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54)화 (54/161)

54화

늦은 밤.

백작가 저택에 작은 소란이 인 것을 들은 나는 에르한이 왔음을 직감했다.

이곳에 내 발로 걸어 들어온 이상, 에르한을 마주하는 것은 예정되어 있던 일이었다.

그를 만나고 나면 기분이야 뭣 같긴 하겠지만, 내가 그리던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며 천천히 문을 나섰다.

애써 그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저택에 도착한 그는 내가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올 게 뻔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연회복을 입은 그가 단정치 못한 차림으로 내 앞에 섰다.

뒤로 넘긴 머리는 잔뜩 흐트러져 있었고, 목에 맨 크라바트는 반쯤 풀려 있었다.

결정적으로, 내게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서 진한 취기가 느껴졌다.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기에 긴장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를 마주하자 심장 박동이 되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덕분에 한층 차게 식은 눈으로 그를 바라볼 수 있었다.

“너……!”

에르한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노기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소리칠 수 없다는 걸 의식했는지 그가 내 손목을 잡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나랑 대화 좀 해.”

그래도 들끓는 감정은 주체할 수 없었나 보다.

그가 나를 보며 당장 방으로 끌고 들어갈 듯 눈을 부라렸다.

거센 손길에 아픔이 느껴졌다.

나는 잡힌 손을 비틀어 빼내며 비아냥거렸다.

“잔뜩 취해서는 제대로 말이나 할 수 있겠어? 아, 하긴. 술을 마시지 않아도 매번 개소리를 늘어놓으니 별다를 거 없으려나.”

“이게 미쳤나……!”

“닥쳐. 백작님과 이모님께 네 인성을 광고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보고 듣는 귀가 있을 수도 있는 이곳에서 대화는 내 쪽에서도 사양이었다.

내가 무슨 마음으로 지금껏 숨겨 왔는데.

나는 방문을 열고는 가장 초대하고 싶지 않았던 이들 중 한 사람을 초대했다.

“할 말도 많아 보이는데, 들어와. 짖으려면 여기에서 짖어.”

몇 년 전 누가 내 방에 친히 방음 마법을 걸어 놔서. 안에서 뭐라 소리치든 밖에서는 들리지 않거든.

그게 설령 비명일지라도.

내 방에 방음 마법이 걸려 있다는 사실이 끔찍하기 그지없었지만, 가끔은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되기도 했다.

“하, 입만 살아서는.”

짧게 숨을 뱉어 내며 제 감정을 드러낸 그는 거칠게 나를 밀쳐내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문을 닫고 들어오는 사이, 그는 당연하다는 듯 내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 작태를 눈에 담자 짙은 분노가 차올랐다.

“더럽게.”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이제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날카로운 그의 눈빛이 나를 꿰뚫을 듯 찔러왔지만, 나는 무시하며 잡생각을 이어 나갔다.

……자기 전에 하녀에게 부탁해 이불보를 바꿔 달라고 해야겠네.

에르한이 내뱉은 숨을 다시 들이마시기도 끔찍하니 나가면 바로 창문을 열어 환기해야지.

바닥도 닦아야 하나?

할 일이 많을 것 같았다. 오늘은 차라리 연구실에서 밤을 새우는 게 나으려나.

어느새 에르한의 앞에 도착한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대화 시작하기 전에 이거 하나만 묻자. 너와 내가 이 밤에 대화를 나눌 만큼 친한 사이였던가?”

하지만 에르한은 내 말을 싹 무시하고는 제 할 말을 했다.

“너 왜 말도 없이 아카데미로 도망쳤어?”

그의 말본새에 나는 비소했다.

도망쳤다……라.

맞는 말이긴 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니 더 기분이 더러워졌다.

나를 소유물 따위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그것도 아니면 그에게 나는 제 집안에 빌붙어 사는 기생충 비슷한 무언가였겠지.

“딴 길로 새지 말고 내 말에 대답이나 해, 에르한.”

그는 작전을 바꾼 듯 돌연 오라비를 연기하며 호소하기 시작했다.

