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렉스 베고니아는 그 후 나를 몇 번이나 찾아왔다.
그 외 라벤더 향수가 뿌려진 편지를 보낸다거나, 입지도 않을 드레스나 장신구를 선물한다거나.
차라리 그 선에서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그는 내 일정은 하나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괜찮을 때만 백작가를 방문했다.
이모는 그가 오면 항상 이상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비켜 주기 바빴다.
렉스 베고니아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보러 찾아오는 것을 보고 뭔가 오해를 하시는 듯했다.
나는 오늘도 둘만 남겨진 연구실에서 그의 부담스러운 눈빛을 감내해야만 했다.
“내가 언제까지 네 기분을 맞춰 줄 거라 생각해?”
“……네?”
언제 그가 내 기분을 맞춰 준 적이 있었던가.
혹시라도 놓친 적이 있나 싶어 곰곰이 생각해 봤다.
하지만 그런 일은 내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네게 모든 걸 안겨 줄 수 있어. 이깟 조그만 연구실 따위랑 비교되지 않는 방. 호화로운 가구들. 네 말 한마디에 설설 기는 하녀. 드레스? 보석? 말만 해.”
“공작 부인의 자리는요?”
사실 공작 부인의 자리에 흥미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렉스 베고니아가 내게 줄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것 빼고.”
나는 코웃음을 쳤다.
“모든 걸 안겨 줄 수 있다는 말을 쉽게도 쓰시네요.”
그는 배다른 형제자매가 많다.
공작 부인에게서 태어난 유일한 적자였지만, 공작은 그를 우대하지 않았다.
베고니아 공작에게 그는 많고 많은 자식 중 한 명일뿐이었다.
지금은 그가 후계자의 자리를 거머쥐었다고 한들, 아직 공작의 자리를 이어받은 건 아니었다.
현 베고니아 공작은 작위를 물려주기엔 지나치게 건장했다. 다른 형제들이 성장해 감에 따라 판도가 어떻게 뒤바뀔지 몰랐다.
때문에, 든든한 배경이 있는 영애와 정략결혼을 해서 처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러니 나를 공작 부인으로 들일 수 있을 리가 만무하지.
“제 얼굴 충분히 봤으면, 이제 나가 주셨으면 하는데요. 저도 제 일과가 있는지라.”
“…….”
나는 말없이 나를 응시하는 그를 바라보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렉스 베고니아는 그런 내 팔을 덥석 잡아 왔다.
검을 배웠다고 했나.
나보다 나이도 3살이나 더 많은 그가 손에 힘을 주자 꼼짝할 수 없었다.
“나 좀 짜증 나려고 해.”
“내시든지요.”
이미 내는 중인 것 같지만.
나는 잡히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그를 다소 거칠게 쳐냈다.
“……지금 날 친 거야?”
순간 렉스 베고니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며 눈이 뒤집혔다.
아……?
나는 방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을 바닥에 짚고 쓰러진 상태였고, 혼미한 정신 사이로 그가 뚜벅뚜벅 가까이 다가오는 그림자만 겨우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그가 거대한 공포로 다가왔다.
항상 넘쳐나는 사랑 속에서 자라왔던 나는, 이토록 짙은 악의는 처음 겪어 봤기에 더욱 그랬다.
“리엔.”
그의 얼굴을 보기 두려웠다.
아니, 그 이전에 고개를 들 힘조차 없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도와 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공포로 인해 모든 것이 마비된 상태였다.
“리엔.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거야? 내가 방금 불렀잖아.”
내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이내 주변에서 무언가가 깨지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속에서 나는 몸을 웅크린 채 덜덜 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분노가 진정되고 난 후, 그는 뒤늦게 내게 사과를 구했다.
“미안해. 놀랐지? 내가 너무 흥분했던 것 같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휘며 웃었다.
“가끔 분노가 조절되지 않을 때가 있거든.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테니까 너도 이해하지?”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리며 초점 없이 앞을 응시했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내 머리를 다정하게 쓸었다.
“오늘은 나와 이야기할 기분이 아닌 것 같으니 이만 나가 줄게. 오늘 내가 깨뜨린 물건은 보상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
* * *
그 날을 기점으로, 렉스 베고니아가 나를 대하는 방식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그는 대놓고 나를 협박했다.
현재 베고니아 공작가와 아르메리아 백작가 사이에 연관된 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양했다.
백작가의 사람들은 부모님을 잃은 내게 유일하게 남은 모든 것이었다.
내가 그를 거역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때문에, 나는 이 일을 영원히 묻기로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렉스 베고니아는 결코 피를 보게 하는 일은 내지 않았다.
내가 입만 다물고 있다면 백작가의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숨기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란 뜻이다.
분노로 눈이 뒤집혔을 때조차 그런 조절이 가능하다는 게 경탄스러울 따름이었다.
렉스 베고니아는 그 이후로도 나를 자주 찾았다.
그가 내게 본색을 드러내는 건 처음이 어려웠지, 그다음은 쉬웠다.
그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할 때마다 악귀처럼 변모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홀로 아픔을 버티다 못해 에르한을 찾아갔다. 반쯤은 충동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 선택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내게 자초지종을 들은 에르한의 얼굴은 한겨울의 서릿발처럼 차고 냉랭했다.
