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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57)화 (57/161)

57화

알고는 있었지만, 에르한이 나를 사촌 동생이라고 선을 긋자 조금 씁쓸한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에르한이 소년에게 쩔쩔매는 것을 보니 소년의 신분이 생각보다 더 높은 모양이었다.

나는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에르한에게 주려고 했던 라벤더 꽃을 소년에게 불쑥 내밀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제 무례를 용서해 주시겠어요?”

나는 최대한 무해해 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소년의 눈이 커지며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나는 입가에 경련이 일 때까지 그의 눈치를 봤다.

거, 얼굴 다 구경했으면 이제 슬슬 받아 줍시다.

“……름.”

“네?”

“이름이 뭐야?”

나는 잠시 고민했다.

입가에 이어, 손까지 후들거리기 시작했는데 과연 내민 꽃을 물려도 괜찮은지.

나는 결국 후들거리는 손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리엔이라고 해요.”

“……리엔이라. 리엔, 리엔.”

소년이 내 이름을 음미하듯 여러 번 곱씹었다.

“예쁜 이름이네. 잘 기억해 둘게.”

꽃을 받으며 살포시 눈웃음을 짓는 그에게서 어딘가 부조화가 느껴졌다.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인사했다.

“그럼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까?”

……에르한이 아니라 나한테 한 말인가?

왜?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하며 눈을 깜빡이자 소년의 눈이 눈에 띄게 서늘해졌다.

“안 돼?”

“……안 될 리가요. 기회가 된다면 또 봬요.”

또 보자는 말에 그의 서늘한 눈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호선을 그렸다.

“그래. 다음에 또 보자, 리엔.”

* * *

번쩍.

눈을 뜬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핀 후 호흡을 골랐다.

간밤 사이 얼마나 몸을 뒤척였는지 침대보가 어지럽게 구겨져 있었다.

커튼 사이로 햇빛이 비쳐 들어오는 것을 보니 이미 아침인 듯했다.

“다행이네…….”

적어도 렉스 베고니아를 처음 만났던 장면까지만 꾸었으니까.

백작가 식구들을 보러 온 대가치고 이 정도면 싸게 먹혔다.

사실 내가 백작가에 올 수 있었던 것도 어느 정도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렉스 베고니아가 나를 찾아오지 못할 거라는 확신.

같잖은 에르한 정도야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조금 걸리는 점이라면…….

“에르한이 렉스 베고니아에게 투자금을 받았다고 했지.”

망할.

뻔히 보이는 얕은 수였다. 무얼 믿고 그것을 덥석 받은 거지?

렉스 베고니아가 일언반구 없이 투자금을 회수해서 에르한이 쫄딱 망한다면 나야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아르메리아 백작가에 타격이 간다는 뜻이었다.

전적으로 에르한 혼자만의 일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내가 얌전히 말을 들을 거라 생각했겠지. 그래서 덥석 돈을 받은 거고.”

내가 백작가에 해가 되는 일을 보고만 있을 리 없었으니까.

여기서 웃기는 점은, 이런 내 약점이 곧 에르한의 약점이라는 거다.

에르한은 자신의 가족을 끔찍이 아꼈다. 물론 그 안에 나는 속하지 않겠지만, 그를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겁도 없지.

내가 백작가를 저버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멍청한 놈. 내가 렉스 베고니아가 원하는 대로 할 것 같아? 차라리 네가 뿌린 똥을 치우지.”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한스를 통해서 이번에 느낀 게 하나 있다.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돈을 쓸어 담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거다.

“한스에게 잘 팔릴 것 같은 약 리스트를 적어서 보내야겠네.”

내가 가진 모든 레시피를 파는 한이 있더라도 고분고분 구는 일은 없을 거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깃펜을 잡았다.

* * *

일주일 후.

오늘 참가할 파티를 위해 백작가의 하녀들이 나를 성심껏 단장해 주고 있었다.

내가 파티에 참석하고 싶다 했더니 이모가 흥분하며 내게 보내 준 이들이었다. 평소 이모의 단장을 맡는 하녀들인 듯했다.

드레스도 좋은 걸 해 주신다며 어찌나 성화였는지, 나와 짧게 실랑이를 했을 정도였다.

기간이 촉박해서 어쩔 수 없이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을 샀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맞춤 드레스의 가격을 훌쩍 넘어서는 것으로 맞춰 주셨다.

“리엔 아가씨를 이렇게 꾸며 드리는 건 처음이네요.”

“어쩜 이리 백옥 같은지!”

“꺄아, 맞아요. 이런 고운 피부를 보는 것도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요!”

그녀들의 주접을 들으며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오랜만이라니. 그거 이모가 들으면 서운해하시겠는데?”

“앗! 그런 말이 아니라!”

생각지도 못했는지 지목을 당한 하녀가 당황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장난스레 웃었다.

“이모께는 말씀 안 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

“저, 정말이죠?”

“그럼.”

“헤헤. 감사해요! 하지만 마님 피부가 나쁘다거나 하고 생각한 건 정말 아니었어요.”

“맞아요. 아가씨 피부가 너무 좋아서 그런 거죠!”

나는 저것 또한 아부라고 생각하고 적당히 대꾸했다.

“아직 어려서 그렇지 뭐.”

“진짠데! 오히려 아가씨 나이는 트러블이 많은걸요!”

그렇게 도란도란 대화하고 있을 때였다.

돌연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며 파우더 룸에 에르한이 들어왔다. 초조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내 머리를 만지던 하녀가 놀란 투로 입을 열었다.

“어머, 에르한 도련님?”

