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내 앞에서 언제나 바보처럼 웃기만 하는 카르시온에게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다.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작은 질투조차 조절하지 못해 그에게 분풀이하는 꼴이라니.
카르시온에게 별거 아닌 일로 질투하지 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내 이중적인 모습에 자괴감이 몰려왔다.
카르시온이 질투하는 모습은 귀엽기만 했는데. 나는 어쩌면 이렇게 추잡스러워 보일까.
혼란한 마음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음악은 끝난 상태였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르시온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리엔. 내 생각이 맞을까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그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붉은 입술을 열어 목소리를 냈다.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몸을 파드득 떨었다.
들켜서는 안 될 무언가를 들킨 기분이었다.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런 거 아니거든……!”
나와 반대로 카르시온의 얼굴에는 서서히 웃음꽃이 피었다.
평소와 완전히 반대되는 상황이었다. 그가 여유롭게 말했다.
“믿음이 갈지 모르겠지만, 네가 첫 춤이었어. 앞으로도 너 말고 다른 사람과는 추지 않을 거고.”
카르시온이 나와 잡은 손을 들어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러니까, 화 풀어 주라. 응?”
나는 그의 말과 행동에 마법처럼 마음이 녹아내리고 말았다.
……그가 유능한 마법사라는 걸 잊고 있었지 뭐야.
* * *
자정에 가까워진 시각.
시끌벅적했던 파티는 어느덧 끝을 달리고 있었다.
한 명 두 명 작별 인사를 하며 파티장을 빠져나간다.
그런 파티장을 벗어나 휴게 공간으로 마련되어 있는 어느 한 방 안.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가 에르한의 목을 틀어쥐었다.
“크윽!”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자, 잠시만 이것 좀 놓고 말하자 렉스!”
에르한을 바라보는 렉스의 표정은 섬뜩함이 절로 올라오리만치 무감정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파티에 데려오겠다고 큰소리치지 않았나?”
“그, 그게 그러니까,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준비하는 걸 봤는데……!”
“그 입에서 제대로 된 변명이 나오지 않는다면 찢어 버릴지 몰라.”
“흐, 흐윽……. 미, 미안해. 이 밤에 도망을 치지는 못했을 거고, 지금이라도 찾아서 네 앞에 끄, 끌고 올까?”
“변명하라고 했더니 왜 다른 쪽으로 말이 샐까.”
근데 그것도 나쁘지 않네.
에르한의 말이 다소 만족스러웠는지 그의 손에 힘이 빠졌다.
목에 가해졌던 힘이 풀리자 에르한이 제 목을 잡고는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렉스는 빙긋 웃으며 구둣발로 에르한을 지그시 밟았다.
“지금은 내가 개인적으로 만날 수 없다는 거 알잖아, 에르한.”
“그, 그렇지.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
“흐음. 리엔이 아직도 내게 많이 토라져 있나 보다.”
그의 말에는 크나큰 어폐가 있었다.
토라져 있다니.
리엔이 그에게 가진 감정은 절대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리엔이 나를 싫어하는 걸까?”
“아, 아니야. 걔가 너를 싫어한다니 무슨!”
렉스는 정말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럼 대체 왜 날 피하지? 공작 부인의 자리까지 약속해 줬는데 말이야. 내가 못 미더웠던 걸까?”
“처, 첩이 아니라 공작 부인?”
“……왜? 너도 못 믿겠어? 내가 못할 것 같아?”
“아, 아니. 네가 바라서 이루어지지 않은 일은 없었잖아. 나, 난 너를 믿어.”
렉스가 달달 떨고 있는 에르한을 고요히 들여다봤다.
그 모습에서 무언가를 깨달은 듯 렉스가 입맛을 다셨다.
“아. 그래서 나를 피했나.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증거가 필요해서?”
그의 입매가 고양감에 비틀렸다.
“리엔이 원한다면……. 조금 이르긴 하지만 선물을 준비해야겠네.”
* * *
파티가 끝나고, 나는 아카데미로 돌아왔다.
파티장에서 카르시온을 만난 날.
그에게 이제 아카데미로 돌아갈 거라는 걸 넌지시 말해 주었다.
카르시온은 고민하는 척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짐을 챙겨 바로 아카데미로 왔다.
나는 그가 나를 따라올 줄 알고 있었으면서도 말리지 않았다.
한적한 아카데미에서 우리는 긴 방학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만났다.
가볍게 산책을 하기도 했고 식사도 함께했으며, 동아리실에서 같이 낮잠을 자기도 했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 선을 긋지 않기로 했다.
친구 이상이 되었다가 관계가 틀어지면 다시 전과 같은 사이가 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졸업 후에는 헤어짐이 예정돼 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나 홀로 마음을 눌러 담기에는 퍽 억울했다.
그도 좋아하는 마음을 저렇게 표출하고 있는데, 나는 왜 참아야 하지? 왜 숨겨야만 하지?
나는 마법서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카르시온을 응시했다.
얼마간 그러고 있자, 시선을 느낀 그가 고개를 들어서 나와 눈을 맞춘다.
“리엔? 무슨 할 말 있어?”
새파랗게 빛나는 그의 벽안을 들여다보자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온 세상에 우리 둘만 남은 기분이었다.
이 시간이 너무 달콤해서, 나중에 어떻게 되든 나는 지금을 즐기기로 했다.
