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내 눈매가 의심으로 가늘게 좁혀졌다.
“그걸 어떻게 믿죠?”
“믿기실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후작의 자리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피오르가 능력 있는 후작이 될 수 있게 하려 노력하는 중이죠.”
“……심지어 피오르를 도와주는 중이라고요?”
루는 싱긋 웃었다. 지금껏 봤던 표정 중 가장 밝은 웃음이었다.
“네. 저는 피오르가 후작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유를 들어 봐도 될까요?”
“이유라…….”
이야기가 길어지겠군요. 작게 읊조린 그가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홀로 저를 키우던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후작가에 처음 들어왔을 당시, 저는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그랬겠지.
의지하던 어머니를 잃고 낯선 곳에 홀로 떨어진 것이니까.
“한편으로는 기뻤던 것도 같습니다. 사생아라고 손가락질받을지언정 배는 곯지 않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가 어두워진 표정으로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그 생각은 며칠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후작가의 사람들에게 차별과 무시를 당해 온 건가.
사생아가 차별받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로 인한 이복형제간의 싸움이 일어나는 것도 다분했고.
나랑은 경우가 조금 다르지만, 에르한도 나를 끝까지 가족으로 받아 주지 않았지 않나.
“후작가의 사람들은 제게 무척이나 다정했고, 저는 처음 겪는 과한 호의에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반전이?
나는 불퉁한 표정을 하며 그를 쳐다봤다.
대체 안 좋은 사연이 있는 양 속눈썹은 왜 내리깐 건데요.
“후작 부인도 사생아인 저를 거리낌 없이 받아 주셨고, 저는 덕분에 후작가에 빠르게 녹아들 수 있었습니다.”
후작 부인이 참 대인배시네…….
내 남편이 밖에서 아이를 만들어 왔다면 바로 이혼했을 텐데.
루는 흐려진 내 표정을 보고는 덧붙였다.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면, 저는 두 분이 혼인하시기 전 태어났습니다. 후작 부인도 저의 존재를 알고 아버지와 결혼하셨죠.”
……알고 혼인하신 거였어? 그럼 문제 될 거 없는 거잖아.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따졌다.
“그럼 뭐가 문제인 거죠?”
“문제는 모두의 기대가 피오르가 아닌 저로 향했다는 겁니다. 하나같이 좋은 후계자가 나타났다며 좋아했죠.”
왜지?
핏줄로 따지기는 싫지만, 엄밀히 말하면 후작가의 적자는 피오르지 않나.
보통 이런 경우는 크게 모난 구석이 없는 이상, 적자에게 지위가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피오르는 성격도 좋고 머리도 비상했다.
어딜 보나 모난 곳이 없는데 어째서 모두의 기대가 피오르가 아닌 루에게 갔을까.
의아한 눈빛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자 루가 버석하게 웃었다.
“리엔 양은 피오르의 어린 시절을 모르시는 것 같군요. 하긴, 꽤 오래된 일이긴 합니다.”
나는 이것에 대해 거짓 없이 진술해 줄 사람을 바라봤다.
분명 카르시온은 피오르와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부터 친구였다고 했었지.
“피오르가 옛날에 어땠는데?”
카르시온은 지금껏 내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열심히 지키고 있었다.
그가 재미있는 주제가 나왔다는 듯 씩 입매를 끌어 올렸다.
“악동으로 유명했지. 아니, 소악마라고 불렸었나. 소문으로 따지면 나보다 심했을걸.”
피오르가 소문난 인성 파탄자였다고……?
정말로?
충격에 휩싸여 있을 새도 없이 루가 말을 이었다.
“피오르는 저를 처음부터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형이 생겼다며 좋아했죠.”
“그럼 지금 피오르가 루 님을 견제하는 이유는 뭐죠? 루 님이 작위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피력했으면 상황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요.”
“일부러 알리지 않았습니다.”
