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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55)화 (55/161)

55화

에르한이 방에서 나가고 난 후, 나는 침대 위에서 이불로 온몸을 둘러쌌다.

이렇게 하면 떨림이 조금이라도 진정될 것 같아서.

이불이 나를 지켜 줄 방어막이라도 된 듯 세게 쥐었다.

서글펐다.

고작 얇은 이불 한 장이 나를 보호할 수 있을 리 없을 텐데도 그것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

눈꺼풀을 내리감자,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나는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종류임을 직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기억들이 빠르게 지나가길 염원하는 것뿐.

포기하는 마음으로 몸에 힘을 빼자 과거라는 악몽에 서서히 빠져들었다.

* * *

눈 깜짝할 사이 장례식이 끝났다.

그렇게 오랜 기간 살리려 노력했는데. 헤어짐은 너무나도 쉽고 빨랐다.

나는 땅에 묻힌 부모님을 멀거니 바라봤다.

아칸더스와 같이 연구했던 치료제 개발은 실패로 돌아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미완성이었다. 치료제가 완성되기 전, 부모님은 내 곁을 떠났으니까.

내 약초학 지식이 완벽했더라면 완성 시기를 앞당길 수 있지 않았을까?

이모에게 부모님이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리고, 금전적인 지원을 받았더라면?

적어도 약을 만들 시간을 벌 수 있진 않았을까.

이모는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야 병에 걸렸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내가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이모가 엄마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넬 기회를 앗아 간 것이 됐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끝없는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들어 오며 머리를 어지럽혔다.

머리에 극심한 통증이 일었다.

하지만 후회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내게 남은 건 지독히 시린 현실뿐.

“이제부터 우리가 너의 가족이란다, 리엔.”

나는 공허한 눈으로 앞에 계신 이모를 바라봤다.

방금 뭐라고 하신 것 같은데.

모르겠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그저 침대에 누워 자고 싶을 뿐이었다.

눈을 뜨고 있는 지금이 너무나도 끔찍해서. 아직도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적어도 잠을 청했을 때만큼은 괴롭지 않아도 됐으니까. 모든 걸 잊어버릴 수 있으니까.

운이 좋다면 꿈에서 부모님이 병에 걸리지 않았을 적의 건강한 모습도 볼 수 있겠지.

“아니지. 우린 계속 가족이었으니, 방금 이모가 네게 한 말은 틀린 것 같구나.”

이모의 입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비애에 빠진 눈은 너무나 선명하게 슬픔을 그려내고 있었다.

엄마와 자매임에도 불구하고 성격부터 시작해서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일까, 이모의 얼굴에서 엄마의 얼굴이 겹쳐졌다.

계속 눈을 마주하고 있기가 힘들었다. 나는 결국 고개를 떨구며 이모의 소매를 당겼다.

“혼자 있고 싶어요.”

“……그래.”

대답이 들려온 곳은 울고 있는 이모가 아니라 백작님에게서였다. 그는 조용히 나를 안아 올렸다.

말라비틀어진 내 눈가 위로 따듯한 손이 내려앉았다. 어색하고 서툰 손길이었다.

“자고 나면 좀 괜찮아질 거다.”

나는 묻고 싶었다.

정말로 자고 나면 괜찮아질 수 있는지.

그렇게 쉽게 해결될 수 있다면, 왜 진작 자신을 강제로 잠재우지 않았는지.

이렇게 아픈데.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어째서.

그 이유를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백작님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으니까.

아무리 자고 일어나도 괜찮아지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잠을 청했다. 나에게는 깨어 있는 것 자체가 지옥이고, 악몽이었다.

그렇게 하릴없이 잠만 잤다.

다행인 것은 아무도 내가 잠만 자는 것에 대해 뭐라고 하지 않았다는 거다.

백작가에 있는 모두가 나를 동정하고 연민했다.

잠에서 깨면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 지쳐서 자기를 반복했다.

그런 생활을 일 년 정도 했던 것 같다.

곪다 못해 썩어 버린 감정에 익숙해져 그 고통에 점차 무뎌졌다. 나는 깨어 있을 때 더는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되었다.

더는 흘릴 눈물이 없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굳게 잠긴 내 방문을 두드렸다.

“누나. 나랑 놀자.”

나보다 한 살 어린, 이모의 둘째 아들 루카였다.

나는 당연하게도 그의 두드림을 무시했다. 이모도 백작님도 몇 번이나 찾아왔지만, 결국 무응답으로 돌려보냈던 나였다.

루카라고 다를 리가.

노크 덕분에 잠에서 깼지만, 종일 잠을 자는 내게 다시 잠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놀 기분이 아닌 것 같으니까.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문 앞에 있을게.”

잠결에 무슨 말이 들린 것도 같았는데.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겠지.

내가 잠에서 깬 것은 하녀의 놀라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였다.

“헉! 도련님 왜 여기서 불편하게 쭈그려 앉아 계세요? 세상에, 몸 찬 것 좀 봐! 대체 몇 시간을 여기 계신 거예요?”

“오래 있지 않았어.”

“거짓말인 거 다 알아요!”

“누나가 방에서 나오지 않은 시간에 비교하면 짧은 시간이지.”

“루카 도련님. 죄송하지만 몇 날 며칠을 더 기다리셔도 리엔 아가씨는…….”

“쉿. 말조심해. 그건 모르는 거잖아.”

“죄송합니다. 제가 말실수를 한 것 같네요. 하지만 도련님의 몸이 많이 차요. 따뜻한 곳으로 가셔야 하지 않을까요……?”

