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쿤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얼마 전에 열사병으로 쓰러진 거 보셨잖습니까.”
“이제 쓰러지지는 않잖아.”
“하지만 진단서는 이미 제출했습니다. 아직 완전히 나은 것도 아니고요.”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는데……. 그럼 동아리 시간은 완전 자유라는 거네?”
“네.”
“잘 됐다. 우리 동아리도 사실은 종일 놀거든. 내일부터 이 동아리실로 찾아와.”
“그래도 됩니까?”
쿤과 내 시선이 동시에 카르시온의 뒤통수에 닿았다.
“카온은 동아리 시간 이후 우리 둘이 만나는 것보다, 차라리 앞에서 대놓고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걸.”
피오르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일리 있는 말이군요.”
쿤이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조금 어두워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리엔. 이건 제 주제를 넘는 말일지도 모르겠으나, 카르시온은 리엔을 다소 과할 정도로…….”
“알아.”
“…….”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그리고 너뿐만 아니라 전교생이 알고 있을걸?”
“……그런가요.”
“내가 알아서 잘 쳐낼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아마도.
“손은 어느 정도 다 살펴봤고. 질문 몇 개만 추가로 할게, 쿤.”
“네.”
나는 다른 부위에 땀이 나고 있는지, 난다면 전과 비교해 얼마나 나는지 등등을 물어봤다.
여러 가지 조합해 본 결과 쿤의 병은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일순간 얼굴을 굳혔다.
“어?”
내 굳은 표정에 쿤이 뭔가 이상함을 느낀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뭔가 잘못됐습니까?”
“아니. 다한증과 무한증은 순조롭게 치료되고 있어.”
나는 이걸 지금 당장 말해 줘야 하나 고민했다.
“문제는…….”
말을 흐리고 한참을 뜸을 들이자 답답함을 느낀 쿤이 재촉하듯 다시 물어왔다.
“무슨 일이죠? 제 몸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까?”
그런 쿤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진정시켰다. 흥분한 채 들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쿤. 일단, 나는 의원이 아니라 정확한 진단은 하지 못한다는 거 알아둬. 그러니까 아직 확실한 건 아니라는 거야.”
“얼마, 얼마나 심각하길래…….”
“하아.”
주변이 조용해서 그럴까, 쿤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나는 양쪽 손에 깍지를 끼며 턱을 괬다. 그러고는 더없이 진중한 얼굴로 선고했다.
“잘 들어, 쿤. 너는 앞으로 기껏해야 70년 남았어.”
“……네?”
쿤의 얼굴이 멍해졌다.
마나를 단련하지 않은 일반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70세 안팎.
마나를 단련한 사람들은 일백 살도 너끈히 살곤 했지만, 일단 일반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그러했다.
즉, 현재 쿤의 나이에서 앞으로 70년이 남았다는 말은 사실 장수할 거라는 말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아. 하프 엘프라고 했으니 수명이 좀 더 길려나.
한참이나 내 말의 뜻을 고민하던 쿤은, 근처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뻣뻣한 움직임으로 눈만 움직였다.
시선이 닿은 곳은 고개를 돌리고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고 있는 피오르. 그는 언제 뺐는지 모를 귀마개를 손에 꽉 쥐고 있었다.
아주 꽉.
쿤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듯 몸에 힘을 풀며 작게 탄식했다.
“속았…… 군요.”
나는 벙찐 표정의 그를 보며 방긋 웃었다.
“저런, 뭔지는 몰라도 내 말을 오해했구나. 나는 장수할 거라고 덕담해 준 것뿐인데.”
* * *
“몇 번을 생각해 봐도 대박이야!”
“워워, 진정하라니까.”
나는 달뜬 한스의 어깨를 눌러 내렸다.
그는 내가 판매를 부탁한 땀 억제제의 설명을 들은 후부터 며칠째 저 상태였다.
