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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62)화 (62/161)

62화

어느덧 다사다난했던 방학이 끝나고,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제인과 함께 등교했다.

“제인.”

“응?”

나는 혹시 은발에 벽안을 가진 고위 귀족을 알고 있냐고 물어보려다가 입을 닫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싱겁긴. 빨리 가기나 하자. 첫날인데 늦겠다.”

제인은 웃으며 내 손을 이끌었다.

그녀라면 아저씨의 신분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저씨의 정체가 궁금한 건 사실이다. 그래서 제인에게 알고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던 거고.

하지만 물어보려는 순간, 괜히 뒤를 캐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만뒀다.

사실 제인에게 묻지 않아도, 아저씨가 정말 고위 귀족이라면 알아내는 것은 금방이었을 것이다.

뭐, 신분을 알게 된다고 해서 아저씨와 나 사이에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

나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 맞다. 내가 리엔 너에게 깜빡하고 못 해 준 말이 있어.”

“뭔데?”

제인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나처럼 복학하는 여자애가 있어. 혹시라도 걔가 너에게 접근하려고 하면 엿을 날려 준 후 내게 도망쳐. 조심해야 해.”

“모르는 애인데 왜 조심해야 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제인의 목소리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그 여자애가 카르시온을 좀 광적으로 좋아하나 봐.”

“아하.”

……하여간 인기도 더럽게 많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하지만 전에 있었던 퇴학 사건 이후 내게 시비를 거는 애들은 없었는걸.”

“놀라지 말고 들어. 걔는 카르시온과 같은 학년에 다니려고 휴학한 애야.”

“뭐?”

고작 같은 학년에 다니기 위해서 1년을 버렸다고?

이런 미친.

역시 세상은 넓고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은 많구나.

제인의 말대로 조심해야겠다는 다짐을 할 때였다.

“그런데, 리엔.”

“응?”

제인이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진짜 아카데미 건물 한 동이 무너졌던 거 맞아?”

“응. 카온이 반쯤 폐허가 된 건물을 그 자리에서 복구시켰어.”

건물을 복원할 수 있다는 게 농담인 줄 알았는데, 그는 내 눈앞에서 그것을 증명해 보였다.

시간을 되돌린 듯 부서진 건물들의 잔해가 조각조각 맞춰지는 장면은 실로 경탄스러웠다.

마법이 아니라 마치 신이 권능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만큼 장관이었다는 뜻이다.

제인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놀란 얼굴을 했다.

“그게 가능해?”

“나도 카온의 마법 실력이 뛰어난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인 줄은 몰랐어.”

천재 수준이 아니라 탈 인간 수준이라고 불러야 마땅했다.

하긴 카르시온의 몸 주위로 마나가 실체화된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거대한 마나를 타고 났는지 알 수 있었다.

거기에 좋은 머리까지 더해졌으니 마법 실력이 떨어진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거다.

그의 경이로운 능력에 거리감이 느껴지기보다는 뿌듯함이 밀려들어 왔다.

“카온은 대체 모자란 게 뭘까?”

제인이 호응해 줬으면 해서 한 말이건만, 그녀는 슬쩍 시선을 돌리며 외면했다.

“글쎄…….”

“역시 너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러자 제인이 경악하며 몸서리를 쳤다.

“리엔. 나는 솔직히 가문만 빼면 카르시온보다 네가 훨씬 잘났다고 생각해.”

“……칭찬은 고맙지만, 너는 나에 대한 객관화가 좀 필요할 것 같아.”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하듯 말했다.

“아니, 진짜야. 게다가 카르시온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게 빠졌잖아.”

“가장 중요한 거?”

“인성.”

나는 미간을 좁히며 그녀의 말에 반박했다.

“우리 카온의 인성이 어디가 어때서? ……라고 말하기에는 다른 사람에게 조금 무신경하긴 하지.”

말을 하다가 이건 내가 생각해도 아닌 것 같은 기분에 인정하고 말았지만.

“조금이라는 말에 어폐가 있는 것 같은데.”

제인의 깐깐함에 나는 몰래 입술을 비죽였다.

그 정도는 봐주지.

* * *

첫날은 수업이 없는 덕분에 빠르게 끝이 났다.

한 번 배정된 반은 졸업할 때까지 쭉 이어지기 때문에, 적응에 따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동아리도 당분간은 신청, 변경 기간이었기 때문에 딱히 출석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방학에도 매일 출석 도장을 찍던 게 습관이 되어서 그런 걸까. 나는 기숙사에 가기 전 습관처럼 동아리실에 들렸다.

“어? 다들 와 있었네.”

동아리실에는 카르시온과 피오르 둘 다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리엔 왔어?”

카르시온이 방긋 웃으며 반겼다. 나는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카르시온은 나랑 매일 동아리실에서 만났으니 그렇다 치고, 피오르 너는 웬일이야?”

“뭐, 내가 못 올 곳을 온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주억이자 피오르가 피식 웃었다.

“사실 네가 안 오면 어떡하나 걱정했었는데 다행이다. 너희에게 할 말이 있었거든.”

그렇게 말하는 피오르의 낯이 어쩐지 씁쓸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얼굴 또한 못 본 사이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나는 가방을 대충 던져 놓고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할 말이 뭔데?”

“나 월반 신청하려고.”

“월반?”

나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상치 못한 파격적인 행보였다.

하지만 그의 선택에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왜 갑자기 그런 선택을 하려고 하는지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아레나 아카데미의 월반 제도는 다소 특이했다.

