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카르시온을 바라봤다.
줄곧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바로 눈이 마주친 카르시온은 입가에 가벼운 웃음을 머금었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딱히 긴장한 적은 없지만, 어쩐지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말이었다.
덕분에 주머니 속에 있는 녹음 펜의 버튼을 떨지 않고 누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응접실로 안내해 주는 사용인의 뒤를 따라가며 카르시온의 귓가에 장난스레 속삭였다.
“내가 화가 나서 홧김에 피오르 형에게 물을 뿌려도 수습해 줄 수 있어?”
답은 바로 나왔다.
“뜨거운 물은 내가 책임질게.”
“풉. 뭐야, 주방에 가서 끓여 오기라고 하려고?”
“마법으로 순식간에 온도를 높일 수 있으니까, 리엔은 언제든 뿌리기만 해.”
나는 장난치고는 지나치게 차분한 어조에 당황하며 카르시온을 쳐다봤다.
그의 표정이 한없이 진지했다. 절대 나처럼 농을 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진심이었어……?
“다치게 할 생각은 없어. 그냥 장난치려고 물어본 거지.”
“그래? 난 또 손맛 좀 보고 싶어 하는 줄 알았지.”
“내가 진짜로 일이라도 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카르시온은 고민 없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리엔 하고 싶은 거 다 해.”
“내가 뭘 저지를 줄 알고?”
“즉사만 아니면 뭐든 괜찮아. 정말 뭐든.”
그럼 죽기 전까지 때려도 된다는 건가?
나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어디까지 가나 볼 생각으로 물었다.
“그럼 기억은?”
“부작용이 심하긴 하지만 지우는 마법이 있기도 하고……. 조금 손봐줬다고 무슨 일 있겠어? 내가 때렸다고 하지 뭐.”
그의 막 나가는 마음가짐을 보니, 새삼 카르시온의 소문이 괜히 무성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그와 관련된 소문 중에 연쇄 손목 마 따위 같은 것도 있었지.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너는 하고 싶은 거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제발 찻잔 안에 든 물의 온도 같은 것도 올리지 말고.
* * *
응접실로 안내된 우리는 사내의 맞은편에 나란히 앉았다.
피오르가 남은 자리에 앉으려 하자 사내는 미간을 좁혔다.
“나가라. 손님들과 할 말이 있으니.”
“내 친구들이야.”
“지금은 내 손님이지.”
“형이 내 친구들과 무슨 할 말이 있다고?”
“그것까지는 네가 알 필요 없는 것 같군.”
“왜? 내 앞에서는 못 할 말이라도 할 건가 보지?”
피오르는 형을 마주한 순간부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사내는 한없이 여유로워 보였고.
나는 천천히 차를 홀짝였다.
일단 겉으로만 봐서는 형의 압승이네.
사내는 한층 더 서늘해진 얼굴로 피오르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나가라. 낄 곳 안 낄 곳은 구분해야지.”
피오르는 사내를 매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문을 쾅 닫고 나갔다.
바보야. 그렇게 나가면 기 싸움에서 네가 진 것 같잖아.
……진 건 맞지만.
“바람 때문일 거예요.”
아. 변명해 주고 났더니 이게 더 구질구질해 보였다.
미안, 피오르.
내 조잡한 변명에 사내가 처음으로 입가에 미약한 웃음을 그려냈다.
“괜찮습니다. 피오르가 버릇없는 건 가족인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요.”
묘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가족인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니. 그도 아닌 척하면서 피오르를 견제하고 있었던 건가?
게다가 당연하다는 듯 버릇없다고 말한 부분이 굉장히 거슬렸다.
피오르는 누구처럼 얼굴만 착한 게 아니라 정말로 착했으니까.
……바람기 관련한 것만 빼면.
“본격적으로 대화하기에 앞서 카르시온 공자님. 혹시 밖으로 대화가 새어 나가지 못하게 마법을 걸어 주실 수 있습니까?”
사내가 정중하게 부탁해 오자 카르시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법을 걸었다.
마법이 걸린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사내는 마음이 놓인 듯 차에 손을 가져갔다.
“귀여운 동생이 문 앞에서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죠.”
딸깍.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은 사내가 여유로운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카르시온 공자는 저와 이미 안면을 튼 사이이니 넘어가도록 하고……. 늦었지만, 통성명부터 할까요. 저는 아나나스 후작가의 장남, 루입니다.”
루? 애칭이 아닌 풀 네임을 말한 게 맞나?
잠시 의아함을 느끼던 나는, 그가 후작의 사생아였다는 걸 상기해 냈다.
평민은 부르기 쉽게 하려 일부러 이름을 짧게 짓는 경우가 흔했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가볍게 잡아 흔들었다.
“저는 리엔이라고 해요.”
성 없이 말했음에도 그는 달리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평민이라고 무시하는 부류는 아닌가 보다.
아니면 피오르의 새 친구가 높은 신분이 아닌, 평민이라는 것에 안심한 것이거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군요.”
그 말을 들은 카르시온이 매섭게 눈을 부라렸다. 그저 흔한 인사치레 같은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사실 루가 악수를 청했을 때부터 노려보고 있었던 것도 같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는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는 말을 이었다.
“피오르는 아카데미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까?”
가족이라면 관심 가질 만한 전형적인 물음이었다. 그 관심이 좋은 쪽일 확률은 낮겠지만.
그나저나 아까부터 존대를…….
나는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저는 평민인 데다가 그쪽은 피오르의 형이시니까요.”
“저도 어머니 쪽은 평민입니다. 게다가 나이가 어리다고 대접받지 못할 이유는 없죠. 제 동생과 친구라고 해서 저와 친분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굉장히 예의가 바르다고 해야 하나. 융통성이 없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초면에 반말을 찍찍 갈기는 것보다는 백배는 나았다.
