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모두의 시선이 쿤에게 향했다. 그는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 주세요. 욕을 하려고 한 게 아니라 정말 개새…… 아니, 도그버드였습니다.”
피오르가 동지를 바라보는 눈빛을 하며 쿤의 등을 토닥였다.
“카르시온에게 얼마나 욕을 하고 싶었으면 그런 거짓말을…….”
나도 쿤을 위로해 주려 아무 말이나 그럴듯하게 지어 말했다.
“그래. 턱도 없는 거짓말 하지 말고 차라리 욕을 해. 때로는 강력하게 표출할 줄도 알아야 속이 후련한 법이지.”
쿤이 더 변명해 봤자 글렀다고 생각했는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믿든 안 믿든 저는 진실만을 말했습니다.”
“응, 개새.”
쿤이 나를 원망스레 쳐다봤다.
어휴 무서워라.
나는 모르는 척 몇 개 남지 않은 슈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렇게 여섯 개의 슈 중 딱 하나의 슈밖에 남지 않았을 무렵. 쿤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리엔은 이곳에 왜 들어왔습니까? 동아리 실적이 필요했더라면 다른 거로도 채울 수 있었을 텐데요.”
대놓고 말은 하지 않지만, 요컨대 나는 왜 위험하게 들어왔냐는 물음이었다.
검술부인 피오르와 마법사인 카르시온은 언급하지 않는 걸 보면 뻔했다.
“혹시 카르시온이 같이 오기를 강요했습니까?”
“카르시온이 내게 뭔가를 강요할 거라고 생각해? 오히려 못 오게 하려는 거 내가 우겼어.”
“……의외로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으시군요.”
저거 철없다는 말이지……?
카르시온과 피오르에 이어 쿤까지 내가 마물을 잡지 못할 거라는 편견에 사로잡힌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전투 계열 학부라고 비전투 계열 학부를 무시하면 쓰나.”
그것도 독에 빠삭한 약초학부를.
나는 아까 꺼내 놨던 독침 케이스를 열었다.
딸깍하며 뚜껑이 열렸다. 케이스 안에는 수백 개의 침이 빽빽하게 들어 있었다.
나는 얇은 침 하나를 빼 들고 싱긋 웃었다.
“누구 톡 쏘는 짜릿함을 경험해 볼 사람?”
이 침에 발린 독은 순식간에 몸속으로 퍼져 일차적으로 온몸을 마비시키고 빠르면 십 분. 늦으면 삼십 분 내로 대상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사실 죽이는 것만이라면 더 빠르게 죽일 수 있는 독도 많았다.
하지만 이 독의 진정한 메리트는 순식간에 온몸을 마비시킨다는 것에 있었다.
아쉽게도 지원자는 없었다. 침에 극독이 발린 것을 알아챈 듯했다.
저런, 눈치도 빠르지. 부러 상큼한 어투로 말했는데.
“쫄기는.”
“리엔, 이제 집어넣자. 잘못해서 네가 찔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카르시온은 내가 침을 맨손으로 만졌을 때부터 좌불안석이었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나는 이 독에 내성이 있었다.
자주 쓰는 독의 내성을 기르는 건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물론 소량만 혈액에 섞여도 치명적인 극독이라, 내성이 있는 나도 제대로 찔리면 해독약을 먹어야 했다.
하지만 마비되기 전, 해독약을 먹을 시간은 충분히 벌 만큼의 내성이었다.
게다가 해독약은 비상시를 대비해 세 개나 가지고 다녔으니.
나는 걱정 많은 카르시온을 귀엽다는 듯 바라봤다.
그때, 불쑥 마음속에서 장난기가 피어올랐다.
“이만큼 짜릿한 독은 없을 텐데. 다들 거부하니 아쉽네. 그럼 아쉬운 대로 내 몸에 찔러 볼까?”
나는 금방이라도 침을 찌를 것처럼 고쳐 잡았다.
