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그는 제 어머니가 평민을 혐오한다는 사실을 틈만 나면 속삭였다.
나를 공작 부인으로 들일 수 없다는 걸 은연중에 변명하려 함이 분명했다.
하지만 저건 많은 이유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과연 공작 부인만 내가 렉스 베고니아와 이어지는 걸 반대할까?
그의 형제들은 나를 약점 삼아 렉스 베고니아를 끌어내리려 할 거다.
그들에게 나는 손쉬운 먹잇감일 뿐이겠지.
사용인들도 평민을 주인으로 모시고 싶진 않을 거다.
나와 피가 섞인 에르한조차 싫어했는데, 다른 사람이라고 좋아할 리 만무했다.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악귀처럼 변하는 렉스 베고니아.
시시각각 내 흠을 잡으려는 그의 형제들.
주인을 무시하는 사용인들까지.
상상만으로 끔찍한 미래였다.
사념이 길어지고 내가 입을 열지 않자, 그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대답, 왜 안 해?”
나는 입을 열어 답을 하는 대신 눈을 감았다.
죽어도 그의 부인이 되겠다는 말은 입에 담고 싶지 않았기에.
“입이 열리지 않는다면 내가 도와줘야겠다.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나면 대답할 생각이 들겠지.”
그 후로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달달 떠는 나를 지켜보던 렉스 베고니아가 안타깝다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 봐. 내 마음이 아파지잖아, 리엔.”
나는 차디찬 바닥에 쓰러진 채로 작게 한마디를 흘렸다.
“거짓말.”
네가 과연 신분 격차로 인한 장애물을 모두 극복해 내고 나를 공작 부인으로 둘 수 있을 것 같냐는 물음.
그리고 마음이 아프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냐는 이중적인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그는 드디어 내 목소리를 들어 기쁘다는 듯 입매를 끌어 올렸다.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전자로 해석한 것 같았다.
“우리 리엔은 의심도 많지. 거짓말이 아니야.”
렉스 베고니아가 손을 내게 가까이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한참이 지나도록 그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심스레 눈을 떠 보니 그는 내 머리카락 끝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난 너와 평생 함께할 거야.”
그 역겨운 한마디를 던지고 나서야 그는 내 방을 나갔다.
나는 그의 입술이 닿은 머리카락을 망설임 없이 잘라 버렸다.
이튿날.
이른 시각에 렉스 베고니아가 나를 찾았다. 새벽에 가까운 아침이었다.
그의 시선이 잠시 내 머리카락에 닿았다. 눈치챈 걸까.
원체 머리카락이 길어 한 뼘 정도는 잘라도 모를 줄 알았는데.
다행히도 그의 시선은 금방 내 눈동자로 향했다.
“당분간 찾아오지 못할 것 같아.”
나는 무감정한 얼굴로 렉스 베고니아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또 무슨 계략이지.
며칠 찾아오지 않으면 내가 저를 그리워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내가 너와 약혼하고 싶다고 선언했더니, 집안이 난리가 났네. 특히 어머니가 아주 노발대발이셔.”
……거짓말이 아니야?
내 눈이 살짝 커진 것을 눈치챈 듯 그가 애석하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그러모았다.
“다들 왜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사랑하는데.”
그는 내 손을 다정히 잡았다. 마치 정말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조금만 기다려 줘. 너를 내 옆자리에 앉히겠다 한 약속, 꼭 지켜 줄게. 누구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는 없어.”
렉스 베고니아는 그날 이후 정말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간간이 보내는 편지조차 에르한을 통해서 보내곤 했다.
베고니아 공작가에서 그가 날 만나지 못하게 하도록 통제에 들어간 게 분명했다.
기회였다.
그에게서 도망칠 기회. 이번 기회가 아니라면 나는 영원히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에르한 몰래 아레나 아카데미의 편입 시험을 봤고, 합격했다.
그리고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아카데미로 도망쳤다.
아레나 아카데미는 내 완벽한 피난처였다.
외부인은 허가 없이 아카데미를 방문할 수 없었고, 설사 가족이라 하더라도 재학생에게 연락할 수 있는 방도는 편지밖에 없었다.
내 삶에서 렉스 베고니아와 에르한이 사라지자 나는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몇 년 만에 쉬는 온전한 호흡이었다.
* * *
“리엔 괜찮아?”
“응? 아…… 내가 또 멍을 때리고 있었구나.”
카르시온은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베고니아 공작 부인의 부고 소식을 들은 이후 가끔 이렇게 멍을 때리곤 했다.
졸업 후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밀려온 탓이었다.
나는 웃음을 그려내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것처럼 입을 뗐다.
“카온, 네 덕분에 봄 방학이 생겼다는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카르시온은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헤실 웃었다.
“리엔이랑 오래 같이 있을 수 있어서 좋다.”
“양심에 찔리지는 않냐는 뜻에서 물어본 건데.”
……됐다.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봄 방학이 시작됐다.
일주일가량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번 방학은 의미가 남달랐다.
아레나 아카데미 역사상 몇 없었던 봄 방학이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에는 여러 인재가 모이는 만큼 학생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각종 마법을 걸어 놨다.
그런데 얼마 전, 여러 마법진에 동시다발적으로 손상이 일어났다고 한다.
강력한 마나의 충돌로 인한 손상이라는데.
그 원인이 뭔지 알고 있는 나는 갑자기 생긴 봄 방학에 좋아하기보다 양심이 먼저 찔렸다.
어찌 보면 카르시온에게 원인을 제공한 것은 나였으니까.
어쨌든, 그런 이유로 마법진을 보수할 시간이 필요해 봄 방학이 주어지게 됐다.
