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확실히, 잘못을 회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건 주방장의 잘못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반송장으로 만들었다는 건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에게 평민은 가축이나 다름없는 걸까.
자작이 리시안셔스의 가신이라고 하니 어쩐지 더욱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았다.
나는 애써 스스로를 위안했다.
어차피 내가 리시안셔스 공작가와 연관될 일은 없는데 뭐.
……이게 더 슬프네.
상처만 남은 어설픈 위로였다.
* * *
파티장에 도착한 우리는 각자 초대장을 보여 준 후 입장했다.
제인은 내 동행인으로 입장을 하려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도 초대장을 가지고 있었다.
우연히 받게 되었다는데. 이렇게 겹치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파티장에 들어서고 제인의 눈이 빠르게 장내를 훑었다.
그녀의 스캔이 끝나자 한스가 눈치 좋게 물었다.
“어디가 좋을까?”
제인은 부채를 살랑이는 척하며 한 곳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한스의 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아까 알려 준 호구 귀족 몇이 모여 있는 거 보이지? 잘해 봐.”
“고마워. 네가 응원해 준 만큼 잘 후려치고 올게.”
제인의 응원을 받아서 그럴까. 굉장히 파이팅 넘치는 모습이었다.
둘은 생각보다 잘 맞는 콤비인 것 같았다.
……호구 등쳐먹을 생각이 가득하다는 점만 빼면.
한스가 떠나고 제인은 먹을 것을 가져오겠다며 잠깐 자리를 떴다.
홀로 남은 나는 여기저기 둘러보기 시작했다.
분명 파티장에 처음 와 본 것이니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했던 것과 별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금세 지루해졌다.
“리엔, 지루해 보이네.”
금방 돌아온 제인은 붉은 포도주가 담긴 와인 잔을 내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나는 술을 마시면 어떡하냐고 타박하려다가 그녀가 나보다 나이가 많음을 떠올렸다.
친구 같기만 했던 제인이 성인이라니. 새삼 신기했다.
……가 아니라!
“해는 바뀌었지만, 너 아직 생일 안 지났잖아?”
라그라스 제국은 18세의 생일이 지나면 성인으로 인정받았다.
제인이 올해 성인이 되는 건 맞지만, 생일은 지나지 않았으므로 당당히 마실 수 있는 건 아니란 거다.
그녀가 키득키득 웃으며 내 손에 와인 잔을 쥐여 주었다.
“포도 주스야.”
뭐야. 속았네.
나는 탄식 같은 웃음을 흘리며 그녀가 건넨 포도 주스를 기꺼이 받아 홀짝였다.
그러던 중 잠시 시선이 한스에게로 향했다. 그는 어려움 없이 귀족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귀족 자제들은 어려서부터 사업체를 운영하는 경우가 흔했다.
우리 또래가 어른들과 사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게 보기 힘든 일은 아니라는 거다.
때문에, 사업 물 좀 먹은 귀족들은 섣불리 나이로 판단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스처럼 아무 교육 없이 실전에서 저런 기지를 발휘하는 건 더욱 쉽지 않을 터였다.
“스승인 누구는 뿌듯하겠어.”
잔을 내밀자 제인이 짠하고 유리잔을 부딪쳐 왔다.
“제자가 유능한 거지. 그보다 리엔. 너는 춤 안 출 거야?”
“응.”
빠른 대답에 제인이 짓궂은 웃음을 지어내며 다시 한번 물었다.
“카르시온만큼 잘생긴 영식이 네게 춤을 신청해도?”
……와. 그건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는데.
“그래도 안 출 거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카르시온은 아니지 않은가.
“대답이 조금 늦은 것 같은데.”
“착각일걸.”
뻔뻔하게 눈썹을 들어 올리자 제인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럼 파티장은 왜 온 거야? 한스를 도와주러?”
“아니. 이모께 부탁해서 파티 초대장 몇 개를 받았는데 그중 하나가 한스가 받은 초대장과 겹치더라고. 그래서 겸사겸사.”
