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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48)화 (48/161)

48화

다행히도, 낸시의 룸메이트는 금세 흥미가 떨어진 듯 침대에 걸터앉았다.

“근데 너 그거 알아? 내가 어디서 들었는데, 너희 반에 리엔이라고 있지.”

그녀의 입에서 ‘리엔’이 나오자 낸시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리엔이 놓고 간 걸 봤나?’

아니다. 그럴 리 없었다. 리엔은 정말 조용히 유리병을 놓고 갔고, 그녀가 기숙사 안으로 들어간 뒤에야 룸메이트가 나왔다.

‘그냥 또 소문을 물어왔나 보다.’

리엔은 아카데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 인사였다.

아레나 아카데미의 악명 높은 편입 시험을 가뿐히 통과한 것을 비롯해 그녀를 괴롭힌 귀족 5명이 퇴교당한 사건.

‘그’ 카르시온이 짝사랑한다고 소문 난 아이. 게다가 그 소문을 증명하듯 카르시온은 대놓고 리엔을 좋아하는 티를 냈다.

그뿐 아니었다.

아바스칸투스 제국의 황자인 쿤도 어느 날을 기점으로 갑자기 그녀를 쫄쫄 쫓아다니고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평민인 줄 알았던 리엔이 사실은 먼 왕국의 왕녀라는 이야기도 돌 정도였다.

거기에 하나 더.

“걔가 땀 억제제를 개발했대!”

“……리엔이?”

“응. 내 친구의 친구가 말해 줬는데, 어떤 남자애랑 걔랑 복도에서 땀 억제제 어쩌고 하는 걸 들었다나 봐. 남자애는 리엔이 하는 말을 듣고 흥분해서 ‘이건 대박 상품이 될 거다!’라며 소리쳤고.”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은 낸시가 기운 빠진 듯 한숨을 쉬었다.

“그걸 증거라고 가져온 거야? 나만 해도 오늘 친구랑 땀 억제제에 대해 말했는데, 그럼 나도 개발자겠다.”

“아니아니, 아직 내 말은 끝난 게 아니었어. 잘 들어 봐. 둘이 그 대화를 한 건 땀 억제제가 팔리기 전이었다나 봐!”

“뭐? 정말?”

그렇다면 리엔이 개발자라는 말의 신뢰도는 올라간다.

게다가 리엔이 정말 땀 억제제의 개발자라면 친분도 없는 자신에게 이렇게 귀한 것을 쉽게 줄 수 있었던 것도 아주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리엔에게 이 약 한 병이 얼마나 가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는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물건이었다.

자신이 다한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오늘 자신이 친구와 한 대화를 우연히 들은 걸까.

뭐가 됐든 리엔이 자신에게 땀 억제제를 줬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것도 이와 같은 선행을 몰래……!

‘진짜 멋있다.’

자신이었으면 온갖 생색은 다 냈을 것 같은데.

사실 낸시는 리엔을 처음 봤을 때, 굉장히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편입 시험을 통과하고 들어온 수재. 거기에 외모도 마치 인형같이 고왔다.

그러나 아무도 말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냉랭한 얼굴과 세상 모든 게 귀찮다는 눈빛.

그녀는 차마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때문에, 낸시 또한 다른 애들이 그랬듯 지금껏 리엔에게 말 한번 걸어 보지 못했다.

낸시의 반응이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룸메이트의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가 말을 이어 조잘거렸다.

“조금 웃긴 게, 아밀라 있잖아. 그 집안에 돈만 많은 애.”

낸시는 아밀라가 누구인지 생각해 보다 일전에 리엔과 급식실에서 싸운 아이라는 걸 기억해 냈다.

“갑자기 아밀라는 왜?”

“걔가 다음 학기에 리사동이라고 ‘리엔을 사모하는 동아리’를 만들겠다고 설치고 다닌다더라.”

“……그래?”

일순간 낸시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예쁘게 생겼으니까 나중에 그런 동아리가 생길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는데, 걔가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어. 둘이 그렇게 소리치고 싸우더니.”

