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아버지가 운영하는 상단이 힘들어져서 집안 사정이 조금 힘들어지게 됐거든.”
“아…….”
애써 웃어 보이는 한스의 표정에 조금 숙연해졌다.
이건 어떻게 자신이 도와줄 수도 없는 문제였다. 어설프게 위로해 주는 것밖에는.
“원래 장사라는 게 잘됐다가 안 됐다가 하니까. 불경기라 그렇지 금방 괜찮아질 거야.”
“……응. 그랬으면 좋겠다.”
한스와의 대화가 끊기고 나는 조용히 책을 폈다. 어색한 분위기에 지금이라도 자리를 옮겨야 하나 고민할 무렵.
교실에서 다른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 왔다.
“푸핫! 야 너 겨드랑이에 홍수 난 거 아냐?”
“다, 닥쳐. 너도 저번에 회색 옷 입고 왔을 때 겨드랑이만 유독 짙은 색인 거 다 봤거든?”
“뭐래. 증거 있냐? 증거 있어? 그보다, 너 몰래 겨드랑이 말리려고 아까부터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었던 거야? 푸하하!”
놀림을 당하던 아이는 얼굴을 붉힌 채 제 친구의 말을 듣고 있다가 결국, 들고 있던 필기구를 집어 던지며 외쳤다.
“너희 부모님 만수무강해라 이 새끼야!”
“하, 너 지금 말 다 했냐? 너희 어머니는 무병장수나 하라지!”
……심한 말인 줄 알고 놀랐는데, 잘 들어 보니까 덕담이었네.
그들의 훈훈한 싸움을 구경하다가 순간 내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스쳤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내게는 떼돈을 벌 수 있을 만한 레시피가 있는데.
쿤에게도 줬던 다한증 치료제.
다른 말로 땀 억제제!
나는 급하게 고개를 돌려 한스를 툭 쳤다.
“한스.”
“응……?”
“혹시 내가 개발한 의약품 좀 너희 상단에서 유통해 줄 수 있어?”
그는 갑작스러운 물음에, 잠시 턱을 긁적이며 뭔가 생각하더니 이윽고 눈매를 좁히며 미안하다는 얼굴을 했다.
“유통이야 해 줄 수 있지만, 지금 상단 사정이 좋지 않아서 많이 신경 써 줄 수는 없어. 판촉이라든지, 선 투자금 지급이라든지. 잘 팔릴지도 미지수고…….”
나는 비뚜름하게 웃었다.
“무조건 팔려. 대신 내가 개발한 거로 잘되면 수수료 싸게 해 줘라.”
“무조건 팔린다고?”
“근데 수제 상품이라 공급을 많이 해 주지는 못해. 그러니까 한 병 한 병 최대한 비싸게 팔아먹어라.”
“뭔데 그렇게 자신만만…….”
한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내게 자신감이 넘치는 이유를 물어보려 할 때, 내 앞에 말감이가 다가와 섰다. 상당히 굳은 표정이었다.
“무슨 용건이야, 말감아?”
그녀에게 치료제를 건네준 지 한 달가량이나 지났고, 부작용은 다 치료됐을 텐데.
전공 수업을 들을 때마다 중간중간 말감이의 상태를 확인하며 내린 결론이니 확실했다.
“미안해.”
응?
예상치 못한 그녀의 사과에 나는 멀거니 그녀를 바라봤다.
말감이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울상을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전에 카르시온과 엮어 비웃은 것. 나를 도와주려는 네게 화를 낸 것. 정말 미안했어. 그리고…… 고마워.”
아.
이러니 말감이를 싫어하려고 해도 싫어할 수가 있나.
나는 턱을 괴며 장난스레 말했다.
“밥은 맛있는 거로 사 줄 거지?”
그러자 말감이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가 나와 같이 먹는 게 싫지 않다면.”
……생각해 보니 그건 좀.
