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제인은 말을 하다가 말고 입술을 씹었다.
“아니다. 지금은 피오르 일만 해도 복잡할 텐데 나중에 말할게.”
저번에도 비슷한 대화를 했었던 것 같은데.
그때 하려던 말과 지금 하려고 했던 말은 같은 것이었을까?
“나쁜 일이야?”
나쁜 일이냐는 물음에 그녀가 쓰게 웃었다.
“아마도.”
나는 피오르에 이어 제인까지 곁을 떠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함이 들었다.
“혹시 아카데미를 떠난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
“아카데미는 떠나지 않을 거야.”
“그럼 됐어. 네가 준비됐을 때 말해 줘. 기다리고 있을게.”
제인의 눈이 떨려 왔다.
“고마워, 리엔. 그리고……”
미안해.
나는 제인이 주먹을 폈다 접었다 반복하는 모습에 시선이 빼앗겨 뒷말을 듣지 못했다.
저 버릇은 그녀가 도망치고 싶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 나오는 종류의 것이었다.
* * *
리엔은 평소와 다르게 우다다 복도를 뛰었다.
유리창으로 그녀의 얼굴이 반사되어 비쳤다.
숨이 차서 그런 걸까, 아니면 설렘으로 인해 상기된 것일까. 그녀의 양쪽 뺨에는 홍조가 가득 올라와 있었다.
리엔은 혹여나 카르시온에게 들뜬 기분을 들킬까 싶어, 일부러 표정을 굳혔다.
오늘은 리엔이 카르시온과 함께 방과 후 슈 전문점을 찾아가기로 한 날이었다.
요 며칠 리엔의 기분이 다운되어 있는 것을 본 카르시온이 안 되겠다며 꺼낸 비장의 수였다.
그의 필살기는 효과적이었다.
슈를 먹으러 간다는 생각만으로 그녀의 우울했던 감정들이 상당히 날아갔으니까.
리엔은 학생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조금 더 빨리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발을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시야에 익숙한 실루엣이 담겼다.
언뜻 아카데미에서 지나치며 본 적 있는 것 같은 여학생.
그리고……
그 여학생과 진득하게 입을 맞추고 있는 피오르.
리엔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그 장면을 바라봤다.
‘와우. 내가 알던 피오르 그대로네. 역시 나쁜 버릇은 못 고치는 건가……?’
친구의 은밀한 사생활을 목격했다는 배덕감은 잠시였다.
전과 같은 모습에 어쩐지 안심이 된 까닭이다.
리엔은 발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그들을 지나쳤다.
아니, 지나치려고 했다.
순간 피오르의 눈꺼풀이 올라가고, 짙게 물든 그의 녹안과 그녀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피오르는 눈을 뜨자마자 상상도 하지 못한 사람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당황한 건 리엔도 마찬가지였다.
엇, 어어…….
“방해해서 미안. 나는 비켜 줄 테니까 하던 거 마저 해.”
그렇게 말하며 리엔이 자리를 부리나케 벗어났다.
얼마나 뛰었을까.
이제 천천히 걸어도 괜찮겠지 하는 생각에 걸음을 늦출 때였다.
뒤늦게 리엔을 쫓아온 피오르가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멈춰 세웠다.
“리엔!”
리엔은 손의 주인이 피오르인 것을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몸을 한껏 움츠렸다.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다소 큰 반응에 놀란 피오르가 빠르게 사과했다.
“미안. 급한 마음에.”
“괜……찮아.”
리엔은 움츠렸던 몸을 펴고 그를 바라봤다. 그러다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주위를 살폈다.
그는 방금까지 같이 있던 여학생은 어디에 버려두고 자신을 쫓아온 상태였다.
리엔은 조금 흐려진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야, 너…….”
“오해야.”
피오르는 다급하게 오해라며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뭐가?”
“방금 본 거. 리엔 네가 뭘 생각하고 있든 오해라고.”
“무슨 오해……? 네가 그 여자애를 좋아한다는 거? 아니면 가지고 놀고 있다는 거?”
피오르는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어쩌다가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된 건 미안해. 하지만 네 사생활에 참견하지는 않을게. 걱정하지 마.”
사생활에 참견하지 않는다니.
리엔은 자신이 다른 여학생과 입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자신과 무슨 관련이 있나 하는 어조였다.
그 말이 왜인지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찔러왔다.
“근데 궁금하긴 하다. 이제는 마음에 없는 애랑 연애하지 않을 거라며?”
“……결혼할 거야.”
리엔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가볍게 하는 연애라고 생각했는데, 결혼까지 생각할 정도로 감정이 있는 줄은 몰랐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럼 왜 내 앞에서 변명하는 거야, 피오르? 너는 어떤 오해를 풀고 싶은 건데?”
질문이 나오자 피오르는 또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오해를 풀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리엔을 쫓아온 것은 그저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래야만 했을 것 같았으니까.
한참 뒤에 이어진 말은 그조차 알지 못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러게. 나는 어떤 오해를 풀고 싶었던 걸까.”
피오르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허탈해 보이는 걸음이었다.
그는 사실 지금껏 정말 권세 있는 가문의 영애들과는 교제하지 않았다.
제게 후폭풍이 올 수 있었으니까.
그냥 적당히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가문의 여식만 골라 사귀었다.
하지만 이번에 교제하게 된 영애는 지금 한창 사업으로 부흥하고 있는 후작 가문의 귀한 고명딸이었다.
리엔에게 한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결혼까지 갈 생각이었다.
그래야 그녀 가문의 힘을 빌릴 수 있으니까.