“그냥. 널 보고 있으니까 기분이 좋아서.”
공중에 부유하고 있던 마법서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카르시온이 커진 눈으로 소리쳤다.
“뭐, 뭐야.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건 반칙이잖아……!”
“그게 반칙이면 네 얼굴도 반칙이지. 누가 그렇게 잘생기래?”
내 발언에 카르시온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며 나를 살폈다.
“그렇지 않아도 뭔가 이상했어. 리엔, 요즘 왜 그래?”
“내가 뭘?”
“왜 날 밀어내지 않는 거야? 귀찮다는 눈으로 쳐다보지도 않고, 날 보며 한숨 쉬지도 않고. 결정적으로 왜 매일 만나 줘? 무슨 일 있어? 도움이 필요한 거야?”
나는 눈을 흐리게 뜨며 과거의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생각보다 철벽을 세게 치고 있었구나.
“도움이 필요한 거라면 이러지 않아도 돼. 대가는 필요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해서 도와줄게.”
심각해진 카르시온을 보니 뭔가 단단히 오해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거 아니야. 이제 조금 솔직해지기로 한 거지.”
“솔직?”
카르시온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게 달아오른다.
나는 카르시온이 더 깊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의 분홍색 머리카락을 마구 문질렀다.
벌써 내 마음을 눈치채기를 원하지 않았다. 천천히 차근차근 깨닫기를 바랐다.
“맞다, 카온. 나 내일은 약속이 있어서 못 만날 것 같아.”
카르시온의 얼굴이 충격이 번졌다. 매일 만나는 게 익숙해졌더니 더욱 서운한가 보다.
“……누구랑 만나는데?”
“작년부터 내가 사업에 도움을 드리고 있는 분이 있거든.”
그 사업이 연애 사업이라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괜찮겠지.
“아…….”
도움이라는 말에 그가 대충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표정을 했다.
내가 언제부터 오지라퍼 이미지가 된 걸까.
하지만 아저씨와는 오지랖으로 시작한 관계가 맞았으므로 차마 뭐라고 반박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호의였는데, 지금은 나도 조언하는데 재미를 붙여서 종종 연락하고 있어.”
“오래 걸리는 일이야?”
그가 무언가 간절히 바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예전이었다면 모르는 척 오래 걸리는 일이라며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점심시간쯤 만나기로 했으니 헤어지면 동아리실로 올게. 그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어?”
카르시온이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애원하는 표정을 지어내긴 했으나 내가 정말 만나 줄 줄은 몰랐나 보다.
“싫으면 만나지 않아도 괜찮아.”
카르시온은 그제야 눈을 접으며 배시시 웃었다.
“나는 그 기다림마저 좋은걸.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 그런데 말이야 혹시 그 만나기로 한 사람…….”
그는 진지해진 얼굴로 잠시 뜸을 들였다. 뒤에 나올 말을 알 것 같았다.
“남자야?”
으이구. 네가 그걸 왜 안 물어보나 했다.
나는 옅은 미소를 걸치며 카르시온의 벚꽃색 머리카락을 살살 쓸며 정리했다.
“남자분은 맞아. 근데 그분은 유부남인 데다가 애까지 있고, 정말 사업 쪽으로만 관심 있는 분이시니까 걱정하지 마.”
그는 내 손길을 얌전히 받아들이면서도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아랫입술을 물었다.
나는 그의 볼을 쿡 찌르며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확인한답시고, 감시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지?”
“리엔이 하지 말라면 안 할게.”
“하려고 했어?”
“……아니.”
반 박자 느린 대답에 나는 쓰게 웃었다. 이건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카온. 나는 누군가가 음침하게 내 뒤를 캐고 다니면 좀 무서울 것 같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는 느낌은 상상조차 하기 싫어.”
내 눈과 마주한 카르시온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미안해.”
그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푹 숙였다.
달려 있지도 않은 강아지 귀가 축 늘어져 보이는 착각이 일었다.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너무 심하게 말했나.
“사과받자고 말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그는 도통 표정을 풀지 못했다.
마치 큰 죄를 저지른 사람처럼.
애처롭게까지 느껴지는 모습에 말을 너무 단호하게 했나 싶어,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카르시온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렉스 베고니아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공교롭게도 렉스 베고니아와 카르시온은 비슷한 점이 꽤 됐다.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공작가의 후계자라는 점.
나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는 점.
마지막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정상인의 범주를 벗어났다는 점까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둘이 나를 대하는 방식은 극과 극을 달렸다.
그랬기에 카르시온에게는 거부감이 일지 않았고, 오히려 좋아하게 된 상황까지 이르게 된 거겠지.
렉스 베고니아를 떠올리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런 내 감정을 눈치챈 듯 구석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있던 도비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끼이잉…….”
도비는 카르시온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내 손을 핥았다. 나는 그 모습에 우울했던 것도 잊고 피식 웃었다.
얼마 전 카르시온이 기세등등한 얼굴로 도비와 서열 정리를 했다고 말하더니 정말인가 보다.
어떻게 정리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카르시온이 도비가 내게 달라붙은 것을 발견하고 불호령을 내렸다.
“당장 리엔에게서 떨어져, 늑대 새…… 야!”
나는 그의 절제력에 작게 감탄했다. 새 뒤에 뭔가가 급히 생략된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