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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56)화 (56/161)

56화

에르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 맞다. 어제 예절 선생님이 우리 가족처럼 단란한 가족은 처음 본다고 하셨다, 루카?”

“나도 우리 가족이 너무너무 좋아. 엄마 아빠도 형도!”

그렇겠지.

백작님과 이모는 귀족 결혼에서 흔치 않은 연애결혼이었다.

에르한과 루카는 후계자 양성을 위해서가 아닌, 두 분의 사랑의 결실이었다.

에르한과 루카 또한 두 분의 사랑 안에서 자라서 그런지 서로를 끔찍이 아꼈다.

가끔 엄마를 따라 백작가에 왔을 때 느끼곤 했다.

백작가는 우리 가족만큼이나 돈독하구나. 행복한 가정이구나.

하지만 이제 나에게는 다정하게 안아줄 부모님이 없었다. 그들처럼 의지할 수 있는 형제도 없었다.

부러움이 질투가 되어 가슴을 쿡쿡 찔러왔다.

“그리고 리엔 누나도! 누나도 이제 우리 가족인 거지, 형?”

“……그럼. 리엔도 우리 가족이지.”

순간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이 머리를 관통했다.

나도 저들의 가족이라고?

그때의 나는 둘에게 가족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에만 집중해서.

나도 저들의 관계 속에 속할 수 있다는 것만 뇌리에 박혀서.

에르한의 대답이 늦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 * *

유난히도 추운 날이었다.

벽난로를 활활 태워 놓고 두꺼운 이불로 무장했지만, 온몸이 으슬으슬 떨려 올 만큼.

“오늘은 오지 않으려나.”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귀찮기만 한 사람들이었다.

오지 않는 게 편안한 수면에도 도움이 될뿐더러, 이상한 말로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지도 않을 터였다.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 문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오늘은 춥다, 그치?”

“리엔은 안에서 매일 잠만 자는 것 같던데. 눈이 오는 것도 모르고 세상모르고 자고 있을지도?”

“눈 오는 거 엄청 예쁘던데.”

방금까지만 해도 오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건만. 두 형제의 목소리를 듣자 이상하게 기분이 들떴다.

그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최근에 있었던 일들을 나눴고, 나는 그 이야기들을 훔쳐 들었다.

그러던 도중 크게 콜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형 감기 걸렸어?”

“아니야. 그냥 재채기였어.”

에르한은 부정했지만, 곧이어 거짓말임을 증명하듯 기침을 연달아서 했다.

“오늘은 나 혼자 있을 테니까, 형은 들어가서 쉬어.”

“안 아프대도.”

“기침을 그렇게 하는데 내가 속을 것 같아?”

“이 추운 곳에 너 혼자 두기 걱정이 돼서 그래.”

“하녀나 하인을 부르면 되지.”

“그들은 네가 물러가라 명령하면 들을 수밖에 없잖아.”

둘의 설전은 몇 분이나 계속되었고, 결론이 날 기미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두 형제의 반복되는 말싸움에 차츰 질려 갔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홧김에 문을 벌컥 열어 버렸다.

“밖에서 청승 떨지 말고 들어와.”

귀신이라도 본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두 형제의 표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웃겼다.

하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닌 것을 알았기에 꾹 참았다.

나는 그렇게 닫혀 있던 방문을 열었다. 사뭇 허탈하기까지 한 개문이었다.

* * *

한 번 문을 열고 나니 두 번은 쉬웠다. 나는 두 형제를 매일 방에 초대했다.

백작가에 몸을 의탁하기 전에도 같이 어울려 놀곤 했으니 다시 친해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 하루는 두 형제와의 방문으로 시작해서 헤어짐으로 끝이 났다.

방문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으나 나의 자그맣던 세계는 커졌다.

두 형제의 방문이 계속되자 이모와 백작님도 조심스럽게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물론 이번에는 그분들의 방문을 거부하지 않았다.

백작가의 사람들과 차례로 만나며 나는 따스함을 느꼈다.

그분들은 진심으로 나를 배려하고 존중했으며 차별하지 않았다.

그들의 말과 행동이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믿게 했다.

어느 날,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는 이제 깨어 있어도 괴롭지 않았다.

부모님을 생각할 때면 아직도 가슴이 아리곤 했지만, 매 순간 떠오르지는 않았다.

백작가의 사람들이 찾아와 그들과 대화할 때면 곧잘 웃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방에만 갇혀 있을 필요가 있나?

나는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무작정 문을 열고 나왔다.

내가 걸음을 멈춘 곳은 맛있는 음식 냄새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이었다. 아무래도 식사 시간에 맞춰 내려온 듯했다.

“리엔이 문을 열 수 있던 건 모두 너희 덕분이야. 엄마 아빠보다 낫구나. 둘 다 기특하기도 하지.”

내 이름이 거론되자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고는 작은 문틈 사이로 그들을 지켜봤다.

“하지만 엄마. 나는 누나랑 놀고 싶었을 뿐인데?”

이모는 루카의 머리를 다정히 쓸었다.

“루카다운 대답이구나. 그래서 리엔과 노는 건 재미있었니?”

“응. 근데 너무 짧게 만나서 아쉬워. 밥도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리엔도 함께 식사할 수 있는 날이 올 거야.”

두 모자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백작님이 다소 진지한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말이 나온 김에 에르한, 루카. 너희에게 할 말이 있단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백작이 허락을 구하듯 이모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모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리엔의 의사는 물어보지 못했지만, 일단 너희에게 먼저 말하기로 했지.”