“그래서 나한테 그걸 말하는 저의가 뭐야? 복수해 달라고?”
나는 놀라서 멍하니 에르한을 바라봤다.
복수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저 저의 사정을 들어주고 위로해 주기를 바랐다.
에르한이 검지로 내 머리를 툭툭 기분 나쁘게 밀쳤다.
“잘 들어. 렉스는 베고니아 공작가의 후계자야. 장차 공작이 될 거라고. 너랑은 값어치가 다르다는 말이야.”
값어치가 다르다고……?
누가? 가족인 나와 남인 렉스 베고니아가?
“내가 렉스와 연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개고생을 한 줄 알아?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줬으면 은혜를 갚을 생각을 해야지.”
그는 한번 말을 꺼내니 속이 시원하다는 듯 끊임없이 이어 말했다.
“우리 부모님이 오냐오냐해 주니까 정말 딸이라도 된 줄 알지? 부모도 없는 평민에게서 태어난 주제에. 어딜 감히.”
충격과 배신감으로 머릿속이 얼룩졌다.
에르한이 나를 저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생각해 보니 너는 네 아비를 닮았구나? 천애 고아인 네 아비도, 너도 똑같이 부모가 없잖아?”
에르한의 입에서 돌아가신 아빠가 언급되자 정신이 확 들었다.
미친 듯이 맥동하던 심장이 싸늘하게 식었다.
“나가.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로 나를 찾아오지 마.”
그와 가족으로 묶여 있던 매듭이 풀어지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영원히 복구할 수 없는 틀어짐이었다.
* * *
에르한은 제 속내를 드러낸 이후 나를 은근히 괴롭히기 시작했다.
오히려 잘됐다는 듯.
내가 애지중지했던 약병을 깨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그는 수업 전날 해놓은 내 숙제를 빼돌리는 유치한 짓을 매일같이 반복했다.
내가 연구하는 약초 중에 독초가 있다는 것을 이용해 독에 당한 것처럼 연기하기도 했다.
물론 백작님과 이모는 끝까지 나를 믿어 주셨다.
나빠진 것은 사용인들 사이에서의 내 평판뿐.
그런 자잘한 괴롭힘은 렉스 베고니아에 비하면 우습기만 했다.
그는 간계를 꾸려 괴롭힐 머리가 되지 못했기에 더욱.
“일차원적인 괴롭힘밖에 하지 못해서 다행이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나를 싫어하게 된 건 내가 백작가에 몸을 의탁하면서부터였을까, 아니면 그 전부터였을까.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긴, 그건 중요하지 않은 일이겠지.”
어찌 됐든 에르한이 나를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달라지지 않을 일이니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나와 렉스 베고니아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뿐인가?
보란 듯이 렉스 베고니아와 붙어 다니며 나에 대해 떠들었다.
가족이라 믿었던 에르한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었던 거다. 내 인생은 철장 속 새와 같았다.
나는 믿을 수 있는 사용인에게 돈을 주어 녹음 펜을 하나 구했다.
조건에 반응하듯 녹음 펜을 쥐면 저절로 식은땀이 나며 몸이 달달 떨려 왔다.
녹음이 시작될 때는 항상 내 앞에 렉스 베고니아가 있었기 때문에.
사실 무언가를 녹음한다 하더라도 내가 이것을 백작님과 이모에게 들려주는 일은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녹음을 감행한 것은 혹시 모를 미래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위로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언젠가 내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생겼으면 했다.
고통스러웠노라고, 힘들었노라고 울면서 하소연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으면 했다.
끔찍했던 기억을 덮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동생인 루카에게는 짐을 얹어 주고 싶지 않았다.
이모는 심약했다.
내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면 충격으로 쓰러지실 수도 있겠지.
백작님은 그 누구보다 가족을 아꼈다.
녹음을 듣는다면 이 일을 정식으로 베고니아 공작가에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베고니아 공작가와의 마찰에서 백작가가 얻을 수 있는 게 있을 리 없었다.
“힘든 것은 나 하나로 족해.”
나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나만 희생한다면 백작가는 그간 지켜왔던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사실 렉스 베고니아를 죽이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당장 만들 수 있는 독만 해도 수십 가지는 넘었으니.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내게 남은 것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내게 남은 유일한 사람들. 이모, 백작님, 루카.
내 가족.
* * *
“마음이 바뀌었어.”
나는 가만히 렉스 베고니아를 응시했다. 그는 드물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래. 네가 이겼어. 너는 정말 고집쟁이구나, 리엔.”
그가 내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뱀이 내 몸을 타고 기어 올라오는 듯한 불쾌감이 일었다.
“네가 이렇게 나를 거부하는 건 내가 정실이 아닌 첩의 자리를 제안해서 그런 거잖아. 그렇지?”
렉스 베고니아는 야살스럽게 눈을 휘었다. 그의 낮은 음성이 고막을 파고든다.
“공작 부인으로 맞아 줄게. 거짓이 아니야. 내가 어떻게든 너를 내 옆자리에 앉혀 줄게. 이제 마음이 풀려? 네가 원하던 거였잖아.”
공작 부인의 자리 따위 원한 적 없다. 나는 그가 내 인생에서 꺼져 주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되레 저 말에 소름이 끼쳤다.
위험을 감수하고 나를 옆자리에 앉히겠다 결단할 만큼 나를 원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