제인은 입술에서 잔을 떼며 의외라는 듯 물었다.
“먼저 부탁드렸다고? 네가 파티를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그냥…… 궁금해서.”
“아하. 이번이 처음 오는 거야? 그럼 궁금할 수는 있겠다. 나는 네가 같이 파티를 가자고 해서 무슨 일인가 했네.”
“뭐, 그냥 파티일 뿐인데 다른 이유가 있었겠어?”
있었다.
렉스 베고니아를 마주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에르한에게 엿을 먹이기 위해.
이곳은 베고니아 공작가가 주최한 파티가 아니었다.
에르한은 지금쯤 파티장에 도착하지 않는 나를 기다리며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겠지.
파티가 끝나고 나를 만나면 뭐라 윽박지를까 고민하고 있을지도.
그런데 어쩌나. 나는 백작가로 돌아가지 않을 건데.
이미 에르한을 제외한 백작가의 식구들에게 인사를 한 상태였다.
일주일 만에 돌아가려는 나를 어찌나 붙잡으시던지. 누가 봤으면 평생 못 보는 줄 알았을 거다.
짐도 이미 마차에 다 실어 놨고…….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파티를 즐긴 후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것뿐.
나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머금었다. 어딘가 상큼하기까지 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나저나 한스는 제인에게 춤 신청 안 하려나? 좋은 기회일 텐데.
나는 제인에게 넌지시 물었다.
“너는 춤 출 생각 없어?”
“나보다는 네가 고민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춤 안 춘다니까.”
제인이 과연 그럴까? 하는 얼굴로 내 뒤쪽을 턱짓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설마 하며 몸을 돌려 뒤를 바라봤다.
“……카온?”
그를 마주하자 반가움보다는 얼떨떨하고 묘한 기분이 앞섰다.
한스와 겹치는 건 그렇다 해도, 제인부터 카르시온까지 이렇게 우연이 겹칠 수 있나?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요즘 렉스 베고니아의 꿈을 꿨더니, 괜한 의심까지 사서 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생각을 털어 내고는 카르시온을 바라봤다.
지금 보니 파티장에 걸맞게 그도 연회복을 빼입고 있었다.
매일 똑같은 옷을 입은 모습만 보다가 작정하고 차려입은 것을 보니 감탄이 나왔다.
교복을 입고 있어도 귀티가 은연중에 흘러나온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교복을 벗은 카르시온은 귀공자 그 자체였다.
감탄하고 있던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뒤늦게 그의 굳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카온.”
내가 카르시온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고개를 휙 돌리며 심장을 부여잡았다.
“윽, 자, 잠시만.”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제인을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가 내 귀에 소곤거리며 뭔가를 말했다.
“그거 알아? 사실 카르시온은 우리가 들어올 때부터 파티장에 있었어.”
“뭐? 근데 왜 진작 인사하지 않은…….”
“널 보고는 계속 저 상태이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온 거거든. 가까이서 보니까 다시 혼이 나갔나 봐. 오늘 네가 보통 예뻐야지.”
제인이 카르시온을 곁눈질하고는 파르르 떨리는 입가를 가리려 부채를 펼쳤다.
유일하게 드러난 눈동자마저 웃겨 죽겠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아. 그래서…….
나는 아직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카르시온을 바라봤다.
소심하기 짝이 없는 반응이었다. 솔직히 좀 오버스럽기도 했고.
그런 식으로 반응하면 내가 좋아할 줄 아나?
……정답이다.
귀여워 죽겠네, 진짜.
문득 궁금해졌다. 저기에 기름을 부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때마침 제인이 눈치 좋게 내 와인 잔을 가져간다.
나는 가벼운 웃음을 걸치며 과장된 동작으로 카르시온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제가 영식과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어요?”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는지, 오른쪽으로 돌아가 있던 그의 얼굴이 삐걱이며 나를 향했다.