“아카데미 상가에 우리 상단과 자주 거래하는 상점이 있어. 우선 그곳에 소량 풀어 보자.”
“시험 판매를 해 보자는 거지?”
“그렇지. 가격대가 있긴 하지만, 우리 나이대가 사실 제일 외모에 관심 많을 때이니 반응을 보기에는 나쁘지 않을 거야.”
“그래. 나는 그쪽으로는 잘 모르니까 네가 알아서 해 줘.”
알아서 해 달라는 말에 한스가 감격한 얼굴을 했다.
그가 손을 공손히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상당히 과장된 몸짓이었다.
“제가 약초 쪽으로는 잘 몰라도 이쪽으로는 도가 텄습죠. 헤헤.”
“……너 나랑 같은 약초학부잖아.”
한스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경영학부에 가고 싶었는데 성적이 딸려서 이곳에 들어온 거거든.”
“…….”
약초학부는 굉장한 비인기 과목이었기에 다른 과목보다 커트라인이 낮은 편이긴 했다.
한스처럼 그저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 약초학부에 들어온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그런 사람을 두고 보니 우울한 기분이 앞섰다.
사람들은 왜 약초의 매력을 모를까. 이렇게 실용적인 학문이 또 어디 있다고.
흐려진 눈으로 한스를 바라보자 그가 화들짝 놀라며 변명했다.
“다른 쪽 성적이 좀 낮아서 그렇지 경영이나 회계 쪽은 잘하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책임지고 비싸게 팔아 줄게!”
그걸 걱정한 게 아닌데.
나는 목 끝까지 차오른 한숨을 삼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땀 억제제를 만드는 걸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예상보다 좀 더 일찍 줄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나도 도와줄까?”
“아니야. 너는 그 사이에 끼면 바로 찌그러질 거야.”
“찌그러져?”
“그런 게 있어.”
“으응?”
“그럼 나 먼저 간다.”
“앗 넵. 잘 들어가십시오, 사장님!”
나는 각 잡힌 자세로 경례하는 한스를 보며 픽 웃고는 동아리실로 향했다.
“나 왔어.”
“리엔 왔어?”
동아리실에 들어가자마자 카르시온이 달려와 내 가방을 들어 줬다.
말이 들어 준 거지 반쯤 앗아 가다시피 한 그였다.
헐레벌떡 가방을 연 그가 가방 안에 꽉꽉 들어찬 약초를 소중히 꺼냈다.
그러고는 숙련된 손길로 약초를 다듬기 시작하는 카르시온.
동아리실에 먼저 도착해 있던 쿤도 질세라 카르시온이 독점한 약초를 야금야금 빼돌려 약초를 손질했다.
“어디서 못 배워 먹은 손버릇을 가진 놈이 약초를 훔쳐 가네?”
“훔치는 게 아니라 손질을 돕는 거죠. 애초에 리엔을 도와주기로 한 사람은 접니다.”
가방 한가득 채워 온 약초가 순식간에 다듬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다들 쉬엄쉬엄해.”
어쩌다 이렇게 됐나.
그것을 알려면 며칠 전 쿤이 나를 도와주기로 한 첫째 날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다오 트란토를 한 아름 들고 동아리실을 찾았다.
문외한에게 약을 만드는 것을 맡길 수는 없으니, 약초 다듬기라도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
어떻게 다듬는지 딱 한 번 시범을 보여 줬을 뿐인데, 쿤은 곧잘 따라 했다. 나는 감탄하며 칭찬을 해 줬고…….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그렇지 않아도 쿤이 동아리실에 들락날락하는 것을 좋지 않게 봤던 카르시온이었는데, 내가 쿤을 칭찬하자 질투 게이지가 솟아오른 것이다.
카르시온은 자신도 잘할 수 있다며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는 몰래 연습하기라도 한 듯 정확하고 빠른 속도로 약초를 손질해 나갔다. 과장 조금 보태서 나보다 나은 수준이었다.
