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카르시온과의 데이트 이후 몇 주의 시간이 흘렀다.
특별한 사건 없이 평온한 하루하루. 자신이 원하던 평범한 나날들이었다.
오늘도 별일 없이 하루를 보낸 리엔은 제 앞으로 온 익숙한 편지지를 열어 보고는 살풋 미소를 지었다. 아저씨의 승전보였다.
앞치마 작전에 이어 울음 전략도 성공적이었나 보다.
리엔은 뿌듯해진 기분으로 편지를 접었다. 흡사 제자가 좋은 성적을 거둔 후, 성적표를 자랑하는 걸 보는 느낌이었다.
“정말 사랑꾼이시라니까.”
한편,
리시안셔스 공작은 요즘 하늘을 날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들 녀석 때문에 소원해졌던 아내와의 관계가 회복세를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회복세라고 칭하기에는 오히려 전보다 좋아진 느낌이었다. 이게 다 리엔이라는 아이의 훌륭한 조언 덕분.
어찌나 똑똑하고 야무진지, 제 딸로 들이고 싶을 정도였다.
딸보다는 며느리로 삼는 게 훨씬 일 처리가 쉽겠지만, 며느리로 들이면 카르시온의 성격을 감내해야 할 아이가 불쌍해지니까.
카르시온 성격에 부모가 정해 주는 사람과 결혼할 리도 없었고.
무엇보다 아내가 전부터 딸을 갖고 싶어 하기도 했으니.
그 아이의 부모가 살아 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귀족가에서 영민한 평민 아이를 입양하는 경우는 더러 있었으니까.
카르시온이 태어난 이후, 저에게 올 사랑이 자신과 카르시온.
이렇게 둘로 나뉘는 것을 보고 둘째를 갖는 것은 학을 떼며 반대했지만, 리엔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사실 공작도 처음부터 아들인 카르시온을 탐탁지 않게 여긴 것은 아니었다.
제 아내 실비아의 솜사탕 같은 분홍색 곱슬 머리카락을 그대로 물려받은 카르시온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카르시온이 자신이 아들이라는 사실보다 이 조그마한 몸 안에 실비아의 피가 반이나 섞여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실은 두 번째였다.
자신에게 있어 첫 번째는 언제나 실비아였기에.
어쨌든 그렇게 공작이 알뜰살뜰 보살폈던 카르시온과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카르시온이 5살이 막 됐을 즈음.
카르시온이 공작 부부의 마법 재능을 이어받아 세간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천재 소리를 들을 때였다.
공작 부인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공작의 가슴을 주먹으로 탕탕 내려쳤다.
“어떡해요! 우리 카온이. 카온이……!”
“실비아, 진정해.”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카온이 당신 성격을 똑 닮은 것 같다고요! 이거 어떡할 거야. 어떡해애애!”
실비아는 서러움이 폭발했는지, 급기야 울먹이기 시작했다. 공작은 당황하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하지만 정말로 울고 싶은 건 공작 자신이었다.
자신이 무얼 했다고 실비아의 원망 어린 눈초리를 받아야 하는지.
잘못한 것은 실비아의 액세서리를 훔친 사용인과 그 사용인에게 마법을 날린 카르시온이 아니던가.
“실비아. 울지 마. 카르시온은 내가 잘 타일러 볼게. 아직 어려서 감정 절제를 잘 하지 못한 것이겠지.”
“히끅. 흑, 하, 하지만 여보도 카르시온 나이만 할 때 사람에게 마법을 마구 쏘고 그랬다면서요.”
정곡을 찔러 들어오는 실비아의 말에 공작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맞을 만한 놈들만 골라 맞췄어.”
“그게 자랑이에요?!”
실비아가 빽 소리치며 잔뜩 힘을 줘 그를 밀쳐냈다.
“몰라요! 이래서 내가 당신이랑 연애하는 걸 망설였던 건데! 당장 우리 아들 성격 돌려내요!”
쾅.
매정하게 닫혀 버린 문을 보며 공작이 울상을 지었다.
실비아를 만나고 난 후 환골탈태하다시피 제 성격을 죽여 왔는데, 이렇게 과거를 들먹이며 화를 내면 저도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아들과 긴밀한 대화가 필요한 것 같았다.
* * *
“아들.”
카르시온은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공작과 눈을 마주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명백히 드러나는 행동이었다.
“아들 아빠 봐야지.”
공작의 이어진 두 번째 부름에도 카르시온은 들은 척 만 척이었다.
사실 공작과 카르시온의 대화는 지금 막 시작된 것이 아니라 30분이 넘어갔다.
공작이 자신의 억울함과 서러움을 담아 카르시온을 혼냈기 때문이다.
처음 카르시온은 잘못한 게 없다며 마법을 마구 쏘아대며 반항했다. 그러나 공작은 묵묵히 아들을 저지하며 그의 인성 교육을 이어 나갔다.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고작 5살짜리의 마법인데, 현 마탑주와 비등한 실력이라고 소문난 공작이 그것도 저지 못할 리 없었다.
이만하면 어느 정도 혼냈다 생각한 공작이 깊은 한숨을 쉬며 한층 다정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카르시온. 감정을 절제할 수 있어야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존경받는 공작이 될 수 있단다.”
그러자 씩씩거리며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카르시온이 동그랗게 눈을 뜨며 공작을 바라봤다.
조금 안쓰러움이 담긴 표정 같기도 했다.
“아빠는 분노 조절 못했구나…….”
두 부자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아빠는 분노 조절 장애가 아니라 분노 조절 잘해였어.”
‘네 엄마 앞에서는.’
공작은 뒷말을 꾹 눌러 삼켰다.