“그럼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죠. 피오르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음…….”
이걸 솔직하게 말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못 지냈다고 말하기에는 그가 심적으로 몰린 것을 시인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
하지만 잘 지내고 있다고 포장해 주기에는 봄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후작가로 달려온 피오르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내 고민이 길어지자 루가 모든 상황을 꿰뚫고 있다는 듯 말했다.
“원래는 잘 지내고 있었는데 이번 학기부터 못 지내고 있군요.”
정곡이었다.
“혹시 피오르를 찾아온 것도 그 이유 때문입니까?”
나는 어차피 거짓말을 해도 믿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 그의 말을 시인했다.
“네. 친구로서 걱정돼서요.”
“역시 그랬군요. 피오르에게 이렇게 며칠 걸려 찾아와 줄 친구가 있다니 안심이 됩니다.”
뜻밖의 반응이었다.
다정한 형을 연기하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피오르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무슨 속셈인 걸까.
“사실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부탁하고 싶은 게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세요.”
부탁이 뭔지 듣고 나면 판단이 설지도 모르지.
“그 전에 질문 하나만 더 해도 괜찮겠습니까?”
“네. 얼마든지요.”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오해 없이, 솔직하게 답변 부탁드립니다.”
별거 아닌 것을 물어보는 것 치고는 긴 서론이었다.
놀라지 않게 조심해야겠는걸.
“노력해 볼게요.”
“좋습니다. 그럼 질문하죠.”
그는 양손에 깍지를 끼며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혹, 살인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네?”
“누군가의 신체 일부를 잘라 봤다거나 음식에 독을 타 봤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간 적 있으십니까?”
이게 무슨 미친 소리지.
나는 놀라지 않겠다 다짐한 것이 무색하게도 얼이 빠져 루를 바라봤다. 그에 사내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응을 보니 없는 것 같군요. 피오르가 이번에는 제대로 된 친구를 사귄 것 같아 다행입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친구라니요. 그럼 전에는 어떤 친구를…….”
루의 시선이 조용히 내 옆쪽으로 향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카르시온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루는 처음 방음 마법을 부탁할 때 빼고는 줄곧 나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카르시온이 투명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너 이미 피오르 형에게 걸러진 거였어……?
“이제 제가 정말 부탁드리고 싶었던 것을 말하겠습니다.”
맞다. 이 질문이 끝이 아니었지.
나는 카르시온에게 향했던 시선을 다시 루에게 고정했다.
그는 더없이 진중한 얼굴로 입을 뗐다.
“두 분께서 피오르가 월반하는 것을 막아 주셨으면 합니다.”
……자신이 작위를 물려받는 것에 차질이 생길까 봐 그런 건가.
“거절할게요. 그건 피오르 자신이 선택할 일이지, 저희가 막고 말고 할 일이 아닌 것 같아요.”
물론 우리가 피오르를 찾아온 것은 월반 때문인 게 맞다.
하지만 사내와 피오르의 관계가 관계인 만큼, 그에게 협력하겠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됐으니 여기서는 아닌 척 발뺌해야 했다.
“리엔 양이 무엇을 걱정하고 계신지는 압니다.”
그는 설핏 웃었다가 이내 표정을 지워냈다.
“저도 피오르의 결정을 존중했을 겁니다. 아버지가 후계자를 결정했다 발언하신 후 한 선택이 아니었다면요.”
사내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궁지에 몰려서 한 선택은 온전한 것이 아닌 걸 알지 않습니까.”
“그래도 선택은 선택이죠.”
“리엔 양. 사실 피오르가 아카데미를 다니며 이렇게 즐거워했던 적은 처음입니다.”
“처음이라고요?”
믿기 힘든 얘기이었다.
피오르가 자주 툴툴거리기는 해도, 작은 일에도 소리 내어 웃을 만큼 잘 웃는 편이었으니까.
“네. 항상 성적 내기에만 바빴던 아이인데, 시니어에 올라가고부터는 행복해 보이더군요.”
루의 눈동자가 과거를 기억해 내듯 흐릿해졌다.
“옛날처럼 장난도 치고, 웃음도 상당히 늘었습니다. 아, 물론 성적은 그대로 톱을 유지했고요.”
뒷말에서 은근한 팔불출의 냄새가 났다면 내 착각이었을까?
그가 어느새 또렷해진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아무래도 그쪽 친구분들 덕분이지 않을까 싶은데…….”
“착각인 것 같은데요. 카온은 피오르와 옛날부터 친구였으니까요.”
“그럼 카르시온 공자 덕분은 아닐 테니, 리엔 양 덕분이겠군요.”
“글쎄요. 루 님의 추측이 맞을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나는 그의 말을 덤덤히 받아쳤다.
“그보다, 애초에 저희가 피오르와 친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면 그런 부탁은 하지 않으시는 게 맞는 거 아닌가요?”
“왜죠?”
왜냐니.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루 님은 지금 피오르와 후계 경쟁을 하고 계시잖아요. 지금 피오르가 아카데미를 졸업하지 못한다면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건 알고 계실 텐데요.”
“아. 제 실수군요. 이것부터 말하고 가야 했었는데.”
“……?”
그는 입매를 비틀며 못을 박듯 단호하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후계자를 정했다는 인물은 제가 아닌 피오르입니다. 이미 저랑 상의한 상태이죠.”
……뭐?
저 말이 사실이라면 피오르가 루를 견제해서 무리하게 월반을 할 필요는 없었던 거잖아.
아니, 그 전에 피오르가 자리를 되찾으려 노력할 이유도 없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