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그사이 내가 쓰러진 마물에 가까이 다가간 것을 봤는지, 피오르가 익살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리엔. 너무 가까이 가지는 마. 잘못해서 마법 풀리면 단번에 왁, 하고 달려든다?”
내가 겁먹을 거라 생각했나 보네.
하긴, 저렇게 말하는 피오르도 마물에 익숙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는 허리춤에 매단 단도를 빼 들어 마물의 심장에 박아 넣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 날렵한 움직임이었다.
짧은 단도가 빙결 마법에 걸려 더욱 단단해진 마물의 몸체에, 그것도 정확히 핵이 있는 부분을 찔러 들었다.
내가 봐도 깔끔한 솜씨였다.
놀란 카르시온과 피오르의 입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마물의 몸에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집어넣고는 뒤를 휙 돌아보며 물었다.
“미안. 뭐라고?”
휘적휘적.
그들을 바라본 채 손의 감각에만 의존해 핵을 찾았다.
무감정한 얼굴로 마물의 몸을 뒤지던 나는, 손에 딱딱한 무언가가 잡히자 입매를 끌어 올렸다.
“찾았다.”
마물의 몸속에서 핵을 꺼내자 손 밑으로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앞뒤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크게 오해했을 것도 같았다.
두 남정네가 굳어 있는 사이, 나는 옆에 내려놨던 단검과 방금 뽑아낸 핵을 들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피오르가 나를 응시하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칼은 집어넣고 다가와 줄래?”
“아. 깜빡했다.”
나는 그제야 칼을 들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고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고는 단검에 묻은 피를 쓱쓱 닦아 낸 후 검집에 집어넣었다.
피오르가 나를 아득한 눈빛으로 보다가 힐끔 카르시온을 훔쳐봤다.
그는 아직도 충격의 여파가 가시지 않았는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눈동자도 파르르 떨렸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저 모습을 보고 안 놀라는 게 비정상이지.”
피오르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카르시온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짧게 심호흡했다.
“리엔, 멋있어……!”
반전이 있는 듯 없는 모습에 피오르가 징하다는 듯 뇌까렸다.
“……정상과 내외하는 놈.”
벅찬 눈빛을 하던 카르시온이 뭔가 깨달은 듯 아차 싶은 표정으로 나에게 오도도 달려왔다.
내 주변으로 여러 개의 마법진이 떠오른다. 어지간한 마법사는 꿈도 못 꾼다는 다중 캐스팅이었다.
“정말 멋있었지만, 앞으로 핵 꺼내는 건 내가 할게. 리엔의 손이 더러워졌잖아.”
“누구든 해야 하는 일인데 뭐.”
손에 묻은 피가 그의 마법에 의해 사라졌다.
아침에 샌드위치에 들어가는 햄을 자르며 실수로 베인 상처까지도 전부.
카르시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마법을 쓰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꺼낼 수 있어.”
“……그래? 그렇게도 활용할 수 있는지는 몰랐네. 그럼 얘기가 달라지지. 앞으로 부탁할게.”
내가 마물의 몸속에서 핵을 꺼낼 때마다 이런 난리를 치는 것보다는 전부 카르시온에게 위임하는 게 나아 보였다.
다음 학기부터는 따라온다는 말도 꺼내지 말고 얌전히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카르시온의 마법을 지켜봤다.
일단 내가 알 수 있는 마법은 피 묻은 손이 깨끗해졌다는 것과 몸이 개운해졌다는 것 정도.
피로가 가신 느낌이랄까.
나머지는 무슨 마법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내게 해가 될 만한 것들은 아닐 테니.
언제부터 그를 이렇게 신뢰하게 됐는지 모를 일이었다.
“야, 카르시온! 너 그런 것도 할 수 있었어?”
노기가 담긴 음성에 시선이 자연스레 옮겨졌다. 피오르였다.
또 마법 걸어 줄 것은 없나 나를 살펴보던 카르시온이 방해받아서 짜증 난 듯 미간을 좁혔다.
“뭐가?”