말감이가 싫은 게 아니라, 밥을 먹으러 나가려면 잠이나 약초 공부로 보낼 수 있는 시간을 할애해야만 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카르시온에게 같이 밥 먹는 건 ‘이번이 마지막도 아닐 텐데 뭐.’라는 말을 해 버려서 곤란하던 차였다.
어디 보자 변명거리가…….
“아. 생각해 보니까 나는 괜찮은데, 질투할 사람이 있어서 조금 힘들 수도 있겠다.”
“어?”
“말을 정정한 건 미안. 그래도 마음은 받을게.”
나는 그녀의 얼굴을 한번 훑었다. 전처럼 매끄러운 피부였다.
“다 나아서 다행이네.”
“리엔…….”
마음만 받는다는 말 때문인지 다 나아서 다행이라는 말 때문인지, 그녀가 조금 촉촉해진 눈망울로 나를 바라봤다.
윽, 저런 눈빛은 부담스러운데.
나는 턱을 괴고 있지 않은 다른 한 손을 휘휘 내저었다.
“사과는 받을 테니까 이제 네 자리로 돌아가. 조금 있으면 수업 시작하겠다.”
하지만 말감이는 자리에 돌아가지 않고 내 앞에서 뭔가 할 말이 더 남아 있다는 듯 입술을 오물거렸다.
“뭐 더 할 말 있어, 말감아?”
“리엔.”
“응.”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내가 내년에 동아리를 하나 만들 생각인데, 혹시 들어와 줄 수 있어?”
“나는 지금 동아리가 좋아서.”
어느 동아리도 이렇게 꿀일 수 없을 테니까.
“그래?”
말감이가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뭔가를 기대하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럼 혹시 내가 동아리를 만드는 건 괜찮아?”
나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동아리 만드는 거야 네 자유지.”
말감이의 표정이 단숨에 밝아졌다.
“고마워!”
나는 저 밝은 웃음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설마.
내 팬클럽 동아리 따위를 만들려는 건 아니겠지?
에이, 그런 동아리에 들어갈 사람이 누가 있어. 말감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나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고는 카르시온뿐인데.
거기에 카르시온은 우리 동아리의 부장이고, 동아리 최소 인원수는 3명이니까.
그래, 걱정하지 말자.
* * *
오늘은 왜 이렇게 날 찾아오는 사람이 많은지.
……다 내가 자초한 일이었지만.
나는 옆에서 반쯤 으르렁거리고 있는 카르시온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었다. 진정하라는 의미였다.
아니나 다를까 내 손길에 그는 언제 눈꼬리를 올렸냐는 듯 순한 얼굴을 했다.
손쉽게 카르시온을 진정시킨 후 나는 작게 하품을 하며 동아리실에 찾아온 손님을 바라봤다.
“약 떨어져서 왔어, 쿤?”
쿤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전에 말씀하셨던 사례금을 가지고 왔습니다.”
“아, 그거.”
“리엔이 주신 치료제. 사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는데, 효과가 정말 굉장하더군요.”
그는 제 손에 들린 주머니를 들어 보였다. 열어 보지 않아도 주머니 속에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을 게 뻔했다.
“본국에 더 많은 돈을 요청했습니다. 생각보다 시일이 걸릴 것 같으니, 먼저 제가 가진 것을 드리겠습니다. 작게나마 받아 주세요.”
“주머니에 든 게 사례금의 전부가 아니라고?”
박 터졌네.
하지만 그에게 돈을 받기에는…….
한스를 통해 조만간 땀 억제제를 유통할 텐데, 솔직히 주머니에 든 금화만 해도 내가 생각했던 땀 억제제의 가격을 훨씬 넘어섰다.
저걸 받았다가는 나중에 내게 올 후환은 둘째 치고, 양심이 찔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것 같았다.
“쿤. 갑자기 말을 바꿔서 미안한데, 본국에서 요청한 돈도 지금 네가 가져온 돈도 거절할게.”
그러자 쿤이 조금 상처받은 얼굴로 입을 뗐다.
“……제가 주는 돈이라 싫은 겁니까?”
