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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38)화 (38/161)

38화

피오르는 우리와 있을 때는 귀마개를 끼지 않았다.

실제로 쿤이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귀에 아무것도 없었다.

주변이 시끄러워지니 낀 거겠지.

“귀마개를 꼈으니 이제 괜찮을 거야. 봐 봐, 우리가 뭐라 떠들든 쳐다보지도 않잖아.”

그때 마침 책에서 시선을 뗀 피오르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조용히 카르시온에게 시선을 돌려 피오르를 눈짓했다.

피오르를 돌아본 그의 얼굴이 와락 구겨진다.

왜 하필 지금 책에서 시선을 뗐냐는 얼굴이었다.

피오르 또한 억울했는지 썩은 얼굴로 항변했다. 왜 마음대로 쳐다보지도 못 하게 하냐는 얼굴.

오. 표정으로 대화가 가능할 줄은 몰랐는데.

나는 그들이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 걸음을 옮겼다.

“다녀올게.”

그러자 카르시온이 이번에는 내 소매를 잡아 왔다.

“여기서 안 할 거면 나도 데려가.”

“……?”

혹시 내가 데이트를 하러 간다고 잘못 말했었나 생각하며 카르시온을 바라봤다.

“내가 가서 안 오겠다는 게 아니잖아. 잠깐 다녀오겠다는 건데.”

우리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쿤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내 앞을 막고 나섰다.

“잠깐 나가겠다는 거로 이렇게 난리를 피우시다니요. 카르시온 당신의 행동은 리엔을 속박하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쿤을 바라보는 카르시온의 눈매가 치켜 올라갔다. 그에 쿤이 시선을 받아치며 말을 이었다.

“꼭 의처증에 걸린 남편 같군요.”

“뭐? 의처증에 걸린 남편?”

이러다 싸움이 나겠다 싶어 둘 사이를 중재하려고 할 때,

카르시온이 돌연 얼굴에 활짝 웃음을 걸치며 쿤의 등을 두드렸다.

“남편이라니 고맙다. 아직 결혼은 못 했는데, 그렇게 보였어?”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듣는 개x마이웨이였다.

쿤이 ‘뭐 이런 놈이 다 있지.’라는 표정으로 카르시온을 바라보다가 따지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결혼은 무슨, 둘은 아무 관계도 아니지 않습니까.”

“리엔과 내가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걸 네가 어떻게 확신하는데?”

“사귑니까?”

“아니.”

“그럼 사귀기 전 단계입니까?”

“아니.”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거군요.”

팩트로 사정없이 때리는 말에, 화를 낼 줄 알았던 카르시온이 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진짜 아무것도 아닌 건 너겠지. 리엔에게 너는 환자일 뿐. 그 무엇도 아니잖아?”

쿤은 뭐라 말하지 못하고 눈썹만 꿈틀거렸다.

하긴, 나와의 첫 만남만 해도 썩 좋진 않았는데 내가 왜 그를 예뻐하겠는가.

오해가 풀리긴 했어도 딱히 좋은 감정은 없었다.

카르시온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에 비해 나는 리엔의 27번째 속눈썹과 비슷한 순위라고 확언받았지. 어쩌면 더 올라갔을지도.”

그걸 왜 자랑스럽게 말하는 건데.

“그건……. 좀 부럽군요.”

나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황당해진 얼굴로 쿤을 바라봤다.

그걸 왜 부러워하는 건데.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피곤함을 느낀 내가 둘 사이를 가르고 나섰다.

“일단 알았어. 카온은 정말 괜찮은 것 같고, 피오르도…….”

피오르를 바라보니 어느새 귀마개를 빼고 상황을 지켜보던 그가 손을 내저었다.

“나도 괜찮아. 너희 둘이 나가고 나랑 카르시온 둘만 남겨졌을 때가 더 무섭다, 난.”

“……그렇다고 하니까 그냥 여기서 확인하자.”