낸시는 왜 아밀라가 갑자기 태도를 바꿨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동류를 발견했다는 기쁨 때문일까, 기분이 달뜨기 시작했다.

그런 낸시의 생각을 알아채지 못한 룸메이트가 이어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아밀라 걔, 심지어는 주니어 때 카사동이었던 것 같은데. 카르시온이 리엔을 좋아한다는 건 지나가던 개미도 아는 사실 아닌가? 진짜 무슨 일이래?”

“뭐, 더 매력 있는 사람으로 마음이 쏠리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상 아니겠어?”

그렇게 말하며 낸시가 싱긋 웃어 보였다.

* * *

“리엔, 요즘 네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거 알아?”

나는 영문 모를 표정이 되어 카르시온을 바라봤다. 그는 어쩐지 뚱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내가?”

“땀 억제제 만든 사람이 너라는 게 알려졌어.”

나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다들 알게 됐구나.

한스는 내가 개발했다는 게 알려지면 난리가 날 거라고 했는데. 딱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근데 내가 그걸 개발한 거랑 인기랑 무슨 관련이 있는데?”

“땀 억제제로 효과를 본 애들이 널 찬양하고 다니더라고. 그거 말고도 리엔 네가 평소에 여기저기 기생충 같은…… 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애들에게 선행을 베푼 게 소문이 나서.”

카르시온의 시선이 피오르와 동아리실 한쪽에 뻔뻔히 앉아 있는 쿤에게 향했다.

“우리 동아리실만 해도 그래. 다 널 보려고 온 사람들이잖아.”

“쿤은 몰라도 나는 동아리 활동하러 왔을 뿐인데.”

피오르가 한쪽 손을 들며 카르시온의 말에 대꾸했다. 그러나 카르시온은 피오르에게 시선 한 톨 주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다른 사람들이 널 좋아하는 게 좋으면서도 싫어.”

일자로 굳게 다물린 입술. 이글거리는 눈동자. 나는 홀린 듯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내가 카르시온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은 이후로 우리 사이에서 달라진 건 없었다.

단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그의 얼굴, 표정, 몸짓이 두 배는 더 귀여워 보였다는 것 정도.

……중증이네.

나는 몇 초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눈을 뗄 수 있었다.

“별……거 아닌 일에 질투하지 말라니까. 그리고 쿤.”

이름이 불린 쿤이 입가에 작게 미소를 걸치며 나를 바라봤다.

“네, 리엔.”

“분명 이제 너에게 시킬 건 없다고 하지 않았어? 땀 억제제는 당분간 만들지 않을 생각이야.”

“은혜를 다 갚기 전까지는 안 됩니다. 저와 약속한 기간도 제 다한증이 나을 때까지 아니었습니까.”

“거의 다 나았잖아.”

“아직 환자입니다.”

쿤은 꿋꿋했고,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와 반대로 나는 곤혹스러웠다.

필요 없다는데 들러붙는 건 은혜를 갚는 게 아니라 민폐 아닌가.

대체 어느 나라에서 배워 온 거지 같은 은혜 갚기 방식일까.

……아바스칸투스구나.

이 생각은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말고 조용히 묻어 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카르시온이 미간에 아까보다 더 깊은 골을 만들며 앞으로 나섰다.

“리엔이 너 같은 이산화탄소 제조기는 필요 없다잖아.”

“살아 숨 쉬는 생명이라면 누구나 숨을 쉽니다. 당연한 이치이죠.”

“그걸 누가 몰라. 너에게 가는 공기가 아깝다는 뜻이었어.”

“애먼 일에 시비 걸지 마시고 이제 저희 일에 끼어들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저희?”