“응. 더러운 네 돈 따위 필요 없어.”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저 말은 내가 한 게 아니라 카르시온이 한 대사였다.
쿤은 그를 힐끔 보고는 가볍게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작위는 어떻습니까, 리엔?”
“전에도 말했지만, 필요 없다니까.”
쿤은 그런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가 잠시 후 뭔가 깨달은 표정이 되어 말을 했다.
“……아. 혹시 리엔의 신분이 준남작보다 높습니까? 하지만 그건 리엔 부모님의 작위이고, 이것은 온전히 리엔에게 가는 작위입니다. 단승 작위라 해도 유용할 거예요.”
“그런 것도 아니야. 엄마를 닮아서 그런가, 난 작위에 정말 관심 없거든. 신분에 상관없이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하지.”
나는 진실 반 거짓 반이 섞인 말을 뱉어 내며 슬쩍 카르시온을 곁눈질했다.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삶이라.
이미 그러지 못하고 있는데 과연 내가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야, 그래서 너는 언제 꺼ㅈ…… 나갈 건데?”
나는 카르시온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분위기가 파탄 난 것을 보니, 내가 상념에 젖어 있는 동안 쿤과 카르시온 사이에 한차례 매서운 눈빛 교환이 오간 듯했다.
“저는 당신이 아니라 리엔에게 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만.”
“미안하진 않지만, 동아리 부장이 나라서. 우리 동아리는 외부인을 받지 않고 있거든. 대화하려면 여기서 나가든지.”
듣고 보니 카르시온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매일 놀자 판이라고는 하나, 여기는 엄연한 동아리실.
내가 개인적으로 누굴 불러 대화할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미안, 카온. 너와 피오르에게 실례라는 걸 생각 못 했네.”
“어?”
나는 왠지 모르게 얼이 빠진 듯한 카르시온을 뒤로하고 쿤에게 턱짓했다.
“쿤, 잠시 다른 곳으로 옮겨서 대화하자. 생각해 보니까 네 치료 경과도 들어 봐야 할 것 같은데. 계속 여기서 대화하면 민폐니까.”
“좋습니다.”
쿤의 대답을 듣고 나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까 피오르는 아까부터 뭘 하고 있는데 이렇게 조용하지?
시선을 돌려 바라본 피오르는 우리가 뭘 하든 자신과는 관련 없는 일이라는 듯 얌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이 정도 난리는 난리도 아니라는 건가?
과연 매일같이 카르시온과 전쟁을 벌이는 그다운 여유로운 태도였다.
……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문득 그의 귀에 뭔가가 박혀 있는 것이 시야에 담겼다.
뭔가 싶어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피오르가 검술부 아이들과 같이 야영을 할 때 낀다는 귀마개였다.
엄청난 코골이 소리와 이갈이에도 편히 잘 수 있도록 만들어진 마법 귀마개.
피오르가 몇 달을 빌어 카르시온이 겨우 만들어 줬다는 물건이었다. 나에게는 겸사겸사 만들어 봤다며 몇 쌍이나 손에 들려 준 물건이지만.
……진짜 시끄러웠나 보네.
어서 빨리 자리를 비켜 줘야 할 것 같았다.
“가자, 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대충 휴게실에서 살펴보면 되려나.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냥 요 앞에서 할까.
어떻게 해야 덜 귀찮을까 생각하며 쿤이 열어 준 문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카르시온이 급히 뒤쪽에서 이름을 불러왔다.
“리엔.”
의문 어린 눈으로 바라보니 그가 변명하듯 입을 뗐다.
“여기서 해도 괜찮아. 검사하는 거 정도야 민폐 축에도 못 끼는걸.”
하지만…….
나는 귀마개를 낀 채 책을 읽고 있는 피오르를 바라봤다.
“네가 괜찮아도 다른 사람은 괜찮지 않을 수 있잖아.”
피오르가 괜찮지 않다고 하면 또 으르렁거리며 싸울 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