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53)화 (53/161)

53화

절대 사양이다.

“미안. 부담스러워.”

두 번 연속으로 거절했음에도 카르시온은 도리어 미안한 얼굴을 했다.

“아니야. 내가 너를 충분히 배려하지 못한 것 같네. 혹시 밖에서 만나는 건 괜찮아?”

“……음.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상황이라면.”

확답해 줄 수는 없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니까.

어쩌면 백작가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아카데미로 도망 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내가 말을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게 말한 탓일까, 그가 생각이 많아진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부러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그의 콧잔등을 톡 건드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약초 보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를 것 같아서 한 말이었어. 백작가에 있는 내 전용 연구실에 가는 것도 오랜만이니까.”

“……그래?”

굳었던 얼굴이 내 말에 다시 생기를 띠었다.

“그럼 리엔 네가 밖에 나오는 날, 내가 찾아갈게.”

“나도 모르는 그 타이밍을 네가 어떻게 알아?”

어이없다는 듯 실소하자 카르시온이 사르르 눈을 접으며 입술 위로 검지를 댔다.

“영업 비밀이야.”

* * *

마차에 딸린 창밖으로 익숙한 저택이 시야에 담겼다.

오매불망하며 서 있던 이모는 저택에 들어오는 마차를 발견하고는 얼굴에 웃음을 한가득 띠었다.

“리엔!”

나는 덩달아 입가에 웃음을 걸치며 마차에서 내렸다.

“이모, 잘 지내셨…….”

말을 끝맺기도 전에 이모가 손을 뻗어 나를 품에 안았다.

“세상에, 우리 아가 야윈 것 좀 봐. 뼈랑 가죽밖에 안 남았잖아! 또 약초 본다고 식사를 걸렀던 거지? 아아, 안 되겠어. 이렇게 있을 게 아니라 어서 주방장에게 말해서 기름진 음식을……!”

“아니에요, 이모. 저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었어요.”

제인이라는 밥 집착 광공도 있고, 카르시온이 군것질거리를 곧잘 사다 주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살이 더 쪘으면 쪘지 빠졌을 리가.

“저번 여름 방학 때는 교수가 붙잡았다더니, 이번에는 잘 탈출했나 보구나.”

“하하.”

나는 멋쩍게 웃으며 먼 곳을 바라봤다. 저번 방학 때 조지 교수님을 팔았던 걸 깜빡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변명거리가 달리 없었어요.

그래도 이번에는 조지 교수님의 마수에서 탈출한 게 맞으니 대충 반은 맞는 말이었다.

“그래, 방학은 쉬라고 있는 거지. 네 교수님이 너무 하셨어.”

이모가 울먹이며 다시 한번 나를 세게 끌어안았다.

그리웠던 품이었기에 이모의 품속에서 따뜻함을 만끽하기도 잠시.

숨쉬기가 힘들어서 인제 그만 놓아 달라고 말을 하려는데…….

“리엔 왔구나!”

저택 안에서 소식을 듣고 달려 나온 백작님이 그대로 이모와 나를 동시에 와락 끌어안았다.

“녀석! 오려고 했으면 미리 말하지, 편지를 그렇게 느리게 부칠 건 뭐니. 네가 온다는 소식을 아침에야 알았다.”

꾸중하는 어조였지만, 얼굴에는 반가움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저 배시시 웃었다.

“놀라게 해 드리고 싶었어요.”

“그런 거라면 성공했구나. 네가 온다는 편지를 받고 아침부터 백작가가 아주 소란스러웠어.”

“하하, 소란은 백작님과 이모가 다 피우셨겠죠.”

“우리의 소란이 백작가의 소란이지, 다를 게 있겠니.”

나는 아무 말 없이 눈썹을 으쓱였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이모와 나를 끌어안고 있던 백작님이 드디어 나를 해방해 주고는 똑바로 얼굴을 바라봤다.

“맙소사. 못 본 사이 십 센티는 더 큰 것 같구나! 못 본 사이 어른이 다 됐어.”

이모와 이모부는 어쩜 이렇게 나를 보는 시각이 객관적이지 못하실까.

안타깝게도, 나는 일 년간 단 1센티도 크지 않았다.

그때 우리의 상봉을 지켜보고 있던 누군가가 딴지를 걸어 왔다.

“누가 보면 전쟁 중에 헤어진 가족을 다시 만난 줄 알겠어요.”

삐딱한 웃음을 짓고 있는 이는 사촌 동생 루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루카의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에르한은 저택에 없는 것 같았다.

있었다면 그 누구보다 빠르게 내게 달려왔을 거다.

편지에 답장을 한 번도 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애가 탔겠어.

에르한이 없다는 것을 확신한 나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루카를 놀렸다.

“너는 안아 주지 않아서 삐진 거야? 예나 지금이나 애 같은 건 여전하네. 이리 와.”

“누가 삐졌다고 그래!”

그렇게 말하며 루카는 내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벌린 양팔을 무시하지 않았다.

내 품에 폭 안겼다는 뜻이다.

“이번에도 안 올 줄 알고 저택에 나 혼자 왔는데, 이러기야? 같이 올 수도 있었잖아.”

내 품에 안긴 그가 투덜거리는 말에 나는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루카도 아레나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었지.

“미안. 주니어랑 시니어 건물이 너무 떨어져 있다 보니 네 생각을 못 했어.”

“나도 다음 학기부터는 시니어니까 다음에는 그 핑계도 안 먹힌다는 거 알지?”

“뭐, 생각해 볼게.”

“뭐어?”

단숨에 내 품에서 벗어난 루카가 다시 한번 말해 보라는 듯 눈을 세모꼴로 뜨고는 나를 노려봤다.

하지만 백작님과 이모는 내 편이었다.