카르시온은 그와 계속 대거리를 하는 대신, 쿤의 손목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언제 어떻게 잘라야 쥐도 새도 모르게 쓱싹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이제 카르시온이 내 앞에서 꽤나 내숭을 부리고 있었다는 걸 아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쿤의 사라진 손목 건으로 아바스칸투스와 라그라스 사이에 분란이 생기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심지어 쿤이 아레나 아카데미로 온 것도 두 제국의 평화 협정 20주년을 기념한 것 아니었나.

벌컥.

그때 누군가 갑자기 동아리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리엔!”

동아리실을 찾은 이는 환한 웃음을 머금은 한스였다.

“흐응. 다들 이제 여기가 공공장소인 줄 아는 모양이야.”

카르시온이 비릿하게 웃으며 중얼거리자 한스가 흠칫하며 원래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문을 닫았다.

“하하, 그럼 난 이만…….”

나는 잽싸게 문 사이에 발을 끼워 넣었다.

“어딜 가?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야?”

한스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카르시온을 곁눈질했다.

그 모습에 어디서 많이 본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저번에 조별 과제 때문에 날 찾아온 조원도 무언가를 보고 바지로 바닥을 닦으며 뒤로 도망쳤지.

카르시온의 성격이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착한 건 아니라는 걸 알고 나니 상황 파악이 쉬웠다.

그때도 카르시온 때문이었구나.

혹시 전에 도서관에 갔을 때 다들 열심히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이유도……?

에이 그건 너무 갔다.

나는 비약하지 않기로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눈치 보지 말고 들어와. 말은 저렇게 해도 카온이 널 해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지?”

카르시온을 힐끔 바라보자 그가 다정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한스를 바라볼 때와 확연한 온도 차이가 드러나는 웃음이었다.

“그럼. 내가 아무리 막 나간다고 해도 리엔 너의 앞에서 피를 뿌릴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대답에 함정이 있는 것 같았다.

내 앞에서는……? 그럼 뒤에서는 피를 뿌릴 수도 있다는 거 아닌가.

아무래도 과거의 내가 카르시온에게 말을 잘못한 것 같다.

좋은 사람이고 나쁜 사람이고는 내가 판단한다고 했나.

그때는 카르시온에 대한 죄책감과 더불어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갑작스러운 감정 자각 때문에 정상적인 사고를 못 했나 보다.

……이럴 거면 차라리 모르는 채로 있었던 게 나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내가 뱉었던 말을 정정하는 대신 작은 안전장치를 만들어 두기로 했다.

“난 착한 남자가 좋더라.”

다소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시선이 내게 몰렸다.

“누구 들으라고 하는 얘기는 아니고. 뭐, 그냥 그렇다고.”

“…….”

“명심하겠습니다.”

뭔가에 찔린 듯 얼굴을 굳힌 카르시온과 다르게 쿤은 작은 수첩을 꺼내 들고는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착……한 남자, 선…… 호.”

“그걸 왜 적고 있는 건데?”

어이없어진 내가 속에 있던 말을 내뱉자 쿤이 태연히 받아쳤다.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왜 잊지 않으려는 건데?”

“……은혜를 갚으려면 필요해서?”

쿤이 흐려진 목소리로 한 박자 늦게 대답할 때였다.

화륵.

순식간에 쿤의 수첩을 재로 만들어 버린 카르시온이 눈을 반달로 접으며 웃었다.

“미안, 실수.”

미안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때 나와 눈을 마주친 카르시온이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내 눈치를 보던 그가 잠시 후 아공간을 소환해 냈다.

아공간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 쿤에게 던지는 카르시온. 방금 태워 버린 것과 유사하게 생긴 작은 수첩이었다.

“전 수첩에 무슨 내용이 쓰여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받아.”

“……전 수첩도 새거나 다름없었으니 괘념치 않습니다.”

카르시온이 뒤늦게 자신의 행동을 수습하고 쿤은 사과를 받았다. 그렇게 빠르게 사태가 종료되는 듯싶었는데…….

쿤이 새로 받은 수첩에 다시 무언가를 끄적였다. 아까 적었던 말을 다시 쓰는 듯했다.

화륵.

“미안, 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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