에르한은 뭐라 말을 하려고 하다가 목소리를 듣고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내가 다수의 하녀와 함께 있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의 시선이 곱게 세팅한 내 머리카락과 드레스에 닿는다. 표정이 풀어지며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미안. 노크를 깜빡했어. 이미 준비하고 있었구나, 리엔.”

“용건은?”

아. 나도 모르게 말이 차갑게 나갔다. 실수였다.

에르한도 잘만 다정한 오라버니를 연기하고 있는데.

그가 순한 얼굴을 하며 멋쩍은 양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준비를 잘하고 있나 걱정돼서. 너는 파티가 이번이 처음이니까, 내가 에스코트해 줘야지.”

에스코트가 아니라 감시겠지.

그렇게 당당히 협박하더니 결국 안 올까 걱정됐나 보지?

나는 그의 생각을 가늠하며 겉으로는 가식적인 미소를 그려냈다.

“에스코트는 괜찮으니까 먼저 파티장에 가 있어. 나는 들를 곳이 있어서.”

“……어딜?”

“파티장에 가기 전에 잠깐 친구를 만나기로 했거든.”

그가 고민하는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생글 웃었다.

“왜? 내가 이렇게 꾸미고 파티장에 가지 않기라도 할까 봐?”

에르한이 작게 몸을 움찔했다. 잠시 후 그가 조용히 문을 닫으며 말을 이었다.

“……늦지 않게 와.”

“그럴게.”

그게 어떤 자리인데. 늦으면 안 되지.

* * *

하녀들에게 도움을 받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장한 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마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수도 외각에 위치한 카페.

카페 안쪽에는 이미 나와 만남을 약속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리엔!”

평소라면 내게 달려들어 애정 공세를 퍼부었을 텐데.

화장 때문인지 제인은 비교적 얌전하게 손만 잡고 방방 뛰었다.

“너무 예뻐서 누군지 못 알아볼 뻔했잖아, 리엔! 꾸미지 않은 모습도 귀여운데 이건 진짜……!”

“하하, 주접은. 제인 너야말로 오늘 신경 좀 썼는데?”

“리엔 너를 밖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잖아. 신경 좀 썼지. 그런데…….”

제인은 탐스러운 먹잇감을 발견한 듯 나를 여기저기 살폈다.

“꾸민 모습을 보니까 더 불타오른다. 다음에는 내가 널 직접 꾸미게 해 줘. 내 전공 알지?”

나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웃는 제인을 따라 웃었다.

“알았어. 그보다, 갑작스러운 부탁이었는데 정말 고마워 제인.”

“별일 아닌데 뭐. 그나저나 내가 걔랑 대화해도 정말 괜찮은 거야? 상처 안 받는 거지?”

나는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하. 하하, 그럼. 그때는 친구가 몇 명 없었으니까 조금 질투 나서 그랬던 거야.”

사실 오늘 제인을 만난 것은 같이 파티장에 가기 위함도 있지만, 하나 이유가 더 있었다.

“어라. 벌써 와 있었네?”

조금 늦게 도착한 한스가 인사를 건네며 걸어오다가 뚝 멈췄다.

“제……인? 와! 오늘 나를 도와준다는 사람이 제인이었어?”

바로 한스를 도와주기 위해.

한스가 감동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서프라이즈 선물을 받은 표정이었다.

이번 파티에는 한스네 상단 또한 초대되었다. 사업 건과 관련해 주최자에게 초대를 받았다고 한다.

땀 억제제가 본격적으로 생산에 들어가면서 그의 상단과 거래를 트려 함인 듯했다.

한스의 아버지는 바쁘셔서 그가 대표로 참가하게 되었다는데.

평민인 그는 초대한 귀족은 물론이고, 오늘 만나게 될 귀족들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른 귀족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려면 뭔가를 알아야 할 텐데.

도와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귀족들에 대해 아는 것은 누구나 아는 유명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제인은 귀족들의 온갖 가십거리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제인이 속성으로 한스에게 알려주기로 했다.

오늘 초대된 귀족들과 대화를 할 때 어떤 주제를 피해야 하는지.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등등.

내가 음료를 주문하고 온 사이 둘은 어느새 집중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탈리 백작은 땀이 많으니 땀 억제제에 관심을 가질 확률이 농후해. 입 좀 잘 털어서 한 몫 뜯어내 봐.”

“특징을 알 수 있을까? 그분은 초상화를 못 구해서…….”

“전형적인 푸근한 아저씨의 인상인데. 입술 밑에 큰 점이 하나 있으니 알아보기 쉬울 거야.”

나는 두 명이 대화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둘을 그렇게 갈라놓으려고 애를 썼는데. 사람 일이란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나 보다.

“알테미어 자작은 리시안셔스 공작가의 가신이야.”

나는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카르시온의 가문이 언급되자 흥미가 동한 탓이었다.

“아, 그건 알고 있어. 자작이 얼마 전, 한 레스토랑에 가서 주방장을 반송장이 될 때까지 때렸다며?”

“응. 음식에 머리카락이 나왔는데 자신과 직원들 머리카락이 절대 아니라며 극구 부인한 모양이야.”

한스가 주방장에게 이입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하필 결벽증이 있는 자작에게 걸린 게 안타까운 일이지.”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럼 자작은 어떻게 직원들의 머리카락이 아닌 걸 확신했대? 머리카락 색이 전부 달랐나.”

“자작은 심각한 탈모거든.”

“어……?”

내 반응에, 제인이 확인 사살을 해 주었다.

“맨들맨들해.”

“몇 가닥조차도……?”

“응. 없어.”

아아……,

주방장, 이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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