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의문을 깊게 생각해 볼 새도 없이 조지 교수님이 말을 이었다.
“그 녀석과 월터는 내 제자였다. 어찌나 질긴 인연인지 시니어 4년 내내 둘의 담임을 맡았지.”
“정말요?”
아칸더스는 그렇다 쳐도, 월터 교수님이 한때는 조지 교수님의 학생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월터 교수님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뭐 바로 교수가 된 줄 알아? 당연히 학생이었던 시절이 있었어.”
“안 어울려요.”
“지지리도 말을 안 들었지. 사실 지금도 별다르진 않지만.”
조지 교수님이 과거 이야기를 꺼내자 월터 교수님이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큼큼. 그보다 너야말로 문밖까지 대화 소리가 들리던데, 혹시 아칸…… 더스와 아는 사이냐?”
“네. 아칸더스는 제가 어렸을 때 연금술을 가르쳐 주신 분이세요.”
“……호오. 좋은 스승을 만났었구나.”
조지 교수님이 턱을 매만지며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수업 시간 중 그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을 때 나오는 부담스러운 눈빛이었다.
“약초학에 연금술을 접목하면 무궁무진한 것들을 만들 수 있지. 나 또한 연구에 도움을 받으려 그 아이를 불렀던 게야.”
그래서 아칸더스가 조지 교수님의 연구실에 있었구나.
월터 교수님은 아칸더스가 조지 교수님의 연수실에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거고.
하지만 두 분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당사자도 모르는 일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
조금 의아했던 건, 내가 아는 아칸더스는 어지간한 일로는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거다.
나는 혼자 상념에 잠겨 있다가 강렬한 시선을 느끼고 정신을 차렸다. 시선의 출처는 조지 교수님이었다.
“약초학 지식도 상당한데, 그 아이 밑에서 연금술을 배웠었다니. 더 탐이 나는군.”
그 표정과 말투에서 나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예감했다.
젠장. 그냥 과거에 인연이 있었다. 정도로만 말했어야 했는데.
“그래서 저를 부르신 이유는 뭔가요, 교수님.”
그 눈빛은 넣어 두고 본론을 꺼내 달라는 무언의 압박에, 조지 교수님이 인자하게 웃었다.
잠시만.
……인자? 조지 교수님이 인자?
“지난 여름 방학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들었다. 맞나?”
짙은 불안감이 피어오르는 느낌에 말투가 자동으로 소심해졌다.
“네에, 그런데요……?”
“혹시 이번 방학에도 집으로 내려가지 않을 예정이라면 나와 같이 연구……”
나는 더없이 환하게 웃으며 조지 교수님의 말이 다 끝맺기도 전에 답했다.
“죄송해요. 이번 방학에는 돌아가기로 했거든요.”
몇 주간 백작가로 가는가 마는가에 대해 고민했던 것이 단번에 확정 지어지는 순간이었다.
* * *
“어휴. 큰일 날 뻔했네.”
조지 교수님의 연구실을 나온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백작가에 가지 않겠다는 다짐은 한 시간도 안 되어 번복되었으나 후회는 없었다.
이대로 교수님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는 백작가에 다녀오는 게 낫겠지.
다른 곳에 가고 싶어도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내게는 아카데미와 백작가, 두 개의 선택지밖에 없었으니까.
오랜만에 백작가의 식구들을 보고 싶기도 했었으니 잘된 거라면 잘된 일이겠지.
되도록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며 복도의 코너를 돌고 있을 때였다.
벽에 등을 지고 서 있던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아 왔다.
“아칸더스……?”
“리엔.”
아칸더스의 얼굴에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공포? 불안감? 울분? 애환?
모든 것이 뒤엉켜 얼룩져 있어서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히 예측할 수 없었다.
“이대로 떠나기에는 네가 너무 마음에 걸렸어.”
“떠난다고요?”
자리를 벗어난 것뿐만 아니라, 아카데미를 떠나려고 했던 건가.
조지 교수님과도, 오랜만에 만난 나와도 제대로 된 대화 나누지 못했는데.
월터 교수님을 마주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공황에 빠진 눈빛으로 입술을 달달 떨었다.
어쩐지 저 모습에서 기시감이 느껴졌다.
어린 내가 힘차게 뛰다가 넘어져 다리에서 피가 났을 때. 그는 내 피를 보고는 저런 눈빛을 했다.
혈액 공포증.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일정량 이상의 피를 보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공황에 빠졌다.
그래, 마치 지금처럼.
“리엔. 졸업이 언제야?”
저의를 알 수 없는 질문이 당혹스러우면서도 나는 차분히 답해 주었다.
“이제 시니어 1학년이 끝났으니, 3년 남았어요.”
“……3년. 그래.”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그가 돌연 내 양어깨를 잡았다.
생각보다 세게 느껴지는 악력이 당황스러웠다.
나는 내 어깨에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금 그와 눈을 마주했다.
“월터 교수와 가까이하지 마. 최대한 떨어져. 지금 이 순간부터 졸업할 때까지. 아니, 졸업 후에는 만날 일이 없으니까 더더욱.”
“그게 무슨…….”
“리엔. 이렇게 부탁할게. 내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는 거 알아. 하지만 이번 한 번만 내 말에 따라 줘.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응?”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눈을 굴려 상태를 파악했다.
그는 어찌나 몸에 힘을 주고 있었는지 근육이 온통 경직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선명히 보이는 가쁜 호흡과 떨리는 입술.
심적으로 몰려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적어도 저런 표정 말투 행동이 연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진실이라는 뜻.
나는 아칸더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내 어깨를 쥔 그의 손을 천천히 떼어 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투성이였다.
전후 사정을 말해 달라고 한다고 해서 말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내게 해를 끼칠 위인이 아니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아칸더스의 말대로 할게요.”