루는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피오르가 저를 의식하고 견제해야, 자신의 그릇된 태도를 고칠 테니까요.”
“일부러 피오르의 미움을 샀다는 말씀인가요?”
“말이야 일부러지, 사이가 틀어지는 건 숨 쉬듯 쉽더군요.”
루는 한숨처럼 말했다.
“저희 부모님은 피오르가 어떤 사고를 쳐도 쓴소리 없이 사랑으로 덮어 주셨습니다. 피오르로서는 그게 당연했기에 저 또한 유하게 넘어갈 줄 알았을 겁니다.”
어깨를 가볍게 으쓱인 그의 입매가 단호하게 맞물렸다.
“하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죠. 피오르의 성격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그럼 지금까지 피오르를 매몰차게 대한 것도 전부 그를 위해 그랬다는 거네요.”
“네. 경쟁 심리를 이용해 저를 견제하도록 했고,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키우도록 했습니다.”
“그럼 피오르를 아카데미로 내몰았던 건 왜…….”
“아카데미를 보낸 것도 그런 이유이죠. 아카데미는 작은 사회나 다름없으니, 좋은 교육 환경이 될 거로 생각했습니다.”
결국, 피오르를 사람처럼 만들어 놓은 것은 루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나는 그의 방식이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루 님. 피오르는 아카데미가 아닌, 후작가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어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요?”
“리엔 양. 지금 아카데미에서의 피오르의 이미지는 어떤가요?”
“흠잡을 데 없는 외모와 지위에, 공부 잘하고 성격도 좋고……. 학생들은 물론 교수님의 사랑까지 한 몸에 받는 엘리트 이미지죠.”
피오르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늘어놓자 루의 눈매가 풀어졌다. 흐뭇해하는 기색이었다.
“저는 그걸 원했습니다. 피오르는 성질이 워낙 더러워서 친구도 카르시온 공자밖에 사귀지 못했거든요.”
“피오르가 친구를 안 사귄 게 아니라, 못 사귀었다고요?”
“주변 또래 애들을 대련한답시고 목검으로 패고 다니는 바람에…….”
루의 시선이 잠시 카르시온에게 닿았다.
“그에 당하지 않은 건 카르시온 공자뿐이었죠.”
어떻게 둘이 친구가 됐나 했더니 끼리끼리 놀던 거였어……?
그러고 보니 카르시온부터 시작해서 내 주변에 성격이 정상인 애들이 없는 것 같았다.
문득 우리 대에 태어난 아이들이 유독 싸가지가 없다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스쳤다.
길었던 두 제국과의 전쟁이 끝나고, 물질적으로 안정이 될 때 즈음.
전쟁을 겪으며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젊은 세대는 자신의 아이를 오냐오냐 키우게 되는데…….
그렇게 길러진 아이들이 지금 내 나이대의 청소년들이라고 한다.
그 말을 들었을 당시에는 그런 게 어디 있냐며 꼰대의 ‘나 때는 말이야.’ 같은 발언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우리 세대가 성격이 유별난 애들이 많은 건 사실인 것 같았다.
나는 다른 길로 샜던 생각을 구석으로 몰아넣으며 앞을 응시했다.
그의 고집 있는 눈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한숨이 절로 몰려왔다.
피오르의 형이 내가 생각했던 만큼 꼬인 사람이 아닌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에게 할 말이 남아 있었다.
“루 님이 피오르를 위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어요.”
“이해해 주셨다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루 님, 그거 아시나요?”
나는 그의 눈을 또렷이 바라보며 말했다.
“피오르는 루 님처럼 후작의 자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요.”
“……말도 안 됩니다. 그러면 피오르가 아무리 제게 복수하고 싶었다 한들, 이렇게 이를 악물고 좋은 성적을 받아 올 리 없습니다.”
그는 내 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는지 말을 길게 늘어놓았다.