“리엔!”
쿤과 카르시온이 동시에 내 이름을 불러왔다. 하지만 내 장난기가 도졌다는 것을 눈치챈 피오르는 픽 웃을 뿐이었다.
“리엔. 너한테 속은 게 한두 번이야? 이미 들켰어. 장난 그만해.”
“……장난이었습니까?”
피오르의 말에, 내가 장난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가 찌르는 척만 할 거라 확신하는 모습을 보니 더욱 재미있어졌다.
“장난 아닌데.”
씩 웃고는 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여전히 장난이라고 확신하는 그들에게 보란 듯 그대로 내 팔목에 침을 박아 넣었다.
그들의 변화하는 표정이 생생했다.
……어.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 내 팔에 침을 박아 넣었으니 아픔이 느껴져야 하는데.
빠르게 마비가 진행되어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침을 꽂을 때만큼은 그 느낌이 전해져야만 했다.
나는 딱딱해진 움직임으로 침을 꽂은 위치를 확인했다.
아무것도 없어야 할 내 팔목 위에 누군가의 손이 얹어져 있었다.
내 팔에 꽂혔어야 할 침은 다른 이의 손바닥에 자리하고 있었다.
손바닥과 이어진 팔을 따라 주인을 확인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손의 주인이 다행이라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혀가 굳어 말이 나오지 않는 걸까. 그는 서투른 입 모양으로 제 말을 전해 왔다.
‘큰일 날 뻔했잖아, 리엔.’
너무 놀라면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다고 했던가.
나는 내 품으로 쓰러지는 카르시온을 멍하니 바라만 봤다.
간신히 손을 움직여 딱딱하게 굳은 그의 등허리에 손을 얹었을 때, 나는 간신히 사고 할 수 있었다.
“카르시온!!!”
장난의 대가는 컸다.
사고가 돌아온 뒤에는 그에게 해독약을 먹여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나는 가방을 일일이 뒤적일 새도 없이 거꾸로 뒤집어 내용물을 전부 꺼냈다.
긴박한 상황 때문일까. 어질러진 물건 속에서 해독약을 찾는 건 쉬웠다.
나는 해독약을 집어 들고는 바로 카르시온의 입속에 흘려 넣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해독약을 먹이고 난 후에도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카르시온에게 눈을 떼기 무서웠다. 나는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피오르에게 도움을 청했다.
“피오르, 해독약 좀 더 찾아서 가져다줘!”
내가 어떤 물약을 먹였는지 기억한 듯 그는 여러 물건 속에서 빠르게 해독약 두 개를 찾아왔다.
해독약은 하나면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카르시온의 입에 나머지 두 개의 해독약을 흘려보냈다.
해독약을 전부 카르시온에게 먹였을 때였다.
그 순간, 나는 잊고 있던 사실을 기억해 내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카르시온에게 먹인 해독약은 온전한 것이 아닌, 희석된 해독약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이 독에 대한 내성이 있다. 하지만 온전한 내성은 아니다.
나는 아직도 이 독에 대한 내성을 기르고 있었다.
때문에, 희석된 해독약을 만들었다. 내성을 기를 수 있도록 딱 죽지 않을 만큼만 해독하는.
……그것도 독에 대한 내성이 있는 내 기준으로 말이다.
* * *
나는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알지 못했다. 내가 지금 숨을 쉬고 있는지도 헷갈렸다.
1초가 1분으로 느껴질 만큼 느릿하게 시간이 흘렀다. 그와 반대로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짧은 사이에 무수한 생각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마물 서식지였고, 아카데미까지는 거리가 꽤 됐다.
기숙사에는 온전한 해독약을 만들기 위한 재료가 있었다.
그러나 해독약의 제조에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때까지 카르시온의 상태가 악화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카르시온을 사제에게 성력 치유를 받아야 했다.
“쿤! 정령의 힘을 사용해 카온을 아카데미로 옮길 수 있어?”