“그동안은 내가 핵을 꺼냈잖아! 그렇게 징그럽다 소리쳐도 거들떠보지도 않은 놈이!”
“어이쿠. 마법으로 꺼낸다는 발상을 방금 떠올려서.”
“퍽이나 그랬겠다!”
평소와 같은 싸움이었다.
나는 열심히 싸우는 둘을 내버려 두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금세 말싸움을 멈추고 나를 따라오는 그들이었다.
* * *
첫 마물을 쓰러뜨린 이후로 우리는 꽤 많은 핵을 모았다.
하늘을 보니 태양은 어느새 중천에 떠 있었다. 슬슬 샌드위치를 꺼낼 때가 온 듯했다.
이런 내 생각을 눈치라도 챈 듯 카르시온이 먼저 제안했다.
“리엔, 슬슬 배고플 것 같은데 뭐 좀 먹고 갈까?”
카르시온의 눈에는 피오르가 안 보이는 걸까. 아니면 그의 의사는 상관없는 걸까.
후자일 것 같다는 느낌이 강렬히 들었다. 피오르가 불쌍해진 나는 그의 인권을 챙겨 줬다.
“좋아. 피오르 너는?”
“나도 상관없어.”
피오르는 가볍게 웃으며 고맙다는 눈짓을 했다.
나는 샌드위치를 꺼내려 가방을 뒤지며 말했다.
“근데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 다들 먹을 거 챙겨 왔나 보네. 괜히 많이 만들어 왔나 보다.”
피오르가 제 빈손을 들어 보였다.
“난 아니고, 카르시온이.”
“우리 둘이 올 때는 대충 굶는 편이야. 근데 리엔 너를 굶길 수는 없으니까.”
카르시온은 금방이라도 아공간에서 음식을 꺼낼 듯하다가 갑자기 움직임을 뚝 멈추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잠시만, 리엔. 많이 ‘만들어’ 왔다고?”
“응. 배고프면 같이 먹으려고 샌드위치를 좀 만들어 왔거든.”
“직, 접?”
“응.”
“……와. 와.”
방금까지 멀쩡히 서 있던 카르시온이 현기증이라도 인 듯 휘청이다가 바닥에 쭈그리며 주저앉았다.
그가 작게 뭐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물 토벌 최고라는 둥 다음에는 반드시 방해꾼 없이 온다는 둥.
잠시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가온 카르시온이 활짝 웃었다.
“이제 점심을 먹어 볼까?”
카르시온이 좋아할 거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막상 기대가 가득한 눈빛을 마주하니 조금 부담스러워졌다.
나는 꺼내려던 샌드위치 케이스를 도로 집어넣으며 물었다.
“네가 가져온 건 뭐야?”
“음식물 쓰레기.”
“……?”
“쓰레기지. 내가 가져온 거는.”
대충 무슨 패턴인지 알 것 같아서 나는 속으로 쿡쿡 웃었다. 그의 배려에 기분이 유쾌해졌다.
“와. 그럼 나한테 음식물 쓰레기를 먹이려고 한 거야?”
장난스레 말하자 짧은 순간 그의 눈동자에 당황이 스쳤다.
“그런 게 아니라, 처음에는 멀쩡했는데 아공간 안에서 음식끼리 섞여 버렸다는 뜻이었어.”
주니어 1학년도 믿지 않을 것 같은 얕은 거짓말이었다.
나는 부러 눈썹을 그러모으며 실망한 눈빛을 했다.
“저런. 기대했는데 아쉽네.”
“……근데 지금 살펴보니 멀쩡한 것도 있는 것 같아.”
카르시온은 내가 아쉽다는 말을 내뱉기가 무섭게 말을 정정하며 아공간에서 음식을 꺼내기 시작했다.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콘 수프와, 윤기가 줄줄 흐르는 오리 통구이. 고급 치즈를 곁들인 샐러드와 각종 향신료가 첨가된 찜 요리 등등.
순식간에 그 넓었던 돗자리에 온갖 음식들로 가득 찼다.
