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그래서?”
“……어?”
“설마, 내가 소문을 믿고 널 싫어하길 바라는 거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는 거 알잖아. 내가 어떻게 그런…….”
나를 보는 카르시온의 눈동자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렸다.
“카온. 네가 지금까지 어떤 일을 하고 다녔든, 좋은 사람이고 나쁜 사람이고는 내가 판단해.”
게다가 애초에 자신은 그의 성격이 착하기를 바란 적 없었다.
동아리도 그의 ‘착한’ 얼굴을 보고 들어온 것이지 않나.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예쁜 얼굴이 구겨지잖아.”
나도 너처럼 이기적이어서 말이야. 그런 사연 있는 표정, 허락 못 하겠거든.
* * *
분홍색 곱슬 머리카락을 곱게 위로 땋아 올린 여인이 깃펜을 쥔 채 뭔가를 끄적이고 있을 때였다.
방 한가운데에 마법진이 생성되더니 누군가가 떡하니 나타났다.
“어머니.”
“음?”
실비아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음성이 들려온 곳을 바라봤다.
카르시온을 눈에 담자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카온이구나. 내가 보고 싶어서 찾아온 건 아닐 테고. 어쩐 일로 찾아왔니?”
이곳은 아레나 아카데미의 이사장실.
카르시온이 아레나 아카데미의 이사장인 실비아를 찾아오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일전에 학생 무리를 퇴학시켜 달라는 부탁을 할 때가 처음으로 이사장실에 왔던 것일 정도로.
“아니다, 엄마가 맞춰 볼게. 네가 좋아한다는 아이 때문이지?”
제 아들이 저를 찾아올 만한 일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어떻게 아카데미에 있는 걸 딱 알고 찾아왔는지 모르겠네.”
기실 실비아가 학기 중 아카데미에 머무는 날은 며칠 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마저도 공처가…… 아니, 애처가인 공작이 독수공방하기 싫어서 매번 실비아가 퇴근할 시간이 되면 마법을 써서 그녀를 데리러 왔다.
무지막지한 마나가 필요한 공간 이동 마법을 써서 말이다.
마차가 아닌, 그런 무식한 방법을 쓴 것은 그녀를 빨리 집으로 데려가려는 것도 있었지만 하나 이유가 더 있었다.
그녀가 이사장이라는 것은 대외적으로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이사장임을 숨기는 데에 큰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고, 신분 언급을 금지하고 있는 아레나 아카데미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전통이었다.
실비아의 웃음기 가득한 눈빛이 카르시온을 훑었다. 그러자 카르시온이 의연한 얼굴로 그녀의 눈을 맞췄다.
그 얼굴에 실비아는 불안함이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눈매가 단숨에 의심으로 좁혀졌다.
“설마 아카데미 한 동 전체를 부숴 버린 건 아니지?”
이번 연도에는 이상할 정도로 사고를 안 치긴 했다.
잠잠하더니 크게 뭐 하나 터트리기라도 한 건가?
제 아들은 교실 하나를 없앴다고 사과를 구하러 올 사람이 아니었기에 이 정도 전제는 깔아야 했다.
“아니요.”
천만다행이었다.
실비아가 굳은 눈매를 풀며 카르시온을 바라봤다.
“그럼?”
“제가 독침을 맞아서 쓰러졌었는데요.”
“뭐!?”
카르시온이 아카데미 한 동 전체를 부쉈다고 가정할 때도 가만히 앉아 있던 실비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는 카르시온의 몸 구석구석을 살피며 안전을 확인했다.
“어디에서? 누가! 아니, 그것보다 지금은 괜찮은 거니?”
매번 사고만 치고, 공감 능력을 제 배 속에 놓고 나온 것 같은 모습에 가끔 경악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제 소중한 아들이었다.
실비아가 진심으로 당황한 모습을 보이자 카르시온이 차분히 그녀를 달랬다. 이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저는 멀쩡하니 진정하세요.”
