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놀랍게도, 내가 언젠가 마주친 적 있는 사람이었다.
카르시온에게 밥을 사 주기로 했던 날 마주친 그 미친 사람……!
하필이면 카르시온과 같은 반이 됐나 보다.
확 나빠진 기분에 미간을 좁혀 들어갔다. 제인은 옆에서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설명했다.
“이름은 세라. 블렌디 후작가의 차녀야. 욕심이 많고, 안하무인에 무례하기로 유명하지.”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는 카르시온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거의 정반대에 위치한 곳에 자리를 잡고 시선 한 톨 그에게 주지 않았다. 오히려 카르시온을 피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상한 것은 그뿐만 아니었다.
“웬 장갑?”
제인이 나보다 먼저 입을 열어 이상한 점을 지적했다.
그랬다. 그녀는 손목을 완전히 덮는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교복과도, 지금 입고 있는 체육복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디자인이었다.
“그러게, 웬 장갑이지?”
“게다가 아까부터 줄곧 지켜봤는데, 쉼 없이 손목을 주무르고 있더라고.”
“손목?”
“응. 관절이 아픈 건가?”
의문스러운 것투성이였다. 하지만 나는 피오르 때와는 다르게 무심히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그것까지는 우리가 알 필요는 없는 부분이겠지.”
* * *
아직 날이 풀리지 않아 쌀쌀한 오후의 한때.
나는 한스와 만나 추가 의약품 판매에 대해 의논했다.
이것은 이미 방학 때부터 진행해 온 일로, 얼마 후면 벌써 판매를 앞두고 있었다.
“일단 네가 준 레시피가 너무 많아서 몇 개만 추려 선 출시를 하려고.”
“뭐를 선 출시할 건데?”
“왜? 먼저 유통했으면 하는 품목이 있어?”
한스의 물음에 나는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마나 이완제랑 진통제. 다른 건 몰라도 두 개는 먼저 유통했으면 좋겠어.”
마나 이완제는 폭주 직전의 카르시온을 보고 만들게 된 약이다.
마나를 컨트롤하기 어려울 때 먹으면 비이상적으로 뭉쳤던 마나를 풀어 주는 효과가 있었다.
효능이야 사람마다 편차가 있겠지만, 그래도 마법사들이 마나 폭발을 일으키는 빈도 정도는 줄어들 수 있겠지.
진통제는 말 그대로 진통제인데, 사실 성능은 기존의 나온 제품들보다 떨어진다.
하지만 기존의 판매되고 있는 것은 마약성 진통제였기에 부작용이 심했다.
게다가 가격 또한 평민들이 부담하기에는 상당히 값이 나갔다.
내가 한스에게 넘긴 레시피는 몸에 부담이 가지 않는 순한 성분과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기왕 돈을 벌 거라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으로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한스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네 말대로 할게.”
“내가 레시피를 넘겼다는 건 비밀이야. 저번에는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각별히 조심해 줘.”
내가 꽤나 돈을 벌고 있다는 걸 에르한과 렉스 베고니아가 알아서는 안 되니까.
한스는 약간 찔리는 표정을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미안. 앞으로는 조심할게.”
“뭐, 땀 억제제 건은 내 실수였을 수도 있으니 당부는 이쯤 하도록 하고…….”
나는 옅은 웃음을 걸치며 물었다.
“요즘 제인이랑은 어때?”
“헤헤, 마주치면 인사하고 있어! 파티 날 이후로 무시하지 않더라.”
한스는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여 자랑하기 시작했다.
“가끔 제인이 먼저 내게 말을 걸어 주기도 해!”
“오, 진짜? 무슨 대화를 하는데?”
제인에게는 따로 들은 게 없는데, 나 몰래 둘이 무슨 진척이라도 있던 걸까.
“귀족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이나 가십거리 같은 거! 아 맞다, 아까도 제인이 알려 준 소식이 하나 있는데 너도 들을래?”
한스를 바라보는 나의 눈이 짜게 식었다.
살짝 연민이 몰려오는 것도 같았다. 그동안 얼마나 철저하게 당해 왔으면 사적인 대화도 아닌, 정보 교류 정도에 저렇게 신났을까.
나는 한스 앞에서 티 내지 말자고 생각하며 물었다.
“무슨 소식인데?”
“얼마 전 베고니아 공작가의 공작 부인이 별세하셨잖아.”
“뭐?”
내가 당황해서 눈을 키운 사이,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비밀스럽게 말했다.
“그게 오랜 시간 앓고 있던 지병 때문이 아니라, 타살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대. 임종을 지켜본 사람도 없다고 하고……. 의문스러운 점이 한두 개가 아니라나?”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설마. 설마.
설마……!
나는 자리를 박하고 뛰어나가 기숙사로 내달렸다.
도착한 기숙사에서 나는 곧장 에르한의 편지를 보관 중인 서랍을 열었다.
서랍을 열자 라벤더 향기가 훅 끼쳐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기분 나빠할 새도 없이 가장 위에 있는 편지를 집었다.
가장 최근에 에르한에게서 온 편지였다.
내가 에르한의 편지를 열어 보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어 편지를 꺼냈다.
아니나 다를까, 편지 봉투 안에는 두 개의 편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편지 중 하나를 펴자 익숙한 필체가 눈에 띄었다.
더 볼 것도 없었다.