카르시온이 문득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리엔, 혹시 네 룸메이트에게 뭐 들은 거 없어?”
“제인이 워낙 정보통이라 들은 건 많지만, 특별한 건 없었는데. 왜? 알고 싶은 정보라도 있어?”
“흐응.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카르시온을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곧 시선을 뗐다.
카르시온에게는 피오르가 있으니 굳이 제인을 소개해 줄 필요는 없겠지.
그러고 보니 피오르는…….
소파에 몸을 늘어지게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피오르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방학이 짧은 만큼, 본가로 돌아가지 않고 기숙사에서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카데미와 가까운 수도만 해도 왕복 사나흘은 걸리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피오르는 봄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짐을 싸서 후작가로 돌아갔다.
“그렇게 조급하게 돌아가야만 했던 건 형 때문일까?”
카르시온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나스 후작이 후계자를 정했노라 선언했대. 발표는 내년 말에 할 예정이고.”
“후계자?”
아나나스 후작가는 피오르네 가문이다.
대충 예상하기는 했지만, 저 말을 듣고 나니 이제야 피오르가 왜 그렇게 초조하게 굴었는지 온전히 이해됐다.
“피오르는 방학을 제외하면 항상 아카데미에 있었잖아. 그런데 후작이 후계자를 정했다 선언했다는 건…….”
카르시온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 후계자가 피오르가 아닐 확률이 크다는 거지.”
나는 잠시 침묵하며 고민해 봤다.
이대로 피오르를 가만히 지켜보는 게 맞는 일인지.
처음에는 그의 선택을 존중해 주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을 가만히 지켜보는 건 친구로서 아닌 것 같았다.
카르시온이 피오르에게 했던 말처럼, 적어도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게 해 주고 싶었다.
나는 결정을 마치고 여상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카온, 너 그거 알아?”
“뭔데?”
“내가 오지랖이 좀 넓어.”
카르시온이 푸스스 웃으며 내 말에 긍정했다.
“알고 있지.”
“친할수록 더더욱 그냥 둘 수 없더라고.”
“나는 그런 리엔도 좋아.”
그걸 듣고 싶어서 물은 건 아니지만…….
뭐, 나쁘진 않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친구네 집 좀 놀러 갈까?”
“네가 원한다면.”
카르시온은 입매를 끌어 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늘 그랬듯이.
* * *
피오르는 후작가 저택 입구에 서서 기가 찬 얼굴로 나와 카르시온을 번갈아 봤다.
급하게 나온 탓인지 머리카락이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여긴 왜 왔어?”
“너 보러 왔지.”
“내 말은 왜 약속도 잡지 않고 집까지 찾아왔냐는 얘기야.”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며 답했다.
“너랑 놀고 싶어서. 그치, 카온?”
“응.”
우리의 뻔뻔한 작태에 피오르는 피곤하다는 듯 미간 사이를 꾹꾹 눌렀다.
“미안하지만 나는 바빠서 너희를 상대해 줄 시간이 없어.”
“뭘 해야 하는데?”
“그건…….”
피오르는 잠시 당황하며 머뭇거렸다. 하지만 곧 단호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어쨌든 안 돼. 며칠을 걸려 찾아왔을 텐데 미안해.”
내 시선이 자연스레 카르시온으로 향했다.
실은 그의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해서 며칠 걸릴 필요 없이 바로 찾아온 거지만…….
굳이 진실을 말해서 미안한 마음을 깎아 낼 필요는 없겠지.
내 시선이 카르시온에게 닿자 그는 뭘 오해했는지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리엔이 너랑 대화하고 싶은 게 있대. 좋게 말할 때 우리를 안에 들이고 차를 대접해 와.”
야, 그건 협박이잖아.
내가 카르시온의 옆구리를 찌르려고 할 때였다.
“피오르. 이게 웬 소란이지?”
우리는 피오르의 뒤쪽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시선을 줬다.
“……형?”
피오르는 자신의 뒤쪽에 서 있는 사내를 보며 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그럼 저 사람이…….
그는 피오르와 같은 금발에 녹안을 가진 사내였다.
하지만 사글사글하고 호감형인 피오르와 달리 딱딱하고 차가운 느낌이 물씬 풍겨 나왔다.
사내는 나와 카르시온을 무심히 바라보며 물었다.
“……카르시온 공자도 계셨군. 다른 한 분은 아카데미에서 새로 사귄 친구인가?”
“형이 알 거 없잖아.”
사내는 피오르의 쌀쌀한 대꾸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주변 사용인들에게 명했다.
“응접실로 모셔라.”
“형.”
“귀한 분들을 내쫓을 수는 없지.”
“이미 끝났어. 둘은 돌아가기로 했다고.”
우리가 언제?
눈썹을 불만스럽게 씰룩이며 피오르를 노려보자 사내가 쓰고 있던 안경을 추켜 올렸다.
“이쪽 손님들은 너와 이야기된 게 다른 것 같군.”
“나는 다른 일로 바쁘다고. 형이 내게 다른 사람과 만남을 강제할 권한은 없지 않아?”
사내는 표정을 지운 채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누가 너보고 손님들을 모시라고 했지?”
“그게 무슨…….”
“내가 초대한 거다. 내 손님으로 맞을 테니 너는 네 할 일을 해.”
“…….”
피오르가 달리 반박할 말이 없는 듯 애꿎은 입술만 씹었다.
사내는 그런 피오르에게 무심히 시선을 떼며 몸을 돌려 저택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들어오시죠.”
피오르가 아니라 그의 형에게 초대될 줄은 몰랐는데.
와, 진짜 어색해 죽는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