그런 공작의 표정을 살피던 카르시온은 얼마 가지 않아 한쪽 입술을 비뚜름하게 올렸다.
“흐응.”
공작은 아들이 짓는 오묘한 표정에, 어쩐지 진 기분을 느꼈다.
* * *
어느덧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각.
공작은 아침에 있었던 일을 만회할 겸 오늘 아내와 분위기를 잡아 보려고 결심한 참이었다.
몸을 깨끗이 씻고, 평소에는 잘 쓰지도 않던 향수까지 뿌린 공작은 가운만 가볍게 걸친 채 침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걸.
침실에는 실비아 혼자가 아니었다. 이상한 갈색 생명체와 함께였다. 게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실비아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흐윽.”
놀란 공작은 실비아에게 서둘러 달려갔다.
“실비아!”
하지만 공작은 달려가다 말고 자리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실비아의 앞에 있던 갈색 생명체 때문이었다.
갈색 생명체의 정체는 토끼 잠옷을 입은 제 아들 카르시온.
실비아가 아들에게 입어 달라고 애원을 해도 절대 입어 주지 않던 토끼 귀가 달린 잠옷이었다.
거기까지만 해도 심각한 귀여움이었는데, 어디서 났는지 막대사탕을 오물거리며 한쪽 볼이 빵빵해진 것은 공작의 심장에도 꽤나 치명타를 입혔다.
그렇다. 실비아가 심장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했던 것은 카르시온의 치명적인 귀여움 때문이었다.
그런 엄마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카르시온은 제 조막만 한 손으로 실비아의 소매를 당겼다.
“나 오늘은 엄마랑 잘래.”
실비아는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으며 감동 어린 표정을 했다. 그러고는 카르시온을 한 번 꼭 껴안고는 다정히 말했다.
“다 좋은데, 자기 전에는 사탕 먹는 거 아니야. 아들.”
“웅.”
카르시온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실비아는 다시 흐물흐물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귀여운 생명체가 제 아들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그럼 카온, 오늘은 엄마 아빠 사이에서 잘까?”
실비아의 말에 공작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싫으면서도 좋은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러나 그런 복잡한 감정은 불필요했다.
왜냐하면…….
엄마 아빠 사이에서 자자는 말에 카르시온이 울먹이며 실비아의 품에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카르시온은 실비아의 품에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는 무서워어…….”
그러다 아침에 공작이 카르시온을 훈육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낸 실비아가 공작을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대체 애를 어떻게 혼냈길래!
실비아는 카르시온을 안은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차가운 어조로 공작을 향해 말했다.
“어쩔 수 없네요. 당신은 오늘 다른 방에서 주무세요.”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었다.
공작은 실비아와 결혼한 이후로 어쩔 수 없는 일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따로 잠을 청한 적 없었다.
충격받은 공작의 표정을 본 실비아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럼 제가 다른 방에서 잘까요?”
공작은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마룻바닥에서 자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를 침실에서 쫓아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이야기된 거로 알고 있을게요. 제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자리를 옮겨 줬으면 해요. 카온, 엄마랑 이 닦으러 가자.”
“웅.”
그때였다. 세상을 잃은 듯한 기분을 체험하고 있던 공작이 카르시온과 눈을 마주친 것은.
실비아의 품에 안긴 카르시온은 저를 향해 선명한 비웃음을 짓고 있었다. 승리자의 웃음이었다.
그 후 카르시온은 공작과 실비아가 분위기를 잡으려 할 때마다 귀신같이 나타나 둘의 사이를 갈라놨다.
모든 걸 알고 일부러 그러는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자라면 자랄수록 카르시온의 얼굴에 실비아의 흔적은 사라지고 점점 공작을 닮아 갔다.
실비아의 얼굴이었으면 그나마 화가 덜 났을 것을.
그렇게 두 부자의 사이는 갈수록 나빠져만 갔다.
회상을 마친 공작이 수염 자국 없이 매끄럽기만 한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역시 딸이 필요해. 다음에 정식으로 입양을 제의해 봐야겠군.”
* * *
언제부터인가 한스는 당연하다는 듯 약초학 시간에 내 옆자리에 앉았다.
뭐, 옆에 앉는 것까지는 별 상관없는데. 문제는…….
왜 내 옆에 와서 그런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냐고.
제인에게 본의 아니게 고백을 했을 때도 다음 날 멀쩡히 웃어 보였던 애였는데.
‘리엔, 내가 어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모르는 사람이랑 사귀고 싶지 않다는 말은 천천히 알아 가면 가능성이 있다는 말 아냐?’
라는 과도하게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나는 그때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냥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었지.
뭐, 처음 그를 잘 몰랐을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그가 여러모로 괜찮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의 짝사랑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제인이 받아 준다면 받아 주는 거고 싫으면 그녀가 알아서 쳐낼 테니까.
그런데 그랬던 그가 며칠째 저렇게 우울한 얼굴인데. 신경을 안 쓰려고 해도 안 쓸 수가 있나.
“한스, 너 무슨 일 있어?”
내 물음에 한스가 쓰게 웃어 보였다.
“아, 얼굴에 드러났어? 하하, 별일 아니야.”
그러고는 세상이 떠나가라 깊은 한숨을 쉬는 한스.
누가 봐도 뭔 일이 있는 사람의 아우라였다.
혹시 이거 빨리 자기한테 뭔 일 있었냐고 물어보라고 눈치 주는 건가……?
“별일 아닌데 그렇게 푹푹 한숨을 쉬어?”
“실은…….”
눈치 준 거 맞네.
나는 흐린 눈으로 한스를 바라보다가 곧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긴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