“나는 네 오라버니야. 오랜만에 보는 동생과 대화를 나눌 자격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 게다가 그 동생이 내게 일언반구 없이 홀랑 도망가 버렸다면 더욱.”

예상은 했지만, 이런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듣고 있으려니 정신적으로 피곤함이 몰려 들어왔다.

술을 마신 건 그인데, 머리는 왜 내가 아픈 건지.

“네가 나를 진짜 가족이라고 생각한 적은 있어? 가식이 아니라 진심으로 오라버니 노릇을 한 적은?”

그러자 에르한이 기다렸다는 듯 입매를 끌어 올렸다.

“기억 안 나? 방구석에 처박혀 울기만 하던 너를 밖으로 꺼낸 게 누구였는지?”

……그래. 그랬었지.

내게 손을 내밀었던 건 루카와 에르한이었고, 나는 그 손을 잡고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네가 내세울 수 있는 건 정말 그거밖에 없구나.

나는 그를 따라 얼굴에 그린 듯한 미소를 지어내었다.

“에르한. 있지, 나는 네 가식이 참을 수 없이 역겨워.”

속에 담겨 있었던 말을 내뱉자 억지로 지어냈던 미소 또한 유지하지 어려워졌다.

나는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른 채 입을 열었다.

“그때조차도 넌 다정한 형, 또는 아들의 모습을 지키려 했던 거잖아. 어때, 내 말이 틀려?”

“그때의 내 동기가 어땠든, 내가 널 진창에서 끌어올렸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지.”

그는 뻔뻔한 얼굴로 쉼 없이 입을 놀렸다.

“게다가 봐, 우리 부모님도 널 마음으로 낳은 자식으로 여기고 계시잖아. 너와 내가 남매가 아니라니? 그거 패륜적인 말이라는 거 알고 있어?”

“웃기지 마. 나를 동생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이모가 날 입적하려고 했을 때. 그렇게 반대를 했어?”

에르한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어떻게 알았어?”

“글쎄. 어떻게 알았을까?”

피식 웃음을 흘리자 그가 화를 참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주먹에 핏줄이 올라온다.

“말장난하지 마. 나 지금 진지해.”

“나도 진지해.”

그는 내 얼굴을 잘근잘근 씹어 봤다. 나 또한 그 눈빛에 지지 않고 받아치기를 수 분째.

마침내 에르한의 입에서 본론이라 할 수 있는 주제가 나왔다.

“편지는 읽었어? 안 읽었을 리가 없지. 내가 몇 통이나 보냈는데. 그치? 한 통쯤은 읽었을 거야.”

“읽었을 것 같아? 내가 네 편지를? 한 글자도 읽지 않았어.”

단호하게 아니라 대답하는 나를 보며 에르한이 눈을 파르르 떨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 편지 봉투에는 비단 내 편지만 들어 있던 게 아니었다고!”

역시. 그가 에르한을 통해서 내게 연락하려고 했구나.

편지에서 라벤더 향이 날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답지 않게 꼬박 편지를 보내는 걸 보고는 거의 확신했고.

다른 사람에게 다정한 오라비인 척 눈속임을 하기 위해서라면 몇 개월에 한 번 보내는 것도 충분했을 테니까.

그의 동생인 루카는 나와 단 한 통도 편지를 주고받지 않았으니.

웃긴 일이었다.

에르한 너는 그가 왜 편지에 라벤더 향수를 뿌리라 명령했는지조차 몰랐겠지.

내가 그를 처음 만난 날. 내가 그에게 라벤더 꽃을 선물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라벤더 꽃을 건네준 날.

그에게는 사랑의 시작이었겠지만, 나에게는 불행의 시작이었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옛 기억에서 벗어나려 나는 부러 목소리에 힘을 줬다.

“그래서 안 읽었어. 네 편지만 있었다면 읽었을지도 모르지. 어떤 가식적인 말들로 편지를 채웠을까 궁금해서.”

에르한이 같잖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비웃었다.