내 의사?

나는 백작님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리엔은 이미 우리 가족이지. 하지만 서류상으로도 가족이 되었으면 해서, 정식으로 입양 절차를 밟고 호적에 넣으려고 한단다.”

심장이 일렁였다. 울컥하며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나를 가족으로 생각하시는 건 알고 있었으나, 직접 말로 들으니 그 의미가 다르게 다가왔다.

달려가 이모와 백작님의 품에 안겼을지도 모르겠다.

뒤에 들려온 말만 아니었다면.

“저는 반대예요.”

“에르한?”

당황한 사람들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는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한 번 씹고는 입을 열었다.

“우리 리엔이 넓은 의미로 가족인 건 맞죠. 하지만 저희처럼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이에서 태어난 건 아니잖아요.”

“그게 무슨……!”

“의식주를 해결해 주는 것만 해도 도리는 다했다고 생각해요.”

백작님의 노기가 담긴 음성이 다이닝 룸을 울렸다.

“에르한!”

“제가 틀린 말을 한 게 아니잖아요! 리엔은 이모의 딸이지, 아버지와 어머니의 딸이 아니라고요!”

백작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에르한의 앞에서 손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본 이모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여보! 폭력은 안 돼요!”

그제야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건지 인식한 듯 백작님이 손을 내렸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여전히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네게 실망했다, 아들아. 고작 그런 이유로 입양을 반대하다니. 진심으로 반대하는 거라면 더 그럴듯한 이유를 대야 할 거다.”

나는 그들이 싸우는 이유가 나라는 것이 못 견딜 만큼 거북했다.

내가 없었다면 시작되지 않았을 싸움이었다.

백작가에 분란을 만들어 낸 것 같아 짙은 죄책감이 몰려왔다.

결국, 나는 그 자리를 도망치듯 벗어났다.

그러나 에르한을 원망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서운하긴 했지만, 그는 지극히 옳은 말만 했다.

에르한이 내 입양 건을 반대한 것도 그만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예상컨대, 에르한은 내가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게 아닐까.

백작님과 이모는 입양한 아이라고 해서 절대 무언가로 차별할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백작님 부부의 딸이 된다면 나에게도 에르한과 동등한 자격이 주어질 터였다.

예를 들면 후계자의 자리라든가.

루카는 백작의 자리에 관심이 없을뿐더러 관련 공부와는 담을 쌓았다.

내가 없다면 에르한이 후계 싸움 없이 확정적으로 물려받았을 자리라는 거다.

그러니 내가 입양되는 게 불안하고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겠지.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을 때 즈음, 백작님이 나를 찾아왔다.

그가 어떤 말을 할지 예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리엔. 너를 정식으로 입적하려고 한단다. 우리의 부부의 딸이 되어 주겠니?”

백작님은 분명 반대하는 에르한을 설득하지 않고 나를 찾아왔을 것이다.

때문에, 그 제안을 거절했다.

에르한에게 내가 무해하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너의 자리를 뺏지 않을 거라고. 나는 내 위치를 잘 알고 있노라고.

어리석게도.

백작님은 딸이 되기를 설득하거나 강요하려 하지 않았다.

내 선택을 존중했고,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말해 달라고 하셨다.

나는 백작님의 품에 안기며 알겠다 대답했다. 그의 품은 마치 돌아가신 아빠의 품처럼 따스했다.

다음 날 마주한 에르한은 내게 평소와 다름없이 다정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웃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나는 그 위화감을 애써 모른 체하며 웃었다. 그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바보처럼 웃었다.

* * *

방 밖으로 나온 이후, 내 일상은 꽤 달라졌다.

서류상 자식이 아닐 뿐, 백작님과 이모는 나를 친자식처럼 대했다.

나는 백작님께서 마련해 주신 연구실에서 약초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볕이 좋은 날은 백작가의 식구들과 함께 가까운 곳으로 피크닉을 가기도 했고, 가끔은 에르한과 말을 타러 가기도 했다.

루카는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방학에만 어울릴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완전히 안정된 후에는 이모가 초빙한 선생님들께 여러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내 일상은 모두의 사랑 속에 전과 같이 회복되었다.

그렇게 행복만 가득할 줄 알았던 일상이 어질러진 것은, 유독 길었던 여름이 끝나갈 때쯤이었다.

나는 약초를 사러 외출했다가 라벤더 꽃을 잔뜩 사 왔다.

백작가 사람들에게 선물할 예정이었다.

처음으로 무언가를 선물하는 것이었기에 설렘 반 기대 반으로 저택을 들어갔다.

에르한이 응접실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그가 응접실에 있다는 것은, 누군가와 같이 있다는 뜻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흥분한 나는 그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응접실에 들어가자 눈부신 은발에 잿빛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시야에 담겼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소년의 눈동자가 내게 닿았다.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으나 나는 그것이 소년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리, 리엔?”

당황스러운 에르한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다.

나는 그제야 실수했다는 것을 눈치채고 소년에게 급히 머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급한 나머지 에르한 오라버니가 손님과 같이 있는 줄 모르고 들어왔어요.”

평소에는 나이 차이고 뭐고 이름을 불렀으나 다른 사람의 앞이니, 에르한의 면을 세워 주기로 했다.

“……오라버니?”

어떻게 된 일이냐는 듯 은발의 소년이 미간을 좁히며 에르한을 바라봤다.

에르한은 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하듯 말했다.

“으, 으응. 친동생은 아니고, 우리 백작가에서 얹혀사는 사촌 동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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