만 내가 다시 말을 정정해도 계속 데이트라고 우길 것 같은 느낌에,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설득을 포기했다.
대신, 나는 밥 한번 먹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입을 달싹였다.
“이번이 마지막도 아닐 텐데 뭐.”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됐다.
카르시온의 눈에 희미한 이채가 스쳤을 때,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빌어먹을 주둥이가 큰 실수를 했다고.
* * *
“저기는 어때, 리엔?”
리엔은 카르시온이 가리킨 곳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가 가리킨 곳은 아카데미 주변 상가에서 가장 비싼 가격을 자랑하는 레스토랑이었다.
‘잘 됐다.’
자신도 저곳을 내심 정해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착한 카르시온이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해서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카르시온의 해맑은 표정을 보던 리엔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아, 근데 혹시 나 몰래 네가 먼저 계산해 버리면 다시는 너랑 밥 안 먹을 거다.”
흠칫.
리엔의 말에 카르시온의 몸이 한 번 크게 떨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르시온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리엔. 나 갑자기 다른 곳 가고 싶어졌어.”
리엔은 가까스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 넘겼다. 누가 봐도 거짓말임이 티 나는 얼굴이었다.
이럴 줄 알았지.
비싸고 좋은 곳에서 먹고 자신이 계산하려고 했던 거다.
‘이 착한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리엔은 어떻게 해야 카르시온을 저 레스토랑에 데려갈 수 있을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불현듯 장난기가 솟아 여상스러운 표정을 하며 물었다.
“그럼 저곳 말고 어디?”
“응? 으, 으음…….”
아니나 다를까, 카르시온은 리엔의 질문에 한껏 당황하며 침음을 흘렸다.
저 레스토랑에 가자니 리엔이 부담할 돈이 아른거렸고, 다른 식당을 가자니 첫 데이트인데 그녀를 질 떨어지는 식당에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자신이 너무 손해.
카르시온이 당황으로 굳어 버린 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적당한 타협점을 찾은 듯 그의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카페에서 간단히 음료만 마시는 건 어때, 리엔? 나는 사실 점심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배불러서.”
너무나도 귀여운 변명이었다.
리엔은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카르시온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리, 리엔?”
카르시온의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하자 리엔은 마구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는 다시 그의 머리를 정돈해 주기 시작했다.
“나는 배고픈데. 그럼 나랑 같이 저녁 안 먹어 줄 거야?”
“어?”
리엔의 말에 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하느라 차마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카르시온이었다.
카르시온이 당황하는 사이 리엔은 그의 손목을 잡아 레스토랑 쪽으로 끌었다.
그는 리엔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도 그녀의 눈치를 봤다.
“리엔…….”
퍽 시무룩해진 목소리였다. 그 반응에 리엔이 별거 아니라는 듯 웃어 보였다.
“뭘 걱정하는 거야? 나는 네 생각만큼 그렇게 가난하지 않아.”
“하지만.”
“그리고 이번에 돈 좀 쓴다고 해도, 쿤한테 사례금을 받기로 했으니 괜찮아. 명색의 제국의 황자인데 쩨쩨하게 주진 않을 거 아니야. 정 부담스러우면 대충 쿤한테 뜯어낸 돈으로 먹는다 생각해.”
“아. 그거라면…….”
그제야 카르시온은 구겨진 표정을 살짝 폈다.
리엔의 돈은 아깝지만, 그 자식의 돈이라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결국, 처음 카르시온이 가리킨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게 된 둘은 제법 만족스러운 식사를 이어 나갔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갈 때쯤.
리엔과의 식사가 끝나가는 게 아쉬웠던 카르시온이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어 보려 여러 대화 주제를 꺼냈다.
“전부터 생각한 건데, 리엔은 돈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것 같아.”
사실 그는 리엔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은 ‘제인’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리엔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거나 지금은 그녀의 이모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거나 하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리엔의 이모라는 사람의 주변 평판은 어떤지, 어느 가문인지도 이미 뒷조사를 통해 알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카르시온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그녀의 입에서 직접 듣고 싶었다.
카르시온의 물음에 리엔이 씹고 있던 음식물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응. 용돈은 이모가 부족함 없이 주고 계시거든. 오히려 너무 많이 주셔서 탈일 정도로.”
“이모?”
카르시온이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자 리엔이 눈을 깜빡였다.
“아, 내가 말 안 했나? 부모님이 병으로 일찍 돌아가셔서 지금은 이모네 집에 신세를 지고 있거든.”
“아…….”
카르시온의 얼굴에 아릿함이 번졌다.
그 얼굴에는 미안함도 섞여 있었다. 괜히 이야기를 꺼내서 미안하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