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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69)화 (69/161)

69화

나는 익숙하게 그들 사이를 갈라놓았다.

“네가 생각하는 대화는 없었으니 진정해, 피오르.”

“내가 뭘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알고?”

“모르지.”

어깨를 으쓱이며 한 대답에 피오르의 미간이 좁혀졌다.

“리엔. 이건 내게 중요한 일이야.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장난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뭘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한 건 진짜인걸.

나는 뭐라 대꾸하려다가 그의 표정이 굳어 있는 것을 목격하고 안심부터 시켜 주기로 했다.

“진정해. 네가 걱정할 만한 대화는 하지 않았을 거라 장담할 수 있으니까. 그렇지, 카온?”

“응. 똑 부러지게 말하는 리엔 멋있었어.”

“……또 논점을 벗어났잖아.”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다시 피오르에게 시선을 줬다.

그는 카르시온이 한 말에 꽂힌 듯 놀란 표정이었다.

“……똑 부러지게 말해? 리엔이 형과 언쟁이라도 한 거야?”

“응.”

“아니.”

피오르의 질문에 카르시온의 긍정과 내 부정이 동시에 나왔다.

나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얼굴로 카르시온을 바라봤다.

“그게 어떻게 싸운 거야. 내 할 말을 한 거지.”

“리엔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눈치 보느라 입도 벙긋 못했을걸.”

“……신분 차이도 있는데 내가 너무 편하게 대했나.”

아카데미에서 신분 생각할 거 없이 지냈던 버릇이 들어서 그만.

계속 주제가 틀어지자 안달이 난 피오르가 눈을 찡그렸다.

“말 돌리지 말고. 그래서 형과 무슨 대화를 한 건데? 설마 진짜로 안 알려 줄 건 아니지?”

“너도 내 질문에 답변해 준다면 알려 줄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라면…….”

“좋아. 그럼 질문은 내가 먼저 한다.”

내 쪽에서 먼저 한다는 말이 불만스러웠는지 피오르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하지만 지금 급한 것은 그였기에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해.”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을 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너는 형이 싫어?”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피오르의 얼굴이 종잇장 구겨지듯 와락 구겨졌다.

“네 눈을 보니 대충 어느 정도인지 알 것 같네. 그럼 다음 질문. 혹시 형과 사이가 어떻게 틀어지게 됐는지 기억해?”

“형은 사사건건 내게 시비를 걸었어. 단 한시도 가만히 두는 일이 없었지.”

피오르는 올라오는 화를 진정시키려는지 잠시 숨을 골랐다.

“걸음걸이부터 시작해서 식사 예절에 대해 지적하는 건 예사고, 머리가 비어서 사람 패는 것밖에 못 하는 길거리 깡패 취급하는 건 입버릇이었다면 믿겠어?”

카르시온이 증언한 말이 진짜라면 지극히 맞는 말만 하신 것 같은데……?

“심지어는 친구 문제에 관해서도 나를 가르치려 했어. 카르시온과 어울리지 말라며 매섭게 경고했던 게 아직도 기억나.”

와, 그건 정말 네 형의 진심이 담긴 조언 아닐까.

이런 내 생각을 모르는 피오르가 이내 허탈하게 웃었다.

“형은 그냥 내 모든 게 거슬렸던 거야.”

“처음에는?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어?”

피오르의 웃음이 짙어졌다. 누군가를 비웃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형이 달라진 건, 형이 후작의 자리를 물려받을 거라는 얘기가 나올 때부터였어.”

그의 형에게 들었던 말과 정확히 일치했다.

“권력이 생기자마자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한 거지. 너무 속이 훤히 보이지 않아? 처음에는 여기저기 눈치 보기만 바빠했었는데…….”

루의 말만 들을 때는 피오르가 어떻게 지금껏 그의 마음을 몰랐을까 의아했다.

그런데 이렇게 듣고 보니 피오르의 입장에서는 저렇게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구나 싶었다.

“피오르. 그동안 형에게 쌓인 게 많겠지. 네가 열심히 달려온 이유도 그것 때문이라는 거 알아.”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나는 네가 월반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피오르가 입술을 짓씹었다.

“리엔. 너도 내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거 알고 있잖아.”

“너 우리랑 같이 동아리실에서 노는 거 좋아하잖아. 같이 졸업하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살다 보면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 수 없는 일이지.”

“이대로 검술도 취미로만 남겨 둘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거야?”

검술 이야기가 나오자 피오르의 두 눈에 파문이 일었다.

감정을 조절하려는 듯 그가 고개를 다른 곳으로 확 틀었다.

“피오르. 네 지금 성적을 유지한다면 졸업할 때 황실 기사단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거 알잖아.”

황실에서는 매년 아카데미 졸업생 중 스무 명을 황실 기사로 선발해 갔다.

그는 항상 순위권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졸업만 한다면 무리 없이 황실 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을 터였다.

“리엔, 나는…….”

피오르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무언가 목에 턱 막힌 듯 말을 잇지 못했다.

피오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손에 힘을 줬다.

“복수에 남은 인생을 걸 거야? 형과의 경쟁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네가 얻는 게 뭔데?”

“…….”

