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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35)화 (35/161)

35화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돼. 꽤 시간이 지나서 이야기 꺼내는 거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 그리고 이모뿐 아니라 이모부도 정말 좋은 분이셔서.”

“좋은 분이시라니 다행이다.”

카르시온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리엔의 이모나 이모부는 상인이시겠네?”

부유한 평민들은 대부분 상업 쪽으로 성공을 거둔 경우였기에, 카르시온의 물음이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리엔이 도르륵 눈을 굴렸다.

‘이거 말해도 괜찮은 건가?’

하긴, 엄밀히 따지면 자신의 신분은 그저 평민에 불과했다.

설령 이것을 말하는 게 학칙에 어긋난다고 해도 카르시온은 이 사실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 사람이 아니었으니.

“아니, 이모부가 백작님이시거든. 두 분 다 상업 쪽에는 영 소질이 없으셔서 투자만 조금 하고 계시지. 따로 다른 일을 하시지 않아도 영지가 부유한 편이라.”

“아하.”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이모부는 아르메리아 백작 가문의 데릴사위였다.

리엔의 어머니는 약초 연구 때문에 작위를 잇는 것을 거부했고, 이모는 여리고 심약한 성정 덕분에 가주가 되기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리엔의 신분이 애매해지는데…….

제국법상 물려받을 작위 또는 성이 있어야 귀족 취급을 받을 수 있었다.

리엔의 어머니는 백작 영애였지만, 아버지는 성이 없었다.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는 라그라스 제국 특성상 리엔은 아르메리아라는 성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리엔은 평민이었다.

가끔 준 귀족 취급을 받기도 하는 평민이랄까.

조금 아이러니한 점은 리엔의 아버지는 아바스칸투스 제국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라그라스 제국과 달리 아바스칸투스 제국은 평민이라도 대부분 성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귀족인 것은 아니었다. 그 성이 아바스칸투스 제국의 것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아바스칸투스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갖는 성을 제 아버지는 갖지 못했다는 것에 의문이 들었다.

‘아빠는 성조차 갖지 못했을 만큼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걸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제 아버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모는 아버지를 만나 본 적이 없었기에 뭔가를 알고 있을 리 만무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자신은 엄마를 따라서 가끔 백작가에 놀러 갔었다.

그렇다면 아버지도 충분히 이모를 만날 수 있었던 거 아닌가?

이모는 절대 평민이라고 해서 무시할 만한 사람이 아닌데.

리엔의 어두워진 표정으로 인해, 어쩐지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흐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둘의 앞에 척, 하고 섰다.

“카르시온 님?”

어깨와 등이 훤히 파인 드레스 하며 높은 구두 하며, 당장이라도 파티에 가야 할 것 같은 화려한 의상을 갖춘 여자였다.

“세상에, 정말 카르시온 님이잖아!”

카르시온을 온전히 눈에 담자 그녀의 얼굴에 희열이 가득 들어섰다.

그와 반대로 카르시온의 얼굴은 그녀가 나타난 순간 확 굳어 버렸다.

카르시온의 눈매가 단숨에 확 치켜 올라갔다가 자신의 앞에 리엔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금 쓱 내렸다.

그들이 하는 양을 보고 있던 리엔도 왠지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카온, 아는 사람이야?”

“아니.”

아는 사람이냐는 리엔의 물음에 카르시온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카르시온은 진심으로 저 여자를 몰랐다.

“소문은 들었어요. 처음 소문을 들었을 때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여자의 시선이 리엔에게 닿았다. 그녀는 리엔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천천히 두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꺄하, 꺄하하하하!”

잠시 정신을 놓고 웃어젖히던 그녀가, 순간 얼굴에 웃음기를 싹 지워내며 정색했다.

“……재미있네요, 정말.”

리엔은 그런 여자를 보며 속으로 작게 감탄사를 토해 냈다.

‘와, 미친 사람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그러고는 여자가 또 무슨 말과 행동을 할까 궁금해, 신기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카르시온이 리엔의 이름을 불렀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다정한 음성이었다.

“리엔.”

“응.”

“잠시 손 좀 잡아도 될까?”

뜬금없는 말에 리엔이 미간을 구겼다. 설마 저 여자를 쫓으려고 연인인 척하려는 건 아니겠지.

카르시온은 리엔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 눈을 반달로 휘었다.

“왜냐하면…….”

카르시온이 리엔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탁.

그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순식간에 시야가 어그러지며 배경이 바뀌었다.

“텔레포트로 도망치는 게 나을 것 같거든.”

리엔은 카르시온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이 서 있는 이곳은 방금 식사 중이던 레스토랑과 조금 떨어진 장소였다.

“어때, 깔끔하게 해결했지?”

칭찬을 바라듯 눈을 반짝이는 카르시온의 모습에 리엔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그냥 놓고 와도 되는 거야?”

“이상한 사람을 계속 상대해 주는 것보다는 낫잖아.”

카르시온으로서는 텔레포트로 도망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 자리에서 이름도 얼굴도 모를 여자를 상대하며 데이트를 망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리엔의 이상형이 착한 남자인 만큼 그 자리에서 제 성격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질투를 리엔이 귀엽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을 하긴 했으나, 그게 남자가 아닌 여자에게 하는 질투까지 포함일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하필 리엔과의 첫 데이트에 별 이상한 것이 꼬여 짜증을 일게 하는지.

속으로 신랄한 욕지거리를 내뱉던 카르시온의 귀에 리엔의 아차 싶은 목소리가 들렸다.

