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카르시온이 험악하게 노려보자 도비는 내 품으로 들어와 머리를 숨기며 낑낑거렸다.
“아이고. 늑대가 어떻게 이리 겁이 많을까.”
도비가 개가 아니라 늑대라는 것은 안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당연히 개인 줄 알았는데, 천진난만했던 도비의 얼굴에서 점점 늑대의 모습이 보이는 거 아닌가.
날개가 달렸으니 완전히 늑대라고 하기도 뭐하지만.
번식은 할 수 있으려나. 나중에 크면 참한 암컷 늑대를 한 마리 소개해 줘 봐야겠다.
설마 개가 아니라 새랑 번식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머릿속으로 실없는 생각을 이어나가고 있을 때였다. 카르시온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리엔.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앞으로는 네가 생각하는 일은 없을 거야.”
내 쪽은 코미디인데 저쪽은 신파극이었네. 나는 그의 처진 어깨를 호기롭게 두드렸다.
“알겠으니까 표정 풀어.”
누가 보면 죽을죄를 지은 줄 알겠다.
* * *
이튿날.
약속한 식당에 도착해 보니 아저씨가 단정한 차림으로 자리에 앉아 계셨다. 오늘도 여전히 빛이 나는 외모였다.
“아저씨. 저 왔어요.”
그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는 의외라는 듯 말했다.
“일찍 왔군.”
“우리 대고객님 만나러 오는 건데 늦을 수 없죠.”
장난치듯 말하자 아저씨는 설핏 웃으며 긴 다리를 꼬았다.
“그런가.”
나는 아저씨의 앞자리에 앉으며 헤헤 웃었다.
아저씨의 앞에 서면 괜스레 웃음이 나는 것 같았다.
아내분께 절절매는 모습을 볼 때면 돌아가신 아빠 생각이 나서 정이 간다고 해야 하나.
아저씨가 내 생각을 알면 기분 나빠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나는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의 안부 겸 상황을 물었다.
“요즘은 집에 뭐 있으세요?”
“미모의 여인.”
……?
이 아저씨가…….
너무 뻔뻔스럽게 말해서 내가 뭘 잘못 질문한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 미모의 아내분과 다른 일은 없었냐는 물음이었어요.”
아저씨는 알고 있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의외로 장난도 치는 성격이신가 보다.
“요즘은 불화 없이 잘 지내고 있다. 다 네 덕이지.”
“에이, 제가 뭘요. 아저씨가 훌륭히 해내신 덕분이죠.”
“오늘은 그거 말고 다른 이야기가 있어서 만나자고 한 거다.”
“다른 이야기요?”
세상에. 아저씨가 아내분 말고 다른 이야기를 나눌 줄 아는 사람이었다니……!
심히 궁금증이 올라왔다.
“그게 뭐죠?”
“전에 네가 말한 남는 아들 이야기 말이다.”
“남는 아들이요?”
나는 저게 무슨 소리인가 멀거니 눈을 깜빡였다. 잠시 그러고 있으려니 문득 내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저씨의 상탈 앞치마 장면을 상상해 보고는 남는 아들이 없냐는 망발을 지껄였었지.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때는 제가 잠깐 정신이 나갔었다고 변명하려는데 아저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금 눈치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거 아직도 유효한가?”
“……네?”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떠올랐다.
정말 아들을 내게 줄 생각이신가? 홧김에 한 말은 맞지만 반쯤은 장난이었는데…….
나는 하하 웃으며 멋쩍은 표정으로 볼을 긁었다.
“전 연하는 취향이 아닌데요.”
돌려 말하기는 했으나, 명백한 거절이었다.
“그 말인즉슨, 연하가 아니면 괜찮다는 말인가?”
혹시 어릴 때 사고를 쳐서 장성한 아들이 있는 건가?
아니면 나이가 있는 아들을 입양했다든지……?
나는 급해진 마음에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연상도 별로 안 좋아해요.”
“다행이군.”
“하하. 죄송해요. 제 취향이 좀 까다롭……네? 뭐가 다행이죠?”
아저씨는 무언가 흡족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내 아들은 너와 동갑이다.”
나는 놀라 입을 쩍 하고 벌렸다. 설마 했는데 정말 나랑 비슷한 또래의 아들이 있다고?
심지어 동갑?
“아저씨는 대체 몇 살 때 사고를 치신 거예요?”
놀라서 묻자 아저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성인이 된 후에 가진 아이다.”
그럼 아저씨는 아무리 못해도 최소 삼십 대 중반이라는 건데.
저 젊은 외모가 삼십 대 중반? 게다가 최소였으니 후반일 수도, 어쩌면 40대일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사기다, 사기야.
세상의 불공평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을 때였다.
어?
생각해 보니 아내분이 성인일 때 가졌다는 말은 없었다. 분명 아저씨보다 연하라고 하셨지.
그렇다면……?
이번에는 경악 어린 표정으로 아저씨를 바라봤다. 내 눈빛에 담긴 혐오를 읽어 냈는지 아저씨가 급히 입을 뗐다.
“물론 아내도 성인일 때다.”
나는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아저씨를 손절해야 하는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다시 본론에 들어갔다.
“다른 걸 다 제치고서라도 아드님이 저를 마음에 안 들어 할 것 같은데요.”
귀족 영식이라면 평민에, 부모 없는 여자애를 좋아하진 않을 거다.