에르한의 편지인 것을 깨닫고 나는 바로 내버렸다. 그럼 펼쳐 보지 않은 하나가 바로…….
나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편지를 펼쳤다.
구구절절 쓰여 있을 줄 알았던 편지 속은 두려우리만치 깨끗했다.
나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다는 것에 안심해야 할지 더 무서워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편지 맨 아래 구석진 곳. 작은 글씨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래서 내 선물은 만족스러웠어, 리엔?>
아아.
아아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 상황이 너무나도 끔찍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무력한 어린아이처럼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나 때문에 베고니아 공작부인이……, 나 때문에……!”
나는 내 의식이 깊은 곳으로 가라앉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 이것은 전에 다 보지 못했던 꿈의 연장선이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트라우마.
* * *
나는 소년이 떠나고 난 뒤에야 그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렉스 베고니아.
베고니아 공작가의 소공작.
배다른 형제자매가 열 명이 넘어간다는 베고니아 공작가에서 후계자의 자리를 당당히 거머쥔 사람이었다.
삭막한 곳에서 자랐겠구나. 경쟁자도 많았는데 대단하네.
렉스 베고니아에 대한 감상은 딱 그게 다였다.
그의 편지를 받기 전까지는.
나는 사용인이 건네주는 편지를 받으며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그가 왜 내게 편지를?
의아한 마음에 빠르게 편지를 뜯어 읽었다.
<다음에 또 보자고 했지. 내일 시간 비워 놔.>
“이게 무슨…….”
듣도 보도 못한 약속 잡는 법이었다.
이건 통보에 가까운 약속 아닌가.
황당하긴 했지만, 다행히 내일은 딱히 큰 일정은 없었다.
그렇게 성사된 렉스 베고니아의 만남.
응접실에서 만나게 된 그는 다른 인사 없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소공작님?”
“렉스.”
“아. 네, 렉스 님.”
“말 편하게 해. 기왕이면 이름으로 불러 줬으면 좋겠는데, 난.”
“응. 렉스.”
바로 반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그가 눈을 조금 키웠다. 그러고는 이내 입술에 호선을 그리며 쿡쿡 웃기 시작했다.
“재밌네.”
“평민이라 예절을 못 배워서요.”
“그런 것 치고는 에르한이랑 비슷한 수준의 교육을 받는 것 같던데.”
……그걸 어떻게 알았지?
에르한이 렉스와 내 교육 수준까지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친했나?
나는 의문을 머리 한쪽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래서 에르한이 아니라 절 찾아오신 이유는 뭔가요?”
“저번에는 그렇게 안 불렀잖아. 오라버니라는 호칭은 어디 갔어?”
아차. 저번에 에르한을 오라버니라고 불렀다는 걸 깜빡했다.
나는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말 돌리지 마시고요.”
렉스는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나를 응시했다. 그 눈빛이 마치 ‘말을 돌리는 건 너 같은데.’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왜? 넌 내가 오는 게 싫어?”
“싫은 건 아니지만, 이유를 알고 싶어서요.”
“이유라…….”
렉스가 소리 나지 않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기계처럼 깔끔한 동작이었다.
“첫눈에 반했거든. 너한테.”
“……네?”
나는 벙찐 얼굴로 렉스를 바라봤다.
저게 무슨 개소리람.
편하게 놓았던 말이 절로 공손해졌다. 그와 조금이라도 거리감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렉스 소공작님. 아무리 첫눈에 반했다 하더라도 이건 제게 너무 갑작스러워요.”
막말로 정말 소공작이 내게 반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 의무는 없었다.
“소공작님도 아시겠지만 저는 평민이고, 사랑을 논하기는 아직 너무 어려요.”
“평민인 건 상관없어. 우리 아버지도 옆에 둘 여자의 신분은 고려치 않았거든.”
현 베고니아 공작의 여성 편력에 대한 소문은 화려하다 못해 썩어날 정도였다.
공작의 높은 신분과 빛나는 외모는, 그의 여성 편력을 덮어 줄 충분한 가림막이었다.
그러나 그런 공작도 혼인만은 명문 있는 가문의 영애와 했다. 흔하디흔한 정략결혼이었다.
즉, 내 신분이 상관없다는 말은 그의 첩 또는 정부가 되라는 소리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렉스 베고니아는 자비를 베풀듯 말했다.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려 줄 용의도 있어. 사실 나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잖아?”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마구 올라왔다.
우리 나이에 3살 차이면 적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나, 꽤 잘생겼잖아. 안 그래?”
그가 야살스럽게 눈을 접어 올렸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내 마음은 차게 식어갔다.
“평민인 제가 감히 머릿속에 렉스 님에 대해 느낀 점을 올려 보자면,”
나는 렉스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내 의사를 전달했다.
“정말 싫어요.”
제멋대로 통보하듯 약속을 잡는 무례함도. 고작 두 번째 만남에 첫눈에 반한 걸 고백하며 첩이 되라 마라 하는 오만함도.
마지막으로, 자기가 잘생긴 줄 알고 뻗대는 그 자신감도.
아 물론 베고니아 공작의 아들답게 네가 잘생긴 건 맞지만.
원래 잘생긴 사람은 자기가 잘생긴 걸 몰라야 재수 없지 않거든.
아니면 적어도 알고 있다는 티나 내지 말든가.
나를 보는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