자신이 형에게 맞설 수 있으니까.
어차피 귀족 사회에서 정략결혼은 널리고 널렸다. 어찌 보면 조금 시기를 앞당긴 것뿐, 달라지지 않을 미래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순진한 사람을 꾀어서 마음을 이용한다는 죄책감 때문인가?
하지만 그동안 수도 없이 해 왔던 짓이었다. 이제 와 죄책감이 크게 다가올 리가 없었다.
문득 리엔이 자신을 안 타는 쓰레기라고 부르던 게 생각났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는 별명을 타는 쓰레기로 업그레이드해 줬던 것도 같다.
안쓰, 타쓰라고 줄여 부르며 짓궂게 웃던 얼굴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쓰레기였다.
어쩌면 자신은 리엔에게만큼은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생각해 보니 이런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좋은 사람으로 남으면 뭐 해.’
그래 봤자 자신에게 돌아오는 건 없는데.
* * *
“카온. 우리는 엄연히 다른 반인데 누가 보면 같은 반인 줄 알지 않을까.”
“괜찮아.”
“내가 안 괜찮은데.”
우리는 연무장 한복판에서 실랑이하는 중이었다. 그것도 정규 수업 시간에.
시간표가 아직 확정이 나지 않아 카르시온의 반과 겹친 까닭이다.
그가 내 옆에 접착제를 바른 듯 딱 붙어 있으니 자꾸 시선이 우리 쪽으로 몰렸다.
카르시온만 그러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쿤까지 아닌 척 내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카온. 너희 반 쪽으로 가.”
내가 단호하게 딱 잘라 말하자 쿤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못 들었습니까? 리엔이 가라고 하지 않습니까.”
카르시온은 쿤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내게 애원하듯 말했다.
“이렇게 수업 시간에 만나는 건 흔치 않은데, 진짜 쫓아낼 거야?”
“수업 시간이 아니었으면 적어도 쫓아내진 않았겠지.”
나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쿤이었다.
“쿤, 너도 내 주변에서 알짱거리지만 말고 너 할 일 해.”
“자유 시간이지 않습니까.”
“너 때문에 시선이 몰려 불편하니까 제발 떨어져 줘.”
그러자 쿤이 충격을 받은 듯 입꼬리를 내렸다.
반대로 카르시온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듯 쿤을 바라봤다.
“누구는 같은 반인데도 불편하다며 축객령을 받네.”
“그러는 카르시온도 축객령을 받은 건 저랑 별반 다르지 않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게 정신 승리 열심히 해 봐.”
나는 둘의 유치한 말싸움을 지켜보다가 제인의 손을 잡고 연무장 구석으로 이동했다.
카르시온과 쿤이 내 주변에 없는 것만으로도 시선은 많이 분산될 거다.
……라고 생각했는데 카르시온은 멀찍이 떨어진 채 나를 집요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카르시온이 무언가를 열심히 관찰하는 모습에 다른 아이들이 그의 시선을 쫓았다.
결국,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하는 건 나였다는 거다.
이래서는 떨어뜨려 놓은 보람이 없잖아.
나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카르시온을 바라봤다. 시선 좀 돌리라고 눈치를 줄 생각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 같은 모습에, 방금까지 눈치 줄 생각을 하던 것도 잊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번에는 내가 진 것 같았다.
저렇게 밝은 얼굴에 대고 어떻게 뭐라고 하겠어.
요즘 들어 카르시온의 미인계가 더욱 잘 먹히는 것 같아 큰일이었다.
“조만간 웃는 얼굴에 침 뱉는 연습을 해야겠네.”
“오! 나 그거 잘하는데!”
아무렇게나 뇌까린 혼잣말을 들은 제인이 흥분하며 연습 상대가 되어 주겠다 나섰다.
나는 농담이었다며 흥분한 그녀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글쎄, 그게 제인의 장기인 줄 누가 알았겠어.
얌전해진 제인과 함께 이것저것 이야기하던 도중 문득 피오르에게 시선이 갔다.
카르시온과 피오르의 반도 자유 시간을 받아 각자 하고 싶은 운동을 하고 있었다.
피오르는 훈련용으로 제작된 무딘 검을 들고 주변 아이들과 대련 중이었다.
검술 전공인 그가 검을 제대로 다루는 것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나는 제인을 툭 쳤다.
“피오르 말이야. 의외로 검이 잘 어울리지 않아?”
“응. 외양은 곱상해 보이는데 참 희한하지.”
검을 잡은 그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자유로워 보였다. 얼굴에서 즐거움이 묻어 나왔다.
동아리실에서 검을 자신의 목숨이라도 된 듯 소중히 다룰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습관처럼 하던 공부와는 느낌부터가 확연히 달랐다.
복수에 눈이 멀어서 자기가 진짜 원하는 것이 뭔지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피오르가 저번에 후작의 자리 따위 필요 없다는 말을 했었지.
그렇다면 형에 대한 분노만으로 이 지경이 된 게 틀림없었다.
결혼도 그랬다.
피오르의 은밀한 사생활을 목격했을 당시에는 놀라서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빤했다.
피오르는 그 여학생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 집안의 권력이나 돈을 노리고 접근한 거겠지.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인생을 바쳐서 형에게 복수하고 나면 피오르에게 남는 건 뭐지?
나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한숨과 함께였다.
“미련하긴.”
과거에 붙잡혀 사는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그때, 제인이 뭔가를 발견한 듯 내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리엔, 저기 봐. 내가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 애가 쟤야.”
자연스레 그녀가 턱짓으로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