“네가 그런다고 렉스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렉스 베고니아.

기어이 그 새끼의 이름을 듣고 말았다.

순간 온몸에 힘이 들어가며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진정하자.

그는 지금 당장 여기에 찾아올 수 없어. 그가 왜 에르한을 통해서 내게 연락하고 있는데?

내 앞에 있는 건 고작 에르한이야. 렉스 베고니아가 아니라고.

제가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멍청이.

최면을 걸듯 내 앞에 렉스 베고니아가 없다는 사실을 되뇌고 있을 때, 에르한의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왜 렉스를 거부하는 거야? 그렇게 자존심 세우면서 튕겨 봤자 네게 이득 되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내가 지금 자존심을 세우는 거로 보여?!”

격양된 나머지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들이 마구 내뱉어졌다. 나는 날카롭게 눈을 부릅뜨며 에르한을 쏘아봤다.

“나는 그 새끼의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려. 심장이 죄여 들어와. 그런데도 내가 고작 튕기고 있는 거로 보이냐고!”

에르한은 내가 무슨 감정이고, 무슨 말을 내뱉든 관심 없어 보였다.

그는 이번에도 제 사정만을 털어놓았다.

“네가 아카데미로 도망친 이후로 내 상황이 굉장히 곤란해졌어. 렉스가 너를 데려오지 않으면 내가 지금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투자금을 회수하겠대.”

“동생이라며. 네가 지금 하는 그 말이 동생을 팔겠다는 거랑 뭐가 달라?”

입에서 신맛이 느껴졌다.

결국, 나를 담보로 걸고 투자받은 것을 빼앗기기 싫다는 거다.

어쩜 저렇게 저열한지.

“파는 거라니. 그건 널 위한 일이었어. 잘 생각해. 렉스는 베고니아 공작가의 후계자라고. 너는 공작의 정부가 되는 거야. 옆에서 아양만 부리면 평생 호의호식할 수 있어.”

에르한은 그 새끼가 내게 공작 부인의 자리를 내어주겠다고 속삭였다는 것을 알까.

그것조차 끔찍이 싫어서 거부하고 있는데, 정부가 되어 호의호식하라는 말이 설득력 있게 들려올 리 없었다.

“지금이야 우리 부모님이 널 부양하고 있으니 실감이 안 나겠지.”

그가 비릿하게 웃었다.

“하지만 내가 백작 위를 이어받은 이후에는? 너를 부양해 줄 사람은 이제 없어. 너는 모든 지원을 끊기고 이곳에서 쫓겨나게 될 거야.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약초 몇 개 구분하는 게 다인 네가 아무리 벌어 봤자 얼마나 이 같은 생활을 누릴 수 있을까? 그깟 약초 따위로?”

……그깟 약초?

욕지기가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차마 뱉지 못한 욕지기가 안에 맴돌아 속이 메스꺼웠다.

“렉스가 너에게 집착하고 있을 때 순순히 구는 게 좋을 거야. 첫눈에 반했다고 하니 언제 갑자기 변심할지 모르잖아?”

그 말에, 퍽 억울하게도 나는 움찔하고 말았다.

내게 첫눈에 반했다는 분홍색의 누군가가 생각나서. 차가운 현실을 일깨워 주는 것 같아서.

이런 내 모습을 뭐라고 착각했는지 에르한이 신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다음 주에 베고니아 공작가가 주최하는 파티가 있어.”

저 말을 듣는 순간, 뒤에 무슨 말이 나올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긴말하지 않을게. 참석해.”

그래. 너는 한 치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구나.

이제는 조소할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지친 기색으로 멍하니 다른 곳을 응시하자 그가 내 턱을 틀어쥐고는 들어 올렸다.

“렉스에게 네가 온다고 말해 놓을 테니 안 오면 너랑 나 둘 다 끝장인 거야. 알아들어?”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응시했다. 그렇게 얼마나 눈을 마주치고 있었을까.

“재수 없는 년.”

그는 바닥에 침을 뱉더니 그대로 방을 나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