“처음 입학했을 때를 제외하면 피오르는 한 번도 수석이나 차석을 놓쳐 본 적이 없다는 거 아십니까? 받아 온 상은 또 얼마나 많은지 늘어놓는다면 응접실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겁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는 것만 해도…….”
루는 농담이 아니라는 듯 지금껏 피오르가 받아 왔던 수상 내역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 길어질수록 내 눈동자가 차츰 커졌다.
와, 저 사람 진짜 피오르를 좋아하나 봐.
저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자청해서 미움을 받을 생각을 했지?
동생 자랑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나는 중간에 그의 말허리를 잘라냈다.
“그래서 ‘관심이 없었다.’라는 과거형으로 말씀드린 거예요.”
루는 하던 말을 멈추고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이어서 말해 보라는 눈치였다.
“지금은 루 님이 만들어 낸 경쟁 구도와 복수심 때문에 불타 후작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 하는 거잖아요.”
“부정할 수 없군요.”
“하지만 피오르가 진짜 원하는 것은 후작의 자리가 아니에요. 자신을 좋아해 주는 가족들이죠.”
내 말에 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피오르는 검을 잡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한 얼굴을 해요. 펜을 잡고 있을 때가 아니라.”
“검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작위를 이어받는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아요.”
“루 님. 다시 한번 말하지만, 피오르가 원하는 건 작위가 아니에요. 피오르는 제게 후작의 자리는 원하지 않았다 말했어요.”
“아직 어려서 그 자리가 얼마나 가치 있는 자리인지 잘 모르는 겁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 고집불통이 진짜…….
나는 이마를 짚으며 차갑게 대꾸했다.
“그럼 그 가치 있는 자리, 루 님이 차지하시면 되겠네요.”
“리엔 양. 후작의 자리는 그 아이의 것입니다.”
“아뇨. 루 님도 아나나스 후작님의 핏줄인 만큼 충분히 자격이 있어요. 왜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고 단언하시는 거죠?”
“그건…….”
그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라는 듯 쉽사리 이유를 대지 못했다.
“진짜 피오르를 위한다면 미래는 자신이 그리도록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나는 그가 머뭇거리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몰아치듯 말했다.
“확실히, 루 님 덕분에 피오르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어요. 이대로 가면 존경받는 후작이 될 수 있겠죠. 하지만 행복해 보이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남은 말을 털어 냈다.
“사실 아까 월반을 막지 않겠다고 한 건 루 님을 경계해서 그런 거였어요. 피오르는 저희가 설득해 볼 테니, 루 님도 잘 생각해 보시길 바라요.”
그에게 미련 없이 시선을 떼어 내며 카르시온의 소매를 끌었다.
“가자, 카온.”
카르시온은 느른히 웃으며 기꺼이 내 손에 이끌려왔다.
“응.”
* * *
응접실에서 나오자마자 피오르는 우리를 제 방으로 끌고 가다시피 데려왔다.
“형하고 무슨 대화를 했어?”
자리에 앉으라 권하지도 않고 본론이라니, 매정하기도 해라.
“자존심도 다 구기고 문에 귀를 대고 있었는데, 카르시온 마법 때문에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고.”
다시 생각하니 억울함이 몰려왔는지 피오르가 카르시온을 원망스레 노려봤다.
“걸어 달라고 했다고 진짜 걸어 주는 게 어디 있어? 내가 부탁했으면 들은 척도 안 했을 거면서!”
카르시온은 귀찮다는 듯 귀를 후비는 시늉을 했다.
“그거야 몰래 엿들으려 한 네 잘못이지. 난 네 형의 부탁을 들어줬을 뿐이야.”
“하는 척만 할 수도 있었잖아.”
“그럼 네 기척을 지우는 마법도 걸었어야 했을 텐데, 귀찮아.”
“친구를 위해서 그 정도도 못 해 주냐?”
“리엔을 문전 박대한 놈이 뭐가 예쁘다고.”
자주 본 싸움 구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