쿤의 얼굴에 잠시 불만스러운 기색이 스쳐 갔다. 하지만 곧 지워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는 의자를 가져와 쿤을 앉혔다. 그리고 손바닥을 내밀며 손을 올려보라는 뜻으로 말했다.

“손.”

아. 생각해 보니까 이건 너무 개한테 하는 명령 같지 않나.

“미안. 방금 건 못 들은 거로…….”

해 달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어느새 내 손 위에 무언가 올라와 있었다.

그것도 쿤이 아닌 다른 손이.

나는 요청하지 않은 손의 주인을 쳐다봤다.

“카온?”

네가 대체 왜?

혼란스러운 얼굴로 카르시온을 바라보는데,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무슨 문제 있냐는 듯 눈을 예쁘게 접으며 웃었다.

얼굴 복지…….

그 얼굴을 마주한 순간 뭐라 할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조용히 카르시온의 손을 잡아 내렸다.

“카온. 여기 쳐다보지 말고 뒤돌아서 할 거 하고 있어.”

그러자 카르시온이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내가 안 볼 때 얘가 너한테 음흉한 시선이라도 보내면 어떡해?”

“적어도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안 일어나니까 내 말대로 해.”

“응…….”

부러 단호하게 말했더니 금세 꼬리를 내리고 뒤를 돌았다. 마법 서적을 가지고 와 펼치는 카르시온.

겉으로는 열심히 마법 서적을 읽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귀는 이쪽에 신경이 집중되어 있겠지.

그래도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려놔서 한숨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쿤에게 손을 달라는 의미로 손을 척, 하고 내밀자 그가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너 수전증 있어?”

사실 제국에서 술주정뱅이였는데, 아카데미에서 술을 못 마시니 금단현상이 일어났다든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떨어?”

하지만 내 물음에 답한 것은 쿤이 아니었다.

“뭐? 떨어? 너 지금 리엔 앞이라 긴장해서 떠는……!”

“카온.”

단숨에 입을 다무는 카르시온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금방이면 끝날 검사가, 몇 시간이고 걸릴 것 같았다.

나는 가방을 뒤져 물건 하나를 꺼냈다. 카르시온이 피오르의 귀마개를 만들면서 내게도 겸사겸사 선물한 귀마개였다.

왜 겸사겸사였던 내가, 피오르는 하나 받은 귀마개를 몇 개나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건 내가 한 번도 쓰지 않은 거니 괜찮을 거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 카르시온에게 다가갔다.

“카온. 내가 빼 줄 때까지 그러고 있어.”

그리고 그가 뭐라 말할 새 없이 직접 양쪽 귀에 끼워 주었다.

내 손길이 닿은 카르시온의 귀가 붉어졌다.

그런 카르시온을 흡족하게 바라본 나는 다시 쿤에게 돌아갔다.

쿤이 카르시온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떨떠름한 어조로 말했다.

“카르시온은 리엔의 말을 굉장히 잘 듣는군요.”

“뭐……. 그런 편이지.”

대충 대답을 한 후 그를 빤히 쳐다봤다. 이제 손을 달라는 의미였다.

쿤이 당황하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치료제 덕분에 상태가 많이 호전됐긴 했으나, 아직 땀이 납니다.”

“그래서?”

“더럽지 않습니까…….”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

그래서 떨던 거였나.

나는 허공에 방황 중인 쿤의 손을 잡아챘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상태를 살피며 답했다.

“안 더러워.”

확실히, 쿤이 왜 내 눈치를 봤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손이 촉촉했다. 하지만 더럽지 않다는 건 진심이었다.

과거 엄마를 찾아오던 환자 중에는 위생 상태가 정말 심각한 사람도 있었다.

그에 비하면 땀 정도야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내 말을 끝으로 쿤에게서 다른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그의 상태를 살피는 데에 집중해,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상태를 다 살펴봤을 때쯤, 쿤이 말을 걸어왔다.

“……치료금 말입니다.”

“필요 없다니까.”