카르시온이 실비아를 굳이 찾아온 이유는 이것이었다.
쓰러졌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놀라서 자신을 찾아올 게 뻔했기 때문에.
아레나 아카데미는 양호실에 간 기록을 무조건 집으로 보냈으니까. 분명 소식을 듣고 눈이 뒤집힌 채로 자신을 찾아왔을 거다.
그렇다. 카르시온이 실비아를 찾아온 이유는 그저 귀찮은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멀쩡하다는 말에 가슴을 쓸어내린 실비아가 이내 허리에 손을 얹고 훈계했다.
“그러게 원한 살 일은 하지 말았어야지, 카온.”
실비아는 카르시온이 가해자는 알아서 처리했을 거라고 생각해 따로 묻지 않았다.
“원한이 아니라…….”
카르시온은 사실을 말해 주려다가도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앞으로는 복수심 갖기 전에 처리할게요.”
“……그런 의도를 갖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실비아가 가만히 그를 노려봤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가 돌연 픽 웃었다.
“너는 너희 아빠를 너무 닮았어.”
“성격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돌려 말할 필요는 없는데요.”
“성격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닮은 것 같아서 하는 말이지.”
“……?”
카르시온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르자 실비아가 은근한 얼굴을 하며 물었다.
“네가 리엔이라는 아이를 좋아하고 있다는 소문. 진짜니? 그 애 앞에서 껌뻑 죽는다는 것도?”
카르시온은 이사장실에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답했다.
“다 알면서 물어보시는 거 알아요.”
실비아가 턱에 손을 괴며 자세를 바꿨다. 그녀만의 경청 모드였다.
“어떤 아이니?”
카르시온이 잠시 실비아를 바라보다가 탁한 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제가 다 말씀드릴 테니, 리엔의 뒷조사는 하지 마세요.”
“어머, 아들아. 그걸 당부하려면 너부터 하지 말았어야지.”
“어떤 일이든 아버지처럼 무력으로 해결하지 말고, 정보부터 털라 가르치신 건 어머니잖아요.”
말도 안 되는 궤변이었다. 기가 찬 실비아가 실소를 터트렸다.
“그건 족칠 인간이 있을 때 얘기였지. 연애가 아니라. 그런 식으로 했다가 언젠가 후회할 거야.”
“…….”
그녀의 웃는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카르시온이 붉은 입술을 열었다.
“리엔은…….”
* * *
“특히나 잠에서 막 깼을 때의 반쯤 풀린 비몽사몽한 눈동자는 한번 보면 잊을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럽죠. 잠시만요, 어머니. 지금 듣고 계신 거 맞나요?”
“으응. 그래 듣고 있어.”
실비아가 사뭇 지쳐 보이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리엔은……’으로 시작한 카르시온의 말은 몇십 분이 지나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카락 색부터 시작해, 길이, 앞머리의 유무는 물론이고 얼마나 찰랑거리는지, 얼마나 윤기가 흐르는지도 열변을 토해 가며 설명했다.
이러다가 머리카락의 개수까지 말해 줄 기세였다.
머리카락만 칭찬했으면 말을 안 한다. 이제 겨우 머리카락 부분의 칭찬을 끝내고 눈으로 부위가 바뀐 참이었다.
얼굴만 다 설명한다고 해도 하루는 너끈히 잡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리엔의 어떤 부분에 반했는지 기껏해야 몇 마디 정도 할 줄 알았던 실비아는 어안이 벙벙했다.
‘내 아들이 이렇게 말이 많은 줄 몰랐는데.’
게다가 리엔이라는 아이에 관해 설명하는 모습은 더없이 즐거워 보였다. 실비아는 카르시온의 표정에서 진심을 봤다.
이거 자신이 우려하던 상황이 도래한 듯했다.
카르시온의 목에 목줄을 채워 줄 사람이 생겼다는 건 다행이었다.