“그래. 자존심 정도는 지킬 수 있겠네. 하지만 피오르, 이겼는데도 남은 게 없다면 그것만큼 비참한 게 없잖아.”

“……리엔.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해?”

피오르의 눈이 서서히 흐려졌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동공에 눈물이 차올랐다.

“이대로 놓아 버리기에는 내가 그간 노력한 시간이 너무 아깝잖아. 응? 그렇잖아.”

툭.

그가 눈을 깜빡이자 차오른 눈물이 속절없이 떨어졌다.

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의 손에 무심히 쥐여 줬다.

언젠가 카르시온이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릴 것을 대비해 줄곧 가지고 다니던 손수건이었다.

“당연히 아깝겠지. 몇 년간 쌓아 올린 건데.”

순순한 긍정의 말에, 손수건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그런데 네가 지금껏 쌓아 올린 것들이 작위를 포기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들이야?”

피오르가 뭔가에 세게 맞은 것처럼 멍한 얼굴을 했다.

“아…….”

나는 쓰게 웃었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내가 피오르의 입장이었어도 쉽사리 놓지 못했을 거다.

“형과 화해하고 말고는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문제가 아닌 것 같으니 이것만 주고 갈게.”

주머니에서 녹음 펜을 꺼냈다.

그러고는 펜과 녹음본이 담긴 자그마한 수정구를 분리해 냈다.

“판단은 네가 알아서 해.”

피오르에게 수정구를 건네자 그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이건…….”

“이걸 주는 것에 대한 대가는 네가 월반을 하지 않는 거로 받았으면 하는데.”

“……그런 게 어디 있어? 네 질문에 답해 주면 알려 주기로 한 거였잖아.”

“강요는 아니야.”

나는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이걸 받고도 월반을 강행하겠다면야 내가 무슨 수로 말리겠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월반을 신청한 네가 졸업 시험을 망치도록 방해 공작을 일삼는 것뿐이겠지.”

멀거니 서서 나를 바라보던 피오르가 얼떨떨한 어조로 말했다.

“……그게 강요 아니야?”

“엄밀히 말하면 강요는 아니지. 협박이면 몰라도.”

억지스러운 대답에 피오르가 울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뭐야.”

나는 그런 피오르를 보며 씩 웃었다.

“내가 조금 이기적이라서, 주변 누군가가 나보다 빠르게 졸업하면 질투 날 것 같거든.”

그러니까, 우리랑 같이 졸업하자 피오르.

* * *

피오르는 아무도 없는 동아리실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주변이 시끄럽고 복잡할 때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혼자가 되는 순간 가슴 한쪽 귀퉁이에 묻어 놨던 생각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리엔의 협박 아닌 협박에 못 이기는 척 월반을 포기하고 동아리에 돌아온 지 어언 일주일.

월반 건에 대해서는 일단락 지어졌지만, 아직 형과의 응어리는 풀지 못했다.

리엔이 건네준 수정구에는 상상해 본 적도 없는 내용이 가득했다.

대화 내용이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돌려봤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러 감정이 머릿속으로 얽혀 들어왔다.

성격을 죽이며 억지로 사람들과 어울렸다.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좋아하는 검술 훈련 시간을 줄여 가며 밤을 새워 공부했다.

오로지 형에게 작위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런데 그건 애초에 불필요한 거였다는 거지.”

허망함이 몰려왔다.

“나는 그동안 누구와 싸워 왔던 걸까.”

원망할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다.

하지만 모든 전말을 알고 난 후에는 차마 형을 미워할 수 없었다.

화가 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무리 자신을 바르게 키우고 싶었다 한들, 어떻게 거의 십 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자신을 속여 올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분노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쩌면 자신은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형과의 사이가 좋아지길 바라왔던 걸지도 몰랐다.

“생각해 보면 지금껏 눈치채지 못한 것도 용하지.”

좋은 성적표를 가지고 후작가에 돌아올 때면, 그날 식탁에는 유독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가득했다.

부모님은 저를 사랑했지만, 그런 세심한 것까지 신경 쓸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한 명뿐.

“화해…… 하고 싶은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네.

피오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동아리실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모르겠다.”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은 피오르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벌렁 누웠다.

카르시온이나 리엔 둘 중 아무나 빨리 동아리실에 왔으면 좋겠다.

복잡한 생각은 딱 질색이었으니까.

하필 제 전공수업이 제일 빨리 끝날 건 뭔지.

“평소처럼 다른 애들과 어울리다 느긋하게 올 걸 그랬나.”

하지만 이제 억지로 친분을 유지할 필요는 없는데 굳이?

가식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했던 게 싫었던 거지, 어울리는 건 싫지만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어떻게 될지 모르니 평소처럼 구는 게 좋겠지.”

피오르는 더 생각하기 싫어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동아리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잠자는 자신을 배려하는 듯한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를 보니 카르시온은 아닌 듯했다.

일어나서 인사를 할까 했으나 장난기가 샘솟은 피오르는 계속 잠을 자는 척을 하기로 했다.

타이밍을 노려 벌떡 일어나 깜짝 놀라게 할 예정이었다.

자신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작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가방을 뒤적거리는 것 같았다.

그 후 자신의 주변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발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조심스러웠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기척은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듯했다.

‘리엔이 왜 내가 자는 모습을 관찰하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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