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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49)화 (49/161)

49화

쿤의 가라앉은 보랏빛 눈이 카르시온을 응시했다.

“싸우자는 겁니까?”

“실수였다니까.”

“거짓말을 하려거든 좀 더 성의 있게 해 보시죠.”

“네가 이상한 걸 수첩에 적으려고 하니까 내 마나가 요동치네. 나한테 사특한 주술이라도 건 거야?”

“제 탓이라는 겁니까?”

“그럼 아닌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싸움이었다.

나는 카르시온의 반응에 조금 심각해졌다.

착한 남자 이상형 작전은 생각보다 안 먹히는 것 같았다. 나름 수를 썼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강경 대응이 답인 걸까.

나는 그들을 내버려 두고 병풍처럼 문 앞에 서 있는 한스를 살짝 밀어냈다. 그러고는 동아리실을 나와 멀거니 서 있는 카르시온을 응시하며 입을 뗐다.

“밷 카온.”

쿵.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더 싸우지는 않겠지.

비로소 방해꾼을 제거한 나는 한스를 데리고 사람이 없는 빈 교실을 찾았다.

“그래서 나는 왜 찾은 건데?”

한스가 쭈뼛쭈뼛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렇게 뜸 들일 일이 뭐가 있나 싶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뭔가 머리에 스쳤다.

“사재기 건에 대해 할 말이 있는 거야?”

“아, 아니 그건 아니야. 네가 허락해 준 덕분에 쏠쏠하게 벌고 있어.”

한스는 주머니에서 검은 복면을 꺼내며 쓱 써 보였다.

“어때? 나는 이 복면만 쓰면 자신감이 차오르더라.”

“……이야, 축하해. 적성을 찾았나 보다.”

“하핫. 농담도!”

“농담 아닌데.”

복면을 쓰면 자신감이 차오른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는지 한스가 한결 편해진 음색으로 말문을 열었다.

“사실 너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서.”

“제안?”

“네가 당분간 땀 억제제를 만들지 않겠다고 했잖아. 재고해 볼 생각은 없는 거야?”

“글쎄…….”

“지금이 최고로 인기가 많을 때인데, 이렇게 기회를 놓치기는 너무 아깝잖아. 응?”

한스가 애원조로 말을 해 왔지만, 딱히 구미가 당기진 않았다.

처음 땀 억제제를 팔려 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재정난을 겪는 중인 한스네 상단을 도와주기 위해. 그리고 내가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독립하기 위해 자금을 모으기 위해.

그의 상단은 내 땀 억제제의 유통을 시작한 이후 빠르게 정상을 찾았다.

오히려 거래를 트려는 곳이 많아져 더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 정도면 도와줄 만큼은 도와줬다고 생각했다.

땀 억제제로 내가 받을 돈은…….정산받지 않아서 어느 정도인지 아직 모른다.

처음에는 돈을 벌어야 독립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급하게 굴었다.

그런데 나중에 곰곰이 다시 생각해 보니 아직 졸업하기까지는 많이 남았다.

내게 다양한 레시피가 있는 만큼, 돈을 모으려 서두를 필요는 없다는 거다.

그러자 한스가 목소리에 톤을 깔며 진중히 말했다.

“리엔. 넌 이미 땀 억제제의 주요 원료가 다오 트란토라는 걸 내게 말했어.”

“그래서?”

“네가 내 제안을 거부하면 우리 상단에서 따로 연구해서 출시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야.”

“해.”

간결한 대답에 복면 밖으로 드러난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런 대답을 할 줄 몰랐겠지.

말은 저렇게 해도 내가 아는 한스라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그가 왜 마음에도 없는 협박을 늘어놓는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만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겠지.

하지만…….

내게 땀 억제제 레시피 정도는 귀하지 않은 정보가 맞다. 그래서 대놓고 어떤 약초가 주요 원료인지 알려 줬던 것이고.

고작 대여섯 살 때 만들었던 레시피다.

연금술을 가미한다면 땀 억제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도 수없이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지금껏 내가 마음을 굳게 먹고 만들고자 했을 때 만들지 못한 것은…….

부모님의 병을 고치는 약뿐.