심지어 아공간에 있던 음식들이라 그런지 김도 폴폴 나는 게 방금 갓 만든 음식 같았다.
“……너무 과한 거 아니야?”
“이 정도로 뭘.”
그가 별거 아니라는 듯 해맑게 웃어 보였다.
나는 먼저 샌드위치를 꺼내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가방을 닫았다.
“네가 가져온 것만 먹어도 한참은 남겠다. 그럼 내 건 넣어 둘게.”
영원히.
“안 돼……!”
카르시온이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들은 것처럼 경악했다.
“네가 샌드위치를 내게 주지 않으면!”
“않으면?”
그가 막상 입을 열려니 할 말이 없는지 잠시 눈을 굴렸다.
“내가 가져온 음식들 다 못 먹게 할 거야……! 그래야 공평하지.”
이 친구, 협박할 줄 좀 아네.
확실히 저 진수성찬을 포기하면서까지 내 샌드위치를 감추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카르시온을 바라보며 샌드위치를 내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가 갑자기 눈을 파르르 떨며 괴로운 얼굴을 했다.
“그런 예쁜 눈으로 본다고 내가 포기할 줄 알아?”
그냥 본 건데.
어이가 없어진 나는 샌드위치를 꺼내려던 것도 잊고 그를 쳐다봤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와 눈을 맞추던 카르시온이 울먹이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 앞에 포크와 나이프를 살포시 놔주었다.
“샌드위치는 괜, 괜찮, 후……. 괜찮으니까. 리엔 맛있게 먹어.”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
나는 말없이 가방을 열어 샌드위치가 담긴 케이스를 꺼내 툭 내려놨다.
“먹고 싶으면 그냥 먹고 싶다고 해. 네가 가져온 음식들에 비해 좀 초라하긴 하지만 같이 먹자.”
“……정말?”
“응.”
카르시온의 얼굴이 빠르게 기쁨으로 물들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는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피오르도?”
나는 샌드위치가 들어 있는 케이스를 눈짓했다. 카르시온이 가져온 음식이 아니더라도 남을까 봐 걱정했던 많은 양이었다.
“카온. 먹을 거로 치사하게 그러지 말자.”
“……알았어.”
시무룩했지만, 아까보다는 밝아진 음성이었다.
그렇게 식사를 시작하는데.
나는 카르시온이 가져온 음식에 식기를 가져간 것과 달리, 둘은 내 샌드위치를 먼저 집었다.
먹기 아깝다는 듯 한참을 들고 바라만 보는 카르시온과 바로 입으로 직행하는 피오르.
먼저 맛을 본 피오르가 신기하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내가 아는 샌드위치 맛이 아니네. 뭔가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처음 먹어 보는 맛이야.”
그럴 줄 알았지.
나는 고양감에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래도 맛없진 않지? 우리 아빠가 알려 준 특제 소스가 들어가서 그래.”
“응. 독특해서 놀란 거지 맛없진 않아. 맛있다.”
피오르의 평가에, 맛이 궁금해진 카르시온이 눈을 딱 감고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우물우물.
내가 만든 샌드위치를 카르시온이 먹는 모습을 보니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아빠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카온. 어때?”
카르시온이 상기된 얼굴로 샌드위치가 가득 담긴 케이스를 끌어안았다.
“맛있어어…….”
“입에 맞아서 다행이다. 많이 만들어왔으니까, 남으면 카온 너 가져가.”
그가 벅찬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리엔은 천사야?”
“그게 천사까지 갈 일은 아니지.”
좋게 말하면 챙겨 주는 거지만. 막말로 하면 잔반 처리인걸……?
픽 웃으며 통구이의 다리를 떼어 입으로 넣는데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며 풀숲 소리가 났다.
나는 마물인가 싶어 주머니에서 독침을 꺼냈다. 그러자 카르시온이 고개를 저었다.
“마물은 아니야. 마법으로 결계를 쳐 놨거든.”
“그럼 우리처럼 마물을 잡으러 온 사람인가?”
“그럴 확률이 높지.”
목소리를 낮춰 추측하고 있으려니 누군가 풀숲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