“생각해 봤는데, 리엔이 계속 거부하는 돈을 제가 꾸역꾸역 손에 쥐여 드려 봤자 부담스러워하실 것 같습니다.”

“잘 알고 있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따로 원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잘 알긴 개뿔.

손을 살피던 시선을 옮겨 쿤의 눈을 응시했다.

아. 나는 저 눈빛을 알고 있었다.

엄마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 중 저 눈빛을 한 사람들은 백이면 백, 은혜를 갚기 전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어느 방식이든.

지금이라도 돈을 받아야 하나?

내가 필요한 게 뭘까.

생각해 보니 한스를 통해 땀 억제제를 유통하려면 미리 만들어 놔야 하는데. 일손이 하나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네 병을 다 치료하기 전까지만 나 좀 도와줄 수 있을까?”

도와 달라는 말에 쿤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뭘 도와 드리면 됩니까?”

의욕 가득한 모습이었다.

“너한테 준 다한증 치료제. 그거 유통할 생각이거든.”

“치료제 유통…….”

뭔가 생각하던 쿤이 돌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리엔은 좋은 분이군요.”

“돈 벌려고 하는 건데.”

“그래도 저는 좋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거, 쿤이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듯했다.

“거저 줄 생각 없어. 최대한 비싸게 팔아먹을 생각이야.”

“하지만 리엔의 치료제로 분명 구원을 받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저처럼요.”

그렇겠지. 푹푹 찌는 여름철에 뽀송한 겨드랑이와 오금을 누릴 수 있으니까.

나는 묘한 눈으로 쿤을 바라봤다.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세상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바라보는구나.”

쿤은 쿡쿡 웃음을 흘렸다.

“가끔 그런 말을 듣긴 했습니다.”

“그래서, 도와줄 수 있어?”

“물론이죠. 아무래도 약초 관련인 것 같은데 그쪽 분야라면 나름 도움이 될 겁니다. 이래 봬도 하프 엘프라서요.”

“……진짜?”

자연스럽게 그의 귀로 시선이 향했다. 뾰족하지 않은 평범한 모습.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챈 듯 그가 설명했다.

“외형은 폐하를 닮아 인간 쪽에 가깝습니다. 대신 어머니의 능력을 이어받아 정령을 잘 다루죠.”

그래서 내가 꽃을 꺾었을 때 화가 많이 났구나. 엘프들은 자연을 친구라고 생각하며 소중히 여겼으니까.

나는 머릿속으로 그의 가계도를 그려 보았다.

아바스칸투스 제국의 둘째 황자인 쿤은 황후의 소생이 아니었다.

하나밖에 없는 황비의 아들이었는데, 그녀는 쿤이 3살 되던 해에 실종됐다고 했다.

“참고로 저희 어머니는 실종된 게 아닙니다. 지금도 저랑 정기적으로 만나곤 하죠.”

“……?”

“어머니가 황궁을 답답해하셨거든요. 익숙지 않은 환경에서 엘프인 것도 감춰야 했으니 더더욱.”

쿤이 즐거운 이야기를 하듯 옅게 웃음을 그려 내었다.

“그런 어머니를 안타깝게 여긴 폐하께서 어머니를 실종으로 처리한 후 자유를 드렸습니다.”

“그거 기밀 아니야?”

쿤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은인에게 이 정도 비밀이야.”

두 번 은인이 되었다가는 국가의 중대사를 미주알고주알 전부 말해 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뭐, 기밀이라고 하긴 했지만, 저희 제국의 고위 귀족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긴 합니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뿐.”

아하. 그래서 거리낌 없이 말했던 거구나.

“어쨌든, 그러면 너도 좋다고 했으니까 내일부터 동아리 시간 끝나고…… 아. 생각해 보니까 넌 무슨 동아리야?”

쿤이 씩 웃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환자지 않습니까. 진단서를 제출하고 동아리 시간은 쉬도록 허가받았습니다.”

세상에. 나보다 더 꿀을 빨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니.

“동아리 성적은?”

“모든 성적의 평균을 낸 값으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나일론 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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