나는 질투에 불타오른 카르시온을 달랠 겸 여러 번에 걸쳐 칭찬을 해 주었다. 실제로 감탄하기도 했고.
아무도 반박 못 할 약초 다듬기의 인재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두 명 다 칭찬을 해 버린 탓일까, 그다음부터는 경쟁이 과열되어 지금 보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
열심히 약초를 다듬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잠깐 시선이 피오르에게 닿았다.
피오르도 질린 얼굴로 둘을 바라보다가 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저었다.
“리엔. 미안하지만 난 저기에 낄 자신이 없어.”
“이미 민폐 끼치고 있는데 양심 없게 도와 달라고는 안 해. 이미 둘로 차고 넘치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며 나는 책상에 앉아 땀 억제제 조합에 필요한 다른 재료들을 준비했다.
다른 일을 하기가 무섭게 카르시온과 쿤이 싸우기 시작한다.
“아. 나와 봐. 약초 손질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리엔에게 칭찬 좀 받았다고 기고만장해지신 모양인데, 저는 어렸을 때부터 식물과 함께했습니다.”
“식물 성애자라는 거네.”
“적어도 카르시온보다는 잘한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그 실력이 나보다 낫다니. 입만 살았구나. 무가치한 놈.”
“세상에 무가치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쨍그랑-!
나는 귀를 때리는 파열음에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당황한 피오르가 나를 바라봤다.
“미, 미안. 궁금해서 냄새만 맡아 본다는 게 손이 미끄러져서.”
“다치지는 않았어?”
나는 서둘러 피오르가 다치지 않았나 확인한 후, 깨진 유리를 치울 빗자루를 찾았다.
그때 내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깨진 유리병에 담겨 있던 원료의 이름이 적힌 종이.
피오르가 깬 유리병에 담긴 것은 땀 억제제를 만드는 재료 중 가장 비싼 것이었다.
“저 무가치한 자식이!”
세상에 없던 무가치한 것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 *
상황은 빠르게 정리됐고, 피오르는 값을 물어주겠다고 했다.
실은 거절하려 했는데 안 받아 주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라 불쌍해서 알겠다고 했다.
그나마 비싸긴 해도 구하기 어려운 종류는 아니라 다행이었다.
아카데미 주변 상가만 가도 금방 구할 수 있을 테니.
아. 쿤은 내가 가져온 약초를 모두 손질한 후 동아리실에서 나갔다.
사실 제 발로 나갔다기보다는 손질이 끝나자마자 카르시온이 그를 내쫓는 게 일상이었다.
그래서 더 눈에 불을 켜고 손질하는 걸지도.
나는 동아리실 한편에 수북이 쌓인 다오 트란토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요 며칠 카르시온과 쿤이 열심히 약초를 손질해 준 덕분에 전에 구해 왔던 다오 트란토를 다 소진했다.
조만간 또 산에 올라가 채집해 와야지.
챙길 게 뭐가 있나…….
채집 도구랑 약초를 담을 바구니와 마물 기피제 정도인가.
마물 기피제 하니 갑자기 동아리 실적 점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카온.”
“응?”
“우리 이번 학기 동아리 실적 점수 채웠어?”
카르시온이 순한 눈을 깜빡였다.
“이번 학기 끝날 때까지 못 채울까 봐 걱정돼서 그래? 걱정하지 마, 그럴 일 없도록 할게.”
“아니, 이번 마물 토벌은 나도 데려가 달라고.”
“뭐……?”
잠시 동아리실 안에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렸다.
“안 돼!”
그리고 카르시온과 피오르가 동시에 소리쳤다.
나는 이렇게 격한 반응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왜?”
“위, 위험하기도 하고, 리엔에게 못 볼 꼴을 보이는 것도 싫고…….”
카르시온이 당황하며 변명했지만, 그게 내가 못 갈 이유는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 마물 잘 잡아.”
허세가 아니었다. 나는 정말로 마물을 잡는 것에 일가견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