카르시온은 멍하니 내 손을 바라봤다.
음. 거절당하면 조금 창피할 것 같은데.
하지만 그 생각은 기우였다.
카르시온은 오래 지나지 않아 내 손을 잡아 왔다. 퍽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레이디.”
하지만 붉어진 얼굴은 그의 심리 상태를 그대로 내보이고 있었다.
카르시온이 댄스 플로어로 나를 이끌었다.
지금 나오고 있는 음악은 파트너의 허리에 손을 올려야 하는 춤과 맞는 것이었다.
나는 또 재미있는 장면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얄궂게 웃었다.
“허리에 손 올리시죠, 영식.”
내 말에 카르시온이 잠시 몸을 움찔했다가 천천히 내 허리에 손을 올렸다.
얼굴은 여전히 터질 듯 붉었으나, 생각보다 얌전한 반응이었다.
나는 의아함과 불쾌감이 동시에 떠올랐다.
불쾌감?
의아함은 그렇다 해도, 이 알 수 없는 불쾌감은 뭐지?
나는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깨달았다. 분명 이건…….
질투였다.
나 말고 다른 영애들이랑 춤을 많이 춰 봤기에 저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었던 거겠지.
화가 나면서도 고작 이런 일에 질투심을 느끼는 내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건 내가 카르시온에게 뭐라고 할 게 못 되었다.
귀족들에게 사교계 활동은 필수적인 것이고, 춤은 좋건 싫건 출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기분이 저 아래 깊은 곳까지 가라앉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자연스러운 터치는 무어란 말인가.
조금이라도 주저하는 모습을 보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아카데미에서 춤을 배울 때, 나와 파트너였던 사이먼이 더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그때 사이먼이 내 허리에 손을 얹게 하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는지 모른다.
춤 연습 이후에는 대화 한번 섞어본 적 없는 사람처럼 굴었지만.
어쨌든 그가 부끄럼을 탔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애써 튀어 오르는 감정을 갈무리하고는 카르시온을 바라봤다.
그는 실전에서 처음으로 춤을 춰보는 나를 능숙하게 리드했다.
“이런 파티에 자주 왔나 봐?”
나는 말을 내뱉자마자 아차 하며 후회했다.
……이게 아닌데. 이렇게 비꼬듯이 말하려고 했던 게 아닌데.
내 감정을 알아챌까 불안한 마음에 볼 안쪽 여린 살을 깨물고 있을 때였다.
카르시온이 어느 순간 고개를 훅 숙이며 낮게 속삭였다.
“사실 나, 파티 싫어해.”
“……그럼 여긴 왜 왔어?”
“갑자기 파티에 오고 싶더라니, 널 만나려고 그랬나 봐.”
카르시온이 선수 같은 말을 뇌까리며 사르르 눈을 접었다.
그런 말은 달아오른 얼굴부터 숨기고 말했으면 하는데.
“여유로운 척하기는.”
저 여유 가득한 모습에 심술이 올라왔다.
나는 타이밍에 맞춰 앞쪽 발로 그의 구둣발을 콱 밟았다.
“미안, 실수.”
그래도 뒷굽으로 밟지 않은 게 어디야.
카르시온은 아프지도 않은지 일그러짐 하나 없이 다정히 웃었다.
“괜찮아. 이런 잔 실수야 누구나 할 수 있지.”
“이래도?”
이번에는 일부러 한 게 명백히 드러나도록 지그시 발을 밟았다.
화룡점정으로 몇 번 비벼 주기까지 했다.
이제야 일부러 그랬다는 것을 눈치챈 듯 카르시온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미안. 아프기를 바란 거였으면 제대로 반응해 줬을 텐데. 내가 눈치 없었네.”
유쾌해 보이는 얼굴에 나는 그만할 말을 잃고 말았다.
화를 내야지, 왜 웃는 거야……?
분풀이에 가까운 행동이었잖아.
너는 내가 화를 낸 이유도 모르고 당한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