이때의 나는 몰랐다.
내가 아칸더스와 나눈 대화를 카르시온이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 * *
“끼이잉.”
“……아.”
어느새 내 앞에 와 서럽게 우는 도비를 쓰다듬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다가온 줄 몰랐다.
나는 도비를 위해 가져온 먹이를 꺼냈다.
하지만 먹이를 주는 와중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생각이 많은 탓이었다.
월터 교수님과 아칸더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칸더스가 혈액 공포증을 갖게 된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월터 교수님은 검술 전공 교수님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검술 전공은 다른 학부보다 피를 볼 일이 많았다.
검술 대련을 하다가 잘못해서 큰 상처를 입었다든가……?
아니지. 그러면 월터 교수님이 아칸더스가 저렇게 나오는 이유를 모를 리 없었다.
연금술이 전공이었을 아칸더스와 월터 교수님이 검을 맞댈 경우도 거의 없을 테고.
그런데 만약, 두 분 사이에 정말 무슨 일이 있었음에도 월터 교수님이 모르는 척 연기한 거라면?
두 분 사이의 일이니 관여하지 않기로 하기에는 아칸더스가 내게 경고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칸더스가 월터 교수님과 가까이하지 말라고 했던 이유는 뭐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상념에, 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이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 말자.
“그냥 아칸더스의 말대로 가까이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내 혼잣말이 의아했는지 도비가 먹이를 먹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살랑이는 꼬리가 상당히 귀여웠다.
나는 손을 뻗어 도비의 턱밑을 긁었다.
“도비. 내가 이번 겨울 방학에는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야. 그래서 당분간 못 볼 것 같아.”
“끼잉?”
“혼자 사냥할 수 있지?”
내가 도비에게 챙겨 주는 건 간식 정도였다.
그럼에도 통통하게 살이 잘 오른 걸 보면, 도비는 혼자 사냥해서 잘 먹고 다니는 듯했다.
아직 영락없이 새끼에 불과해 보이는데. 명색이 마물이라 이건가.
“그르르르릉. 월! 월!”
가지 말라는 건가……?
갑자기 짖기 시작한 도비를 보니 조금 곤란해졌다.
“미안해. 하지만 이미 결정된 일인걸.”
하지만 도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짖어 대기 바빴다.
이런. 기숙사에 다시 가서 도비가 좋아하는 간식을 가져와야 하나.
음?
자세히 보니 짖는 방향이 내가 아니라 뒤를 향해 있었다.
나는 몸을 돌려 뒤를 바라봤다.
“리엔.”
내 뒤에는 그린 듯한 웃음을 걸친 카르시온이 서 있었다.
“날 찾아온 거야, 카온?”
“……그냥 지나가다가 우연히.”
하긴, 내가 있는 곳은 아카데미 산의 초입이었다. 여기에 내가 있는 것을 알고 찾아왔을 리가.
뒤에 카르시온이 있었다면 도비가 짖은 이유는 간단했다.
“도비, 이 요망한 것.”
도비는 여자 앞에서는 더없이 순했지만, 남자들 앞에서는 맹수가 되고는 했다.
내가 요망 도비의 털을 마구 헤집고 있으려니 카르시온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더 맹렬한 기세로 짖기 시작하는 도비였다. 나는 급한 마음에 비장이 수를 꺼내 들었다.
한스를 통해 알게 된 방법이었다.
“도비야 그냥 한 번만 봐주자, 한 번만!”
도비는 한 번만 봐주자는 내 말에 홀로 씩씩거리다가 잠시 후 마법처럼 입을 다물었다.
역시 비장의 수다운 빠른 해결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르시온이 눈을 반달로 접었다. 천천히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다.
“리엔. 그 개새는 뭐야?”
“……어감이 이상해서 이름을 따로 지어 줬어. 도비라고 하고, 보시다시피 마물이야.”
“꼭 노예 같은 이름이네.”
“아니야. 자유의 이름이라고.”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카르시온은 내 근거 없는 주장에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얘는 성별이 어떻게 돼, 리엔?”
그는 내게 물어 놓고 시선을 도비의 신체 어느 한 곳으로 옮겼다.
곧이어 그의 음산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컷…… 이네?
그는 도비의 그곳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괜히 민망해진 나는 급히 다른 주제를 꺼냈다.
“곧 휴가철인데 카온 너는 뭐 할 거야?”
“뭐, 뭐가 철이라고?”
카르시온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동공에 지진을 일으켰다.
얼굴도 단숨에 빨갛게 달아올랐다가 새하얗게 변하기를 반복했다.
저 반응은 뭐지. 내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처럼.
“방학 때 뭐 할 거냐고 물었어.”
“어……? 아. 아하.”
얼을 타던 카르시온이 그제야 내 말뜻을 이해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카온 너는 이번 방학 때 뭐 할 건데?”
“리엔 너랑…….”
“기각.”
카르시온의 표정이 단숨에 비 맞은 강아지처럼 시무룩해졌다.
“이번에는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라 기숙사에 찾아와도 없을 거야.”
백작가로 간다는 말에 그의 눈이 다시 반짝반짝 빛났다.
“놀러 가도 돼?”
“나도 얹혀사는데 다른 사람을 초대하기는 좀……. 물론 이모는 내가 친구를 데려온다고 하면 환영하시겠지만.”
두 눈을 깜빡이던 카르시온이 다른 제안을 했다.
“그럼 리엔이 우리 저택에 놀러 오는 건? 내가 데리러 갈게.”
나 홀로 리시안셔스 공작가에?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 불리는 공작.
그리고 그런 공작을 손짓만으로 무릎 꿇릴 수 있다고 소문난 공작 부인이 있는 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