월반 신청을 하게 되면 그 학생은 즉시 모든 학년의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원하는 때에 원하는 수업에 가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거다.

월반 학생은 그렇게 수업을 듣다가 본인이 원하는 때에 졸업 시험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는 수업을 듣지 않고 바로 졸업 시험을 치르는 것도 가능했다.

다만, 월반 신청으로 보는 졸업 시험은 일반 졸업 시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게다가 한번 신청하면 최소 일 년은 월반 학생으로 지내야 했다.

졸업하든지 일 년 유급하든지 둘 중 하나라는 뜻이다.

때문에,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도 어지간해서는 정상적인 교육 과정을 밟았지, 피오르처럼 모험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딱히 큰 이유는 없어.”

피오르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올라간 그의 양쪽 입꼬리가 파르르 떨려 왔다.

억지로 끌어 올린 게 분명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피오르의 그 얼굴을 보니 상황이 어느 정도 짐작됐다.

월반으로 조기 졸업을 하려는 걸 보면 빠르게 졸업해야만 하는 상황인 거다.

형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했지. 아무래도 그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다.

“피오르. 사연 있는 얼굴로 그런 말을 하면 설득력 없다는 거 알아? 나는 네가 충동적인 선택은 하지 않았으면 해.”

“충동적인 선택이 아니야. 이렇게 시간을 버리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지.”

나는 말을 아꼈다.

그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귀에 들어오지 않을 터였다.

“그럼 동아리는?”

월반 학생은 방과 후 활동이 성적에 반영되지 않는다. 원한다면 활동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보통은 참여하지 않았다.

점수에 반영되지 않는데 굳이 시간을 쏟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은근 피오르가 동아리에 남아 있을 거라 생각했다.

우리 동아리는 실질적으로 하는 게 없었으니까. 굳이 나가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너희 둘이 같이 있을 때 말하려고 한 거야. 미안하지만, 졸업 시험에 집중하려면 동아리는 나가야 할 것 같아.”

완전한 거절이었다.

“네게 부담을 주지 않을게. 그냥 이름만이라도 동아리에 남아 주면 안 될까?”

“원하는 대답을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피오르는 씁쓸해 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카르시온을 곁눈질했다. 그는 생각보다 더욱 덤덤한 얼굴로 피오르를 응시하고 있었다.

“후회할 결정만 하지 마라.”

짧고 담백한 말에 피오르가 힘없이 웃었다.

“동아리에 미련 없어.”

거짓말이었다. 그의 눈은 미련으로 가득했다.

“그거 말고 조기 졸업 말이야.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라고.”

“……응.”

그 말을 끝으로 피오르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동아리실을 걸어 나갔다.

카르시온과 덩그러니 남은 동아리실에서 나는 나지막이 말했다.

“피오르가 빠지면 한 명 더 구해야겠네. 동아리 최소 인원 세 명이잖아.”

“동아리 이름도 바꿔야겠지.”

아…….

그 말에 내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제 피오르는 우리 동아리가 아니니까, 그의 이름이 들어간 동아리명은 쓰면 안 되겠지.

“그래야겠네.”

입 안이 썼다.

* * *

동아리실을 나와 기숙사로 돌아가는 도중 쿤을 만났다.

그에게 넌지시 동아리는 어떻게 할 거냐 물으니, 그는 이미 들어가기로 한 동아리가 있단다.

어떤 동아리냐고 묻는 말에 그는 어울리지도 않게 얼굴을 붉히며 비밀이라고 했다.

이번에 새로 개설된 동아리라고 하던데.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떳떳한 동아리는 아닌 것 같았다.

가라앉은 기분으로 기숙사를 들어가니 안쪽에서 도비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얼결에 도비를 폭 안게 된 나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네가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네.”

도비를 쓰다듬고 있으려니 제인의 설명이 날아왔다.

“도비가 날아와서 창문을 긁길래 열어 줬어. 기분 나쁜 건 아니지?”

“기분이 나쁠 리가. 그래도 성체가 되기 전에 이쪽으로 날아오지 못하도록 교육해야겠다.”

도비는 다른 사람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몸집이 작을 때야, 큰 새 정도로 착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멀리서 봐도 평범한 새가 아니라는 게 구별이 될 정도였다.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도비를 안고 안으로 들어가자 옷에 수를 놓던 제인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리엔, 너 무슨 일 있었어?”

놀랍게도 그녀는 단번에 내 기분을 파악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나는 서둘러 얼굴을 더듬어 봤다. 분명 웃고 있었는데.

제인은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너는 얼굴이 아니라 분위기에서 다 티나. 뭔 일인데 그래?”

“실은…….”

나는 피오르가 월반하겠다 선언했던 일을 말했다.

제인에게 말하고 나니 조금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그랬구나. 복잡하게 됐네. 새로운 동아리 부원도 구해야 하고.”

“동아리의 존망보다는 피오르가 걱정이지. 걔를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고 고민이고.”

“왜? 누구에게 강요받아서 하는 것 같았어?”

“강요보다는 뭔가에 몰려서 충동적으로 한 선택 같았어.”

“그럼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제인이 미간을 좁히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말로 아무리 말려 봤자 듣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거든.”

“흠. 어렵네.”

제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새삼스레 제인이 내 친구라는 사실이 고맙게 느껴졌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갑자기?”

제인이 당황한 듯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새삼 네가 친구라는 게 너무 좋아서.”

“……나를 너무 믿는 거 아니야?”

“그럼 내가 누굴 믿어?”

이상한 말을 한다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자 그녀가 어색한 표정을 했다.

“리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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