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조지 교수님의 연구실에 도착한 나는 노크를 하려다가 문틈에 끼어 있는 쪽지를 발견했다.
<잠시 볼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우니 먼저 안에 들어가 있거라.>
기다리고 계셨나 보다.
까먹고 내일 왔으면 큰일 날 뻔했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연구실 문을 열었다. 연구실 안은 생각보다 훈훈했다.
미리 온도를 올려놓으신 건가?
……그 팍팍한 조지 교수님이 그러실 리 없지.
말도 안 되는 망상을 흩어내려 고개를 털어 내듯 저었다. 그러고는 눈을 빛내며 연구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조지 교수님의 연구실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만, 매번 교수님과 함께였기에 대놓고 구경해 본 적은 없었다.
책상 위에 어지러이 널브러져 있는 약초들. 정돈된 듯 정돈되어 있지 않은 주변 물건까지.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인데……?”
백작가에 있는 내 전용 약초 연구실과 흡사한 풍경이었다.
조지 교수님에 대한 내적 친밀도가 0.1만큼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약초들을 보관해 놓은 서랍장도 벽면에 무수히 많았다. 궁금하긴 했지만 건드리지는 않았다.
눈에 보이는 거야 어쩔 수 없다 해도 서랍장까지 뒤지는 건 아니지 않나.
그렇게 연구실을 둘러보고 있을 때 내 시야에 뭔가가 들어왔다.
조지 교수님의 외알 안경이었다.
“아…….”
나는 순간 강렬한 고민과 충동에 휩싸였다. 양쪽에서 천사와 악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안 돼, 리엔.
조지 교수님께 그걸 하다가 들키면 무슨 면목으로 얼굴을 마주하려고 그래? 못 본 척해!
아니야, 해 버려.
조지 교수가 네가 했는지 어떻게 알아? 안다 하더라도 심증만 있지, 증거 있어? 저 안경을 봐. 탐스럽지 않아? 이대로 참으면 자기 전에 계속 아른거릴걸?
나는 양쪽의 의견을 들으며 선택을 저울질해 봤다.
결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악마의 압승. 이건 내가 참으려야 참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결정을 내리자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고민 없이 손을 뻗어 외알 안경을 집었다.
그러고는…….
안경에 열심히 지문을 묻히기 시작했다.
아아. 너무 즐겁다. 역시 저지르길 잘했어.
아무것도 모르고 안경을 썼을 때 당황할 조지 교수님을 생각하니 쌓여왔던 감정들이 씻은 듯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이건 조별 과제를 밥 먹듯 낸 죄!
이건 나를 시험하듯 별별 약초를 가져와서 효능을 물어본 죄!
마지막으로 이건 자꾸 졸업하고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고 꾄 죄!
음침한 웃음을 지으며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저런. 그런 건 손에 기름을 잔뜩 묻히고 해야지.”
갑자기 뒤쪽에서 들려온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나는 그 상태 그대로 쩍 얼어붙고 말았다.
발걸음 소리는커녕, 문 열리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이제 나는 조지 교수님의 차디찬 눈초리를 받게 되는 건가……?
그 어색한 분위기를 어쩌면 좋지? 이걸 빌미로 졸업 후 밑에서 일하라고 하면?
머릿속으로 오만 상상을 하는 와중, 나는 뭔가를 깨닫고 희망을 붙들었다.
잘 생각해 보면 저 사람은 나를 말리는 게 아니라 손에 기름을 묻히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그러고 보니 이 목소리.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였다.
다정한 듯 엄격한, 듣고 있으면 졸음이 몰려오는 나긋나긋한 목소리.
설마……!
나는 고개를 홱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돌려 음성이 들려온 곳을 바라봤다.
역시나 그 사람이 맞았다.
“아칸더스!”
내 얼굴을 마주한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멍한 눈빛.
“리……엔?”
“네! 저 맞아요, 리엔!”
놀라운 마음도 잠시, 반가운 얼굴에 웃음이 나왔다.
살짝 내려간 눈매에 언뜻 보면 금발로 느껴질 만큼의 옅은 갈색 머리카락.
나이가 조금 들어 보인다는 것을 제외하면 기억 속의 그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오랜만이에요. 그때는 젊은 청년이셨는데, 이제 아저씨가 다 됐네요.”
“……미안. 미안해, 리엔. 너무 많이 자라서 한 번에 못 알아봤어. 아니, 그렇게 작았던 애가 벌써 이렇게 자랐다고?”
아칸더스는 쩍 벌어진 자신의 입을 가렸다. 나를 보는 그의 눈에는 놀람과 애틋함이 담겨 있었다.
“못 알아볼 만하죠. 저는 한창 성장기이고, 아칸더스와 못 본 지 5년이 넘었으니까요.”
그는 나에게 연금술을 가르쳐 줬던 스승님이다.
비록 엄마에게 돈을 받고 할 일을 했을 뿐이었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병에 걸렸을 당시 치료제 연구를 도와주고,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내 등을 토닥여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이런 곳에서 너를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아칸더스가 먹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저도…….”
깜짝 놀랐다고 말하려다가 나는 아칸더스와 헤어졌을 때를 떠올리고는 사과부터 건넸다.
그와 헤어지고 난 후 줄곧 마음에 걸렸던 일이었다.
“그때는 정말 죄송했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거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당시.
장례식을 치르고 이모네 집에 내 몸을 의탁할 때, 그에게 제대로 된 감사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헤어졌었다.
아칸더스가 다정하게 웃으며 내 등을 토닥였다.
“나도 어렸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그 마음 잘 알아. 슬펐겠지. 충격적이었겠지. 죽음을 예견했음에도 받아들이는 건 다른 일이니까.”