“루카. 그만 놓아주렴. 리엔도 여독은 풀어야 하지 않겠니? 그리고 편하게 혼자 올 수도 있는 거지.”

“그래. 오래 마차를 타고 오느라 피곤할 텐데 지금 못다 한 이야기는 이따가 식사하면서 풀자꾸나.”

제 편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루카의 눈매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쒸이. 누나 앞으로 나온 음식 내가 다 먹을 거야!”

“좋아. 난 네 걸 먹을게.”

“그럼 공평하지 않잖아!”

“네가 2인분을 먹는 건 공평하고?”

루카는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더니 눈을 감으며 빽 외쳤다.

“몰라. 주방장에게 오늘은 가지 스페셜로 해 달라고 할 거야!”

루카를 상태로 한없이 여유롭던 나는, 그가 뱉은 말에 처음으로 경악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뭐? 그런 악마의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으라고? 차라리 굶고 말지!”

“푸하하! 나보다 나이도 많으면서 편식한대요!”

“다른 건 몰라도 가지는 편식으로 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가지는 생긴 것부터 구역질이 난다고.”

“가뒤눈 땡끤 꼬부토 꾸역찌리 난따꼬!”

“……이게?”

그런 우리를 백작 부부는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중 이모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기까지 했다.

“이제야 제 자리를 찾은 것 같지 않아요, 여보?”

“허허. 당신 말대로인 것 같소. 드디어 백작가가 원래의 활기를 찾았군.”

* * *

짐을 풀고 잠깐 쉬고 있으니 식사 시간은 빠르게 다가왔다.

별생각 없이 다이닝 룸으로 내려간 나는 입을 벌렸다.

이모가 나를 든든히 먹이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다지시더니 정말 주방장에게 단단히 일렀나 보다.

“상다리가 휘어질 것 같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죠……?”

백작님도 어안이 벙벙했는지 단어를 끊어 말했다.

“그렇……지.”

이모는 싱긋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우리 리엔이 집에 왔는데, 이 정도는 해 줘야죠.”

그에 루카가 손을 번쩍 들고는 이의를 제기했다.

“엄마. 나는?”

“얘는, 누가 들으면 차별하는 줄 알겠다.”

“이런 걸 차별이라고 하는 거 아냐?”

말은 그렇게 해도 루카에게 서운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리엔은 일 년 만에 보는 거잖아. 서운하면 너도 오랫동안 얼굴을 비추지 않으면…….”

이모가 말을 잇다 말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안 돼……! 엄마가 실수했구나. 세상에, 루카. 그럴 생각도 하지 말렴. 식사는 얼마든지 호화롭게 해 줄 수 있으니까 말이야.”

빠르게 태세를 전환한 이모는 화제를 돌리려는 듯 우리에게 식사를 재촉했다.

“자자, 음식 식기 전에 어서들 들어요.”

출출했던 나는 사양하지 않고 식기를 들었다.

“스튜부터 먹어 보는 건 어때?”

이모가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스튜를 가리켰다.

특별 주문한 음식인가?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데.

나 말고도 다들 의문을 느꼈는지 의아한 눈빛으로 스튜를 먼저 맛보았다.

그들은 스튜를 입 안에 넣자마자 쩍 하고 돌처럼 굳어 버렸다.

백작가 요리사들의 솜씨는 몇 년간 먹어 온 만큼 나 또한 익히 알고 있었다.

맛이 없을 리는 없으니, 분명 너무 맛있어서 굳어 버린 거겠지.

얼마나 맛있길래?

나는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스튜를 가득 푼 스푼을 들어 올려 한입에 넣었다.

냠.

……!

머릿속에 번개가 내려친 듯 찌릿하고 울렸다.

충격으로 인해 눈가가 파르르 떨려 온다.

어떻게 이런 맛을 낼 수 있는 거지?

혀가 음식이 닿은 부분부터 시작해, 뿌리 끝까지 썩어 가는 느낌.

내가 지금껏 만들었던 어떤 극독도 이 같은 효과를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둘이 먹다가 둘 다 죽어서 완전 범죄를 꿈꿀 수 있는 맛.

굳은 눈으로 백작님과 루카를 바라봤다.

그들은 동정이 담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차마 입을 열어 맛을 표현하지 못하고 눈으로 대화했다.

‘왜 말리지 않았어요……?’

‘맛이 너무 충격적이라 말릴 생각도 못 했단다.’

‘말릴 새도 없이 먹은 누나 잘못이지.’

그때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이모가 두 손을 꼬옥 모으며 물었다.

“어때……?”

저 없는 사이에 주방장을 바꾸셨나요? 라고 물으려던 나는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스튜 이모가 만드신 거예요?”

“응!”

이모의 해맑은 대답에 속으로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앗, 아아…….

“너, 너무 맛있소, 여보.”

나는 존경스러운 눈으로 백작님을 바라봤다.

저게 참사랑이라는 건가.

“어머. 그래요?”

소녀처럼 볼을 붉히며 수줍게 웃는 이모를 보니 백작님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하지만 훈훈한 풍경도 잠시. 이 선의의 거짓말을 고발하려는 사람이 있었다.

“엄마. 음식을 완성하고 먹어 보긴 한 거야? 안 먹어 봤으니까 이런 끔찍…….”

“루카!”

다급해진 백작님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루카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결연한 얼굴이었다.

“엄마도 진실을 알 권리가 있어.”

이모는 이상하게 흘러가는 상황에 당황하며 조심스럽게 스푼을 들었다.

그에 백작님이 차마 못 보겠다는 듯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크흑.”

잠시 후.

스튜를 먹고 마침내 진실을 알아 버린 이모가 새파랗게 변한 얼굴로 소리쳤다.

“이거 당장 내다 버려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