다른 사람이 내가 만든 것으로 돈을 번다면 괘씸하기야 하겠지만, 그뿐이었다.

게다가 약초학의 발전을 위해서 어느 정도의 공개는 필수 불가결하다고 생각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는지 한스가 돌연 외쳤다.

“로지스틱스!”

“……?”

처음 들어 보는 단어에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고 그를 바라봤다.

“네 땀 억제제, 우리 상단의 로지스틱스를 이용하는 건 어때?”

“그게…….”

뭔데 이 자식아.

너만 아는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한스는 구겨진 내 얼굴을 보고는 호기롭게 입을 열어 설명하기 시작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원자재의 조달 및 생산. 상품이 소비자에게 이르기까지 최대한 효율적으로 흐르도록 계획, 실시하는 것을 말해.”

한스가 잠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을 올려 자신을 가리켰다.

“우리 상단이 해 줄게, 그거.”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눈을 도르륵 굴리며 생각했다.

저게 본론이었구나.

“다른 상단이었으면 레시피를 팔라고 했겠지. 하지만 우리 상단은 네 레시피만 공유해 준다면 수익에 일부를 분배해 줄게.”

“……음.”

“내 이름을 걸고 비밀 유지와 후한 배분율을 약속해. 자재 조달 및 제조, 상품 판매까지 우리가 할게. 너는 그냥 앉아만 있어도 돈이 들어오는 거야.”

한스가 엄지와 검지로 원 모양을 만들어 냈다.

“어때, 끌리지 않아?”

나는 주저했다.

한스에게 레시피를 알려 주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돈을 쉽게 벌어도 되는 건가 싶어서.

이런 내 생각을 눈치챈 듯 한스가 비밀스럽게 내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내게 떨어질 예상 수익이었다.

나는 주저했던 표정을 지워내고는 방긋 웃었다.

“그래서 계약서랑 인장은 가져왔니?”

* * *

한편.

남정네 셋이 덩그러니 남아 버린 동아리실 안.

“하아. 밷 카온이라니, 발음마저도 어쩜 저렇게 귀여운지.”

카르시온은 의외로 리엔이 생각한 것만큼 타격받지는 않았다.

그녀의 이상형에 맞춰 최대한 얌전하게 굴고 있던 건 사실이다만.

제 성격이 나쁜 건 사실이지 않은가? ‘밷 카온’이라 말한 것도 진심이 담겨 있기보다는 싸움을 말리려고 한 말인 게 선했다.

단어 선택에 만족스러워했을 리엔을 생각하니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 같았다.

‘맙소사. 이 세상 귀여움이 아니잖아……!’

그런 리엔의 빤한 수작에 당해 주는 것도 제겐 기꺼운 일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여유로운 마음마저 들었다.

무엇보다 리엔 앞에서 쿤이 개수작을 부리고 있는데 가만히 있는 건 너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질투라는 명목으로 사소하게나마 시비라도 걸어야지.

카르시온의 시야에 쿤이 닿자 그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

“은혜를 갚는 거라고 했지.”

카르시온의 목소리에 쿤이 그를 돌아봤다. 둘의 눈이 첨예하게 맞부딪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에게 시선을 뗀 카르시온이 소파에 앉아 긴 다리를 꼬았다. 그러고는 느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넌 그저 일시적 노예 새끼일 뿐이잖아. 네 위치를 명심해 줬으면 하는데……. 요즘 리엔과 그 이상의 관계를 세우려 하는 것 같아서 기분 더럽거든.”

제국의 황자를 노예 취급하다니. 카르시온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가 말했기에 오히려 피오르와 쿤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당신이 끼어들 문제가…….”

아닙니다. 라고 말을 하려 했던 쿤이 말을 뚝 하고 멈췄다.

자신을 바라보는 카르시온의 눈동자가 달라져 있었다.

그와 눈싸움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자신이 동아리실에 드나든 이후로 수없이 마주한 눈동자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무언가 달랐다.

분명 입가에는 웃음이 걸쳐 있건만. 아니, 어쩌면 그것 때문에 더욱 이질감이 드는 듯했다.

평온해 보이는 눈동자에서 언뜻언뜻 느껴지는 광기. 오싹함이 밀려들어 왔다.