그동안은 카르시온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으니까.
그마저도 완벽하게 그를 제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제 경험을 미루어 보아 예상컨대, 리엔이라는 아이는 충분히 카르시온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그 여학생의 의지는 전혀 없다는 말이지.’
자신이 남편 얼굴 때문에 코 꿰였던 것을 생각하니 머리가 띵해졌다.
제 남편 레오니안 리시안셔스.
때는 자신과 그이의 아카데미 시절.
그의 얼굴을 처음 본 순간, 너무 제 취향이라 앞뒤 재 볼 거 없이 유혹하고 봤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성격이 개차반이지 않은가.
제가 이어받을 아카데미를 신나게 부수고 다니던 망나니가, 자신이 좋다고 유혹한 사람이었던 거다.
그 사실을 하필 남편이 제게 다 넘어왔을 때 눈치채서……!
밀어내려고 했을 때는 이미 그가 저에게 푹 빠져 버린 상태였다.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며 나를 죽도록 쫓아다녔지.’
그때 생각을 하니 착잡한 마음이 올라왔다.
물론 지금은 남편을 사랑하지만, 그 뭣 같은 성격을 포용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모른다.
자신도 냉담한 성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냉담이 아니라 인성이랄 게 없는 수준이었다.
실비아의 표정이 오묘해지자 카르시온이 눈썹을 쓱 올리며 덧붙였다.
“아, 참고로 리엔은 제 소문을 믿지 않는다고 했어요.”
“뭐……?”
헤실 웃는 카르시온과 반대로 그녀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그 소문을 듣고도 그런 말을? 일말의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고?
이거 뭔가 단단히 잘못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는 이미 카르시온의 얼굴이나 지위, 돈 따위를 보고 눈에 필터가 씐 게 분명했다.
세상에 누가 틈만 나면 남의 손목을 노리는 연쇄 손목마의 성격을 괜찮다고 한단 말인가.
그간 카르시온이 날린 다른 사람의 손목만 해도 세려면 열 손가락이 한참은 부족했다.
목을 날렸다던 남편보다는 낫다만. 어쨌든 둘 다 상식적인 행동은 아니지 않나.
아들의 연애사에 정말 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잘못된 길에 들어선 여학생을 위해서라도 언젠가 자신이 나서야 할 것 같았다.
‘아아, 리엔이라는 학생. 부디 제가 나서기 전에 올바른 선택을 하길 바라요.’
* * *
평소였으면 어제는 외출했으니 오늘은 쉬어야 한다며 기숙사에 틀어박혀 지냈을 남은 주말.
나는 카르시온의 문병을 가려고 준비한 참이었다.
카르시온의 체내 독은 모두 해독됐다. 하지만 내가 병상에서 하루 더 지켜보자고 의견을 냈다.
괜한 걱정인 건 알았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카르시온은 군말 없이 알겠다고 했고, 그 결과 오늘까지는 꼼짝없이 침대 위 신세를 지게 됐다.
때문에, 나는 귀한 주말을 뺏긴 카르시온이 심심하지 않도록 해 줄 의무가 있었다.
“도서관에 가서 카온이 좋아할 만한 마법 서적도 빌려 가야겠다.”
과일은 어떤 거로 사 갈까 할까 고민하며 문을 여는데. 기숙사 문 앞에 천으로 덮여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뭔가 싶어 허리를 굽혀 살며시 천을 들쳐 봤다.
천을 들어 올리자 온갖 약초들이 시야에 담겼다. 꽤 많은 양이었다.
멍한 얼굴로 약초 하나를 잡아 매만졌다.
그냥 약초가 아니었다.
내가 어제 두 번째 경계 안에서 눈물을 삼키며 지나쳤던 약초들이었다.
“이건 또 언제…….”
나는 오랫동안 자리에서 떠나지 못했다.
아주 오랫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