“카온. 그 여자는 둘째 치고, 우리 계산은?”

“리엔은 계속 그걸 걱정했던 거야? 세상에…….”

카르시온이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생명체를 목도한 것처럼 작은 탄식과 함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킨 그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계산은 괜찮아. 우리 가문 소유의 레스토랑이니까.”

“뭐?”

리엔은 잠시 얼을 탔다.

‘어쩐지 별말 하지 않았는데도 제일 좋은 자리로 안내해 주더라.’

걱정하던 계산 문제가 해결됐음에도 리엔의 마음속에 찝찝함이 남았다.

아무리 카르시온이 돈이 많다 해도 밥을 사 주는 것은 기분상의 문제였다.

제가 사 준다고 했는데 결국은…….

리엔이 카르시온의 소매를 작게 당겼다.

“카온. 이대로 기숙사에 들어가면 아쉬우니까 디저트 먹으러 갈래? 이번에는 정말 내가 살게.”

카르시온의 얼굴에 금방 해사한 웃음이 번졌다. 그는 리엔이 말을 취소하기라도 할세라 급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마침 카르시온과 저녁을 먹으러 나오기 전, 제인이 분위기 좋은 카페를 알려 준 참이었다.

혹시나 해서 위치를 자세히 듣고 나온 게 다행이랄까.

‘……거기서도 이상한 사람을 만나진 않겠지.’

리엔은 설마하며 픽 웃고는 행복도가 가득한 카르시온을 툭 쳤다.

“가자, 카온. 내가 분위기 좋은 곳을 알고 있어.”

* * *

각각 케이크 한 조각과 음료 하나씩을 주문한 리엔은 문득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불안한 느낌에 카르시온에게 물었다.

“카온. 근데 그 미친 사람 진짜 모르는 사람 맞아?”

“응. 정말 모르는 사람이었어.”

“그 사람은 너를 알고 있는 눈치던데.”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니까.”

리엔은 저도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카르시온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아카데미 내에서도 인성 파탄자라느니 뭐라느니 이상한 소문이 많은 그였다. 게다가 공작가의 후계자라는 지위와 잘생긴 외모.

그를 아는 사람이 많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리엔이 시무룩한 그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 주려는 데. 갑자기 카르시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리엔.”

“응?”

“나 잠시만 화장실 좀 다녀올게.”

“난 또 뭐라고. 아직 주문한 거 안 나왔으니까 천천히 다녀와.”

카르시온은 리엔의 말을 끝까지 들을 새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리엔은 순식간에 없어진 카르시온의 빈자리를 보며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급했나 보네.”

급한 불을 끄러 갔을 거라는 리엔의 생각과 달리, 카르시온이 자리를 비운 이유는 아까 전의 미친 사람 때문이었다.

카르시온은 디저트 가게 유리창 너머로 여자가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을 찾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카르시온은 리엔이 보기 전에 처리하자 싶은 마음에 급히 달려 나와 그녀의 앞에 섰다.

“너 뭔데 내 주위에서 어슬렁거려.”

그가 서늘한 얼굴로 그녀에게 일갈했다. 그러자 여자가 화를 내는 모습조차 황홀하다는 듯 두 손을 그러모았다.

“아아, 카르시온 님. 옆에 있던 사람을 버리고 저를 찾아 주셨군요.”

저 표정과 말투. 지금껏 수없이 만나 왔던 스토커들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어쩜 하나같이 같잖은 망상에 빠져 있는지.

쥐도 새도 모르게 죽고 싶지 않으면 꺼지라고 입을 달싹이는데, 그녀가 선수를 쳐 입을 열었다.

“저를 모르시는 것도 이해해요. 카르시온 님과 저는 다른 학년이거든요. 하지만 이번 연도에 휴학했답니다. 내년이면 저를 만나실 수 있어요. 잘만 하면 같은 반도 될 수 있겠죠!”

카르시온이 미간을 와락 구겼다.

겨우 자신과 같은 학년에 재학하려고 휴학을 했다니. 보통 미친년이 아니었다.

“카르시온 님. 아까 카르시온 님의 옆에 있던 사람의 속내를 알고 계시나요?”

“속내?”

리엔이 거론되자 카르시온은 저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그러자 카르시온이 흥미를 보인다고 생각한 여자가 입꼬리를 올리며 소리쳤다.

“그래요! 속내! 카르시온 님은 그년에게 속고 계신 거예요! 그저 카르시온 당신의 마음을 이용해 당신의 돈과 지위를 탐하려는 더러운 속내! 당신을 이용하려는 거라고요!”

“이용, 당한…… 거라고……?”

카르시온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변했다. 그 변화에 여자가 희열을 느끼며 외쳤다.

“그래요! 당신은 그년에게 놀아난 것뿐이야!”

“푸흐, 푸하하하!!”

카르시온은 의미 모를 웃음을 뱉어 내더니, 이내 흥분 어린 표정으로 제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달뜬 얼굴이었다.

“리엔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니, 너무 좋은 거 아니야? 더, 더더, 이용해 줬으면…….”

예상치 못한 반응에 여자가 당황하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카르시온이 방긋 미소 지었다.

“네가 뭔데 그 더러운 입술로 리엔을 입에 담아?”

* * *

“리엔, 나 다녀왔어.”

딱 케이크와 음료가 나왔을 때 자리에 돌아온 카르시온이었다.

리엔은 산뜻한 얼굴의 카르시온을 보며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급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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