그는 자신의 신분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정말, 정말로…….

마음만 먹는다면 일말의 망설임 없이 저를 죽여 버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단 저의 죽음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제국과 제국의 싸움으로 번질 수 있는 일인데도 말이다.

카르시온은 진심으로 미친놈이었다. 어쩌면 소문보다 더.

* * *

“리엔!”

한스는 달려오느라 숨이 찼는지 내 앞에 도착한 후 가쁘게 숨을 내쉬기 바빴다.

나는 그런 한스를 짧게 타박했다.

“늦었네.”

“헤헤 미안. 편지 작성이 좀 늦어져서.”

“그렇게 쓸 게 많았어? 나는 그냥 대충 생각나는 대로 썼는데.”

아레나 아카데미에서는 1학년을 마무리할 때 편지를 한 장 쓰고 제출했다.

그리고 그 편지는 졸업할 때 다시 본인에게 돌려줬다. 즉, 미래의 자신에게 주는 편지인 셈이다.

한스는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졸업 후에 볼 수 있는 거잖아. 지금 우리 상단의 자본 규모와 미래 예상 성장률을 계산하고 적어 냈어. 과연 내 예측이 맞을지 궁금하다.”

……와우.

“오래 걸릴 만했네.”

“그것보다 리엔. 진짜 이걸로 제출할 거야?”

한스가 내 손에 들린 보고서와 약병을 보며 불안한 눈빛을 했다.

“왜? 뭐가 문제인 건데?”

다 만들고 제출하러 가는 마당에 저런 마뜩잖다는 표정이라니.

“실용성이 없잖아.”

“……이게 실용성이 없다고? 모고동에 가서 물어봐라, 이게 정말 실용성이 없는지.”

“모고동 애들이야 당연히 좋아하겠지. 그건 모기 기피제니까.”

내가 지금 손에 든 모기 기피제는 일전에 조지 교수님께서 내주신 조별 과제의 결과물이었다.

사실 약의 개발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을 거쳤다.

하지만 한스도 내가 필요로 하는 약초의 수급과 보고서를 맡아 썼으니 충분히 일 인분을 했다.

오히려 이렇게 진행하는 게 내 입장에서는 훨씬 편했다.

그러나 나 홀로 만들어 낸 것이라 그럴까, 아니면 땀 억제제 같은 장사하기 좋은 약이 아니라 실망했던 걸까.

한스는 약에 대한 애정도가 떨어지는 듯했다.

“이게 얼마나 혁명적인 건데 그래. 심지어 재료도 굉장히 저렴하고 만들기도 쉽다고.”

“그걸 쓰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게 문제지.”

교수님이 꼭 실용성 있는 약을 만들어 오라고 하시진 않았는데.

역시 팔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실망이었나 보다.

나는 걸음을 뚝 멈추고 모기 기피제 존재 의의에 관해 설명했다.

“한스, 장사 아치처럼만 굴지 말고 넓게 봐봐. 마물 기피제도 있는 세상에 모기 기피제가 없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그 잘못된 걸 바로잡으려는 거라고.”

내 진지한 어조에 한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너 정말 모기 혐오에 진심이구나?”

나는 빵 터진 한스를 멀거니 바라봤다.

어디가 웃긴 부분인지 모르겠다.

모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찾는 게 더 어려운 거 아닌가?

웃음이 그쳐 갈 때 즈음. 나는 차분히 입을 열어 한스의 평안한 잠자리를 빌어 줬다.

“자려는데 귓가에 끝도 없이 윙윙거리는 모기 때문에 신경 쓰이길. 무시하고 잠을 청하려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일어났는데 모기는 이미 자취를 감춘 상태이길. 긴 사투 끝에 겨우 모기는 잡았지만 이미 네 피는 몇 번이나 착취당한 상태였고, 압사당해 터진 모기에게서 나온 네 피가 벽지에 물들길. 이후 빡치는 마음을 다스리고 다시 잠을 청했는데 숨어 있던 한 마리가 또 나타나 2차전이 시작되길. 그렇게 끝없는 굴레에 빠져 모기와 함께 영원하길 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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