“저를 포함해 두 사람만 가능합니다.”
환자인 카르시온만 데려갈 수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괜찮았다.
나는 걸을 수 있으니 뛰어서 내려가면 된다. 성력으로 완전히 해독하지 못하더라도 시간은 충분히 벌어 줄 수 있을 테지.
“우리도 쫓아갈 테니까 카르시온을 사제에게 데려가! 어서!”
쿤이 바람의 정령을 소환했다.
둘은 정령의 힘으로 공중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을 새도 없이 산 밑으로 내달렸다.
뒤에서 벙찐 피오르가 급히 나를 쫓아왔다.
어쩌면 성력만으로도 독을 치유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최악의 가능성을 생각해야만 했다.
대형 마물도 단번에 마비시켜 버리는 극독을 사용했으니 사실 치유하지 못할 확률이 더 높았다.
그 생각에, 빠르게 움직이던 발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너무 서두른 탓에 몇 번이나 넘어지고, 뒹굴었다. 무릎에 피가 줄줄 흘렀지만, 마음이 급해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중간에 마주친 마물을 어떻게 죽였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산에서 내려온 나는 부술 듯 기숙사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제인은 내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랐을 텐데도, 긴박한 상황인 것을 금세 파악하고 침착하게 내가 해독약을 만드는 것을 도왔다.
해독약을 만들며 계량한 것을 섞을 때 몇 초간 짧게 다른 것을 생각할 시간이 났다.
우습게도, 숲에서 뒹군 더러운 신발을 신고 방 안으로 들어와서 방 안이 더럽혀졌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전제 조건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미 나는 맨발이었으니까.
언제 어디서 신발이 벗겨졌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해독약을 만들고, 나는 그 상태로 뛰어나가 카르시온이 있는 곳을 찾았다.
다행히 사제가 그 역할을 잘해 주고 있었는지 카르시온은 악화한 기색 없이 숨을 쉬고 있었다.
카르시온에게 직접 해독제를 먹인 후에야, 나는 숨을 쉬었다.
안도감에 눈물이 흘렀다.
* * *
번쩍.
병상에서 눈을 뜬 카르시온이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일으키고는 침대에 앉았다.
“살아 있네.”
잠시 멍을 때리던 그가 기지개를 쭉 켜며 몸을 풀었다.
움직임이 불편하지 않은 걸 보니, 몸도 정상인 듯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카르시온이 뭐라 작게 중얼거리자 그의 발밑으로 마법진 두 개가 생성됐다.
창문은 닫혀 있는데, 어딘가에서 바람이 이듯 그의 분홍색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중독 상태를 치유하는 큐어 포이즌(cure poison).
그리고 상처를 치료하는 회복 마법. 힐의 위 단계라고 할 수 있는 리스토레이션(restoration) 이었다.
그 외에도 자신의 몸에 각종 마법을 걸고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리엔 보고 싶다.”
습관성 리엔 타령이었다.
“……그때 분명 리엔은 독침에 닿지 않았었지?”
자신이 독침을 대신 맞았을 때의 리엔의 표정은 아직도 눈에 선명했다.
그나마 자신이 막아서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순식간에 몸이 굳는 느낌.
절대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사실 리엔이 독에 어느 정도 내성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하지만…….
‘알면서도 독침이 리엔의 몸에 꽂히는 건 보고 싶지 않았어.’
단 1%라도 그녀가 위험한 가능성이 있다면 제가 맞는 게 나았다.
리엔이 제게 장난치는 것은 뭐든 기쁘게 받아 줄 수 있지만, 이런 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장난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며 독침을 제 팔에 꽂으려 할 때는 얼마나 심장이 철렁했던가.
너무 놀라서 숨 쉬듯 사용하던 마법도 쓸 새가 없었다.
몸이라도 반응해서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그때 자신이 쓰러지고 일이 어떻게 됐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