나에게 빠진 이들이 특이 케이스였던 거지.
아저씨도 알고 있었던 사실인지 미간을 좁히며 혀를 찼다.
“바로 그게 문제지.”
“제일 중요한 문제잖아요. 아들 인생을 그렇게 막 결정하시면 안 되죠.”
“뭔가 오해를 하는 모양인데…….”
“오해요?”
“내가 문제라고 생각한 부분은 아들의 성격이었다. 아들이 네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지.”
아저씨의 못마땅한 표정을 보니 진심으로 한 말인 듯했다.
“결혼시키기에는 네가 너무 아까워.”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황당한 마음에 따지듯 물었다.
“아니죠, 아저씨. 비단 그 문제뿐 아니라 신분은 어떻게 하고요?”
“신분?”
“아저씨 귀족이잖아요. 게다가 그냥 귀족도 아니고 꽤 높은 직위이신 것 같은데.”
그는 턱을 매만지며 느른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흠. 알고 있었군.”
“모르는 게 이상할 것 같은데요.”
지금 우리가 만난 장소만 해도…… 이곳 상가에서 가장 비싸다는 레스토랑이었다.
전에 내가 카르시온에게 밥을 사 주려다가 실패한 그곳 말이다.
나는 큰 지출이 될 것을 감수하고 왔던 것이지만, 아저씨에게는 푼돈에 불과하겠지.
“신분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
“하지만 다른 귀족들의 시선만 해도…….”
그래서 자신이 카르시온을 밀어냈던 것이 아니던가.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신분 차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기에.
렉스 베고니아조차도 내 신분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
그 점에서는 내가 백작 영애가 아닌 평민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어쨌든.
공작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싶더니 입을 열었다.
“망국의 왕녀? 아니면 작은 시골 영지의 남작 영애? 먼 왕국에서 제국으로 유학 온 영애도 괜찮겠군. 선택해라.”
마치 앞마당에 산책 가자 권하는 가벼운 어조였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스케일에 놀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어버버 거렸다.
내가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하자 아저씨는 무슨 오해를 했는지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더 높은 지위를 주는 건 어렵지 않으나 의심을 사게 될 거다. 이 정도로 만족해 줄 수는 없나?”
“아, 아니. 가짜 신분을 만들어 주실 만큼 저를 며느리로 들이고 싶으세요?”
신분 위조는 중죄다.
가짜 신분이 걸리게 된다면 나뿐만 아니라 아저씨까지 처벌을 면치 못할 거다.
“아. 내가 설명을 깜빡했군.”
“……?”
“위조 신분은 그저 네가 다른 가문의 영애들에게 평민 출신이라고 업신여김 받을까 주려 한 것이었다. 작은 선물이었지.”
작은 선물? 위조 신분이?
“게다가 내 아들이 결혼하라는 말을 고분고분 따를 것 같지 않아서 말이다.”
당연하죠. 아저씨는 처음 보는 평민 여자애랑 대뜸 결혼하라고 하면 하겠어요?
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눌러 삼켰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아까는 그건 전혀 문제가 아닌 것처럼 말하시더니……?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리엔, 내 딸이 되지 않겠나?”
“네?”
이건 또 무슨……?
연이은 충격적인 발언에 이제는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농이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내 아내도 딸을 갖고 싶어 했으니 네가 입양된다면 기뻐할 거다.”
“아내분과 상의는 하셨어요?”
아저씨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나는 흐린 눈이 되어 그를 바라봤다.
“아저씨…….”
아저씨가 아내분을 그렇게 넘치도록 사랑하는데 왜 종종 싸움이 나곤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꼬았던 다리를 느릿하게 풀며 오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부모에게는 매달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생활비를 지급하지.”
여기서 놀라운 점은, 그 표정이 전혀 재수 없지 않았다는 거다.
오히려 그의 분위기와 지독히 어울린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제 부모님은 돌아가셨거든요. 지금은 이모께 신세를 지고 있고…….”
부모 있는 아이가 귀족가에 입양을 갈 때는 보통 목돈을 받고는 했다.
드문 경우이긴 하나, 지금 아저씨가 제안한 것처럼 매달 일정 금액을 받기로 약조하기도 했고.
사실 어느 정도 성장한 이후에 입양 제의를 받는 것은 아이에게도, 아이의 집안에도 굉장한 자랑거리였다.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뜻이었으니까.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누구든 이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물론 평민이 귀족가로 입양 간다면, 아저씨가 걱정한 것처럼 알게 모르게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어쨌든 손쉬운 신분 상승의 기회이지 않나.
“그보다, 이쯤 되니 정말 궁금해지네요. 아저씨는 대체 정체가 뭐예요?”
“그건…….”
아저씨는 무언가 고민하듯 테이블을 일정한 박자로 톡톡 쳤다.
밝히기 곤란할 정도의 신분인가……?
나는 참을성 있게 그가 고민하는 시간을 기다렸다. 그러던 도중 창가 밖으로 마차에서 내리는 루카를 발견했다.
방학이 끝나려면 조금 남았는데. 보아하니 아카데미로 며칠 일찍 돌아온 듯했다.
루카의 이름을 부르려 할 때였다. 고민이 끝난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딸이 되어 준다고 약속하면 알려 주마.”
“……그건 당연한 거잖아요. 얕은수에 안 넘어가거든요?”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보자 그가 피식 웃었다.
“아쉽군. 넘어올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