“조금만 더.”

“도련님이 아프시면 백작님과 마님이 슬퍼하실 거예요.”

그 말에 얼마간 정적이 흐르며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루카가 몸을 문에 가까이 대고 하녀와 대화할 때보다 큰 목소리로 선포하듯 말했다.

“누나. 내일 또 올게.”

곧이어 방문 앞을 떠나는 발소리가 들리고 주변이 조용해졌다.

나는 조그맣게 눈을 떴다.

귓가에 그가 했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며 잠을 방해했다.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문 앞에 있을게.’

못 들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냥 못 들은 척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음성이 들려오지 않을 때까지 뜬눈으로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백작가로 몸을 의탁한 이후 처음으로 잠을 설친 날이었다.

* * *

그날 이후 루카는 출석 도장을 찍듯 매일 나를 찾아왔다.

문은 언제나처럼 굳게 닫혀 있었지만, 루카는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 며칠 전부터는 동화책을 가져와서 큰 목소리로 읽었다. 마치 내게 들려주려는 듯이.

……시끄럽게.

티슈를 돌돌 말아 양쪽 귀에 꽂자 루카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희미해졌다.

나는 그것에 만족하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몇 주가 더 지나자 나는 자연스럽게 루카가 오는 시간대에 깨어 있게 됐다.

참다못한 나는 신경질을 내며 문 앞으로 다가갔다.

날카로운 말을 쏟아 내려는데. 문득 루카가 읽고 있는 구절이 귓가에 박혀 들어왔다.

“소녀의 말에 상처를 받은 소년은 다시는 소녀를 찾지 않았어요.”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꼭 나를 겨냥하는 말 같지 않은가.

……그래. 한 살 차이라도 나보다 어린 동생한테 날 선 말을 쏟아 내는 건 좋지 않겠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문가에 이마를 대고 무정한 어조로 툭 던지듯 말했다.

“소리 내서 읽으려면 동화책 말고 약초 도감이나 읽든가.”

오랜만에 말해서 그런지 목구멍을 타고 나온 내 목소리가 조금은 낯설었다.

조금 쉰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뜻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은 정도였다.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 때문에 놀랐는지 한동안 문틈으로 들려오는 말은 없었다.

“……엑. 그렇게 재미없는 걸 누가 읽어?”

수십 초를 기다려 들은 답변이 고작 저거였다.

“앞으로 다시는 오지 마.”

나는 그대로 침대로 직행해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

역시, 상대해 주는 게 아니었다.

* * *

오지 말라고 한 이후, 그는 정말로 나를 찾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며 조금은 내가 한 말을 후회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일인걸.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을까.

후회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무렵. 갑자기 나타난 루카가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건넸다.

여름 방학이 끝나 아카데미를 다녀왔단다. 겨울 방학이 되자마자 다시 나를 찾아온 거고.

아카데미로 가기 전 살짝 언질은 해 줬어야지.

원망이 올라왔지만, 루카가 내 말 때문에 발길을 끊은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루카는 몇 개월 전과 같이 동화책을 읽어 나갔다.

그렇게까지 말했으면 한 번쯤은 약초 도감을 읽어 줄 법도 한데. 그는 이상한 곳에서 고집이 셌다.

이야기의 끝이 다가오고, 동화가 으레 그렇듯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가 나올 무렵이었다.

“루카?”

누군가의 등장으로 이야기는 끝맺지 못했다.

“또 여기 있는 거야?”

“응. 누나랑 대화하고 있었어.”

에르한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혼자만의 독백은 대화라고 하기 어렵지 않을까?”

“아니야, 전에 진짜로 누나랑 대화한 적 있는걸!”

“뭐? 정말?”

나는 그가 내 방문을 바라보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나 싶었겠지.

“그것보다 혼자 이렇게 복도에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 루카?”

“내가 왜 혼자야? 누나가 있잖아.”

“리엔은 답을 해 주지 않잖아.”

“그럼 형이 매일 나랑 같이 있어 줘. 내가 아카데미에 입학하면서 같이 볼 수 있는 시간도 많이 줄었잖아. 응?”

“……음.”

고민하는 듯싶었으나 의외로 대답은 빠르게 나왔다.

“그래. 우리 동생님의 부탁인데 못 들어줄 것도 없지!”

“와아아!”

“하지만 나는 매일 정해진 일과가 있어서, 오래 시간을 내지 못하는 거 알지?”

“알지, 알지!”

나는 푹 한숨을 쉬었다.

귀찮은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 것 같았다.

에르한의 말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대답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매일 루카와 함께 내 방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나 더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 동화책을 읽는 대신, 일상적인 대화를 했다는 거다.

“루카. 내가 아침에 엄청난 걸 봤다? 뭔지 궁금하지.”

“응. 궁금해! 뭔데?”

“어머니가 쿠키를 만드시겠다며 주방으로 가는 거……!”

“뭐?! 형은 그걸 보고만 있었단 말이야?”

“푸하하, 그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은 뭐야? 어머니가 보면 서운해하시겠다.”

“그럼 형이 내 몫으로 나온 것도 다 먹어줘.”

“……미안. 그래도 어떻게 쿠키를 만드시는 건 말렸으니 봐줘.”

“으흠. 그래, 깊이 반성하고 있는 것 같으니, 이번에는 너그럽게 넘어가 줄게!”

근엄한 척 목소리에 힘을 준 루카가 귀여웠는지 에르한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듣는 것만으로도 둘 사이가 얼마나 돈독한지 느껴지는 대화였다.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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