“아칸더스…….”
“나야말로 그때 같이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 남인 나보다 가족 품에서 위로를 받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지만.”
나는 그의 사과에 얼굴을 굳히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아칸더스가 제게 사과할 일은 없어요.”
“하하, 알았어.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런 표정 짓지 마.”
아칸더스가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의자를 빼 와 앉았다.
“다시 만나니까 좋다. 그동안은 잘 지냈어?”
“……뭐, 살아 있으면 된 거겠죠.”
“무슨 일 있었구나.”
그는 단박에 내 말의 진짜 뜻을 파악한 듯 표정을 굳혔다. 나는 시선을 돌리며 변명했다.
“그래도 지금은 살 만해요. 아칸더스는요? 저랑 헤어지고 마을을 떠나신 것 같던데.”
아칸더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먹고살려면 다른 일을 찾아야 했으니까. 약 못 만드는 연금술사를 고용하는 분이 너희 어머니 말고 또 있겠어?”
“아…….”
아칸더스는 연금술의 천재였다. 지식으로는 그를 따라올 자가 없을 거라 엄마가 단언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칸더스는 연금술사로서 치명적인 결점을 갖고 있었다.
연금술은 마나를 기초로 한다는 점에서 마법과 유사한 학문이다.
그런데 그의 체내 마나는 아주 미약했고, 뭔가를 만들어 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아칸더스. 그때 드리지 못한 임금 지금이라도 갚아도 될까요?”
부모님의 병을 고치려 모든 돈을 소진하고, 나는 그를 해고했다.
임금을 지불할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해고당한 이후에도 내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내 곁을 지켜 주었다.
아칸더스는 내게 은인이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지극히 그다운 반응이었다.
“돈을 바란 건 아니었어. 그리고 어린 네게 돈을 요구할 만큼 없이 살진 않는걸.”
“하지만…….”
내가 말을 흐리자 그가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웃었다.
“너 때문에 남았다고 생각하나 본데, 나도 네 생각 이상으로 너희 부모님들께 받은 게 많아. 그 정도는 당연한 예의였다고 생각해.”
더 제안해 봤자 거절할 거라는 판단을 한 나는, 처음 봤을 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아칸더스가 어떻게 조지 교수님 연구실에…….”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조지 교수님이 연구실로 들어왔다. 우리는 대화를 멈추고 조지 교수님을 바라봤다.
“둘 다 도착해 있었군.”
“교수님께서 불러 놓고 너무 늦으신 거 아닙니까?”
아칸더스가 불퉁한 얼굴로 따지자 조지 교수님이 피곤하다는 듯 미간을 꾹 눌러 짚었다.
“너를 꼭 봐야겠다는 못난 제자가 있어서.”
“네?”
그의 당황 섞인 대답 이후, 조지 교수님의 뒤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월터.”
월터 교수님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맴도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나는 무슨 일인지 몰라 가만히 상황을 지켜봤다.
그 순간 아칸더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월터 교수님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 아칸더스의 손목을 월터 교수님이 잡아챘다.
“바ㄹ…….”
“이거 놔!”
노기가 담긴 목소리가 조용했던 연구실을 울렸다.
월터 교수님을 바라보는 아칸더스의 눈동자에는 깊은 혐오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한 월터 교수님의 손에 힘이 스르르 풀렸다.
아칸더스는 기다렸다는 듯 그대로 연구실을 벗어났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월터 교수님은 허망해 보였다.
아칸더스가 나간 문을 멍하니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가 힘을 풀기를 반복했다.
그의 귀찮음이 묻어 나오는 표정, 찡그린 표정은 자주 봐 왔다. 월터 교수님만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저런 얼굴의 교수님은 처음 봤다.
“제가 물어봐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두 분 사이에 무슨 일 있으셨어요?”
조심스럽게 둘 사이의 일을 묻자 월터 교수님이 마른세수를 했다.
“몰라.”
“아…….”
역시 이런 일은 조용히 모르는 척해야 했었나 보다. 나는 잠시 눈치를 보다가 사과를 건넸다.
“두 분 사이의 일을 여쭈어봐서 죄송해요.”
“아니, 알려 주기 싫은 게 아니라 진짜 모른다고.”
“네?”
그의 복잡함으로 일그러진 얼굴에서 언뜻 상처가 느껴졌다.
“저 녀석은 나랑 주니어 1학년 때부터 쭉 친구였어. 가족 같은 사이였지. 그런데 어느 날을 기점으로…….”
조지 교수님이 혀를 끌끌 차며 월터 교수님을 질책했다.
“네가 뭘 했는지 잘 생각해 봐라. 저 녀석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저렇게 반응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너도 알지 않나.”
“처음에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죠. 제가 무슨 짓을 했을 거라고. 그런데 끝까지 원인을 알려 주지 않더군요. 저랑 대화할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아요.”
“싸우려면 너희 둘이 싸우지 왜 귀한 내 손님을 쫓아?”
“저도 일방적으로 당한 겁니다. 저라고 상황을 이렇게 만들고 싶었겠어요?”
두 교수님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나는 이번에는 조지 교수님께 여쭈어봤다.
“조지 교수님은 아칸더스와 어떻게 아는 사이신데요?”
“아칸더스?”
조지 교수님은 무슨 말이냐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그에 옆에 있던 월터 교수님이 툭 던지듯 말했다.
“연금술사가 가명을 쓰는 건 흔한 일이죠.”
“……그 녀석을 말하는 거군.”
나는 귀를 의심했다.
저 말은 아칸더스가 본명이 아니라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