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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70)화 (70/161)

70화

자는 척하고 있었다는 것을 들킬까 봐 그런 것인지, 심장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기척이 바로 자신의 얼굴까지 다다랐을 때,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고 말았다.

멈칫.

저에게 다가오던 기척이 자신이 침을 삼킨 것을 목격한 듯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피오르는 머릿속으로 라그라스 제국의 국가를 부르며 평정심을 찾으려 했다.

겉으로 최대한 곤히 자는 척을 하면서 말이다.

가면을 쓰고 행동했던 세월 동안 이토록 최선을 다해 연기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기척에게서 자그마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제 연기에 속은 모양이었다.

기척은 안심하며 제게 가까워졌다. 천천히, 아주 조금씩.

상대의 숨소리가 들려올 만큼 아주 가까이 다다랐을 때였다. 기척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 어어……?’

생각했던 거 이상으로 가까이 다가오자 피오르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리엔을 놀라게 할 타이밍을 고르라면 지금이 최적의 시간이었을 텐데.

그는 당황스러운 나머지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이윽고 얼굴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슥슥, 뭔가를 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주 야무진 손놀림이었다.

아…….

몸에 힘을 주며 긴장하고 있던 것이 탁, 하고 풀렸다.

자신은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리엔이 그저 제 얼굴에 낙서하려고 다가온 것임을 깨닫고 뒤늦게 민망함이 몰려왔다.

피오르가 속으로 악악 소리를 지르고 있는 와중에도 리엔의 손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나 신났는지 펜촉에서도 그 감정이 전해져 올 정도였다.

조금의 시간이 더 흐른 후에야 리엔은 피오르에게서 떨어졌다.

자신이 그린 작품이 만족스러운 듯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피오르는 그녀의 웃음을 들으며 안심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생각을 했다.

그래, 리엔이 친구일 뿐인 자신에게 스킨십할 리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고, 앞으로도 그래야만 했다.

친구끼리 한 여자를 좋아하는 전개는 식상하잖아.

그렇지?

* * *

지금 아카데미는 조만간 다가올 학술제로 인해 분위기가 붕 뜬 상태였다.

말이 학술제이지, 학기 초에 열리기 때문에 달리 보여 줄 학문의 결과가 없어서 그냥 먹고 즐기는 축제나 다름없었다.

학술제의 부스 운영은 동아리끼리 진행했는데 문제는…….

“우리는 이번에 뭐 할 거야?”

내 질문에 피오르가 손을 들고는 의견을 냈다.

“투기장 어때?”

“투기장?”

오. 제발 내가 지금 들은 게 잘못 들은 것이길 바라.

피오르는 그런 내 굳은 표정을 보지 못하고 마구 설명하기 시작했다.

“검이 주력인 사람은 내가, 마법이 주력인 사람은 카르시온이 맡고, 심판은 리엔 네가 맡는 거지.”

“……그래서?”

“이기면 처음 건 돈의 두 배를 주는 거야. 어때?”

“기각.”

“생각도 해 보지 않고?”

우우. 피오르가 과장스럽게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며 불만을 표시했다.

“하는 사람이 있겠냐. 게다가 진짜로 상대방이 이겨 버리면 돈은 어떻게 하려고.”

그에 피오르가 다 생각해 놓은 게 있다는 듯 의기양양한 얼굴로 답했다.

“그거야 대충 돈 많은 카르시온이 알아서 때워 주겠지.”

그냥 책임을 떠넘길 셈이었잖아……?

“더 들어 볼 필요도 없네. 기각.”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동아리는 보통 자신의 동아리와 관련된 것을 했다.

예를 들어 제인의 의상 디자인 부는 직접 만든 의복을 전시, 판매할 예정이라고 했고…….

모고동은 모기 괴롭히기 체험을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우리 동아리는 달리 목적이랄 게 없어서 뭘 주제로 잡아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대체 뭘 해야 적당히 꿀을 빨 수 있을까.”

내가 한숨을 내쉬자, 줄곧 우리의 대화를 지켜만 보고 있던 카르시온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리엔. 사실 우리가 너무 어렵게 생각한 게 아닐까?”

“그게 무슨 소리야?”

“쉽게 우리 동아리 이름대로 가자.”

동아리 이름대로?

피고동.

피오르 고문 동아리…….

나는 화들짝 놀라며 그를 쳐다봤다.

“피오르를 공개 고문하자고?”

카르시온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응. 입장표 값을 꽤 짭짤하게 벌 수 있지 않을까? 모고동처럼 직접 때리기 체험을 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피오르의 의견보다 거지 같은 건 나오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카르시온이 피오르보다 더했다.

피오르가 벌떡 일어나 카르시온의 멱살을 잡아 짤짤 흔들었다.

“당사자 앞에서 할 말이냐, 그게!”

카르시온은 막는 것도 귀찮다는 듯 피오르가 흔드는 대로 팔랑이며 느긋하게 하품했다.

나는 그들의 싸움에는 일말의 신경도 쓰지 않으며 아쉽다는 듯 말했다.

“차라리 동아리를 폐지하고 새로 만들 걸 그랬나.”

“고작 하루 열리는 학술제 때문에 그런 꼼수를?”

학술제가 학기 초에 열리는 덕분에 1학년은 다른 학년처럼 의무 참가가 아니었다.

동아리를 새로 들어간 사람들도 말이다.

우리는 1학년도 아니었고, 동아리를 옮기지도 않았기에 이번에는 의무적으로 학술제에 참가해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는 것.

즉, 내가 앞에 열거한 것처럼 꼭 동아리와 관련한 것을 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다.

막말로 검술 동아리 애들이 프릴 달린 메이드 복을 입고 찻집을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거다.

……와. 생각해 보니까 이거 진짜 히트 상품인데?

검술 동아리에게 익명으로 건의해 볼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리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카르시온이 순박해 보이는 눈망울로 나를 올망졸망 바라봤다.

나는 그 눈빛에 어쩐지 죄책감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 생각도 안 했어.”

“……뭔가 굉장히 기분 나쁜 생각을 한 것 같았는데.”

그가 석연치 않다는 얼굴을 하며 한쪽 입술을 씹었다.

저게 남자의 촉이라는 건가.

나는 손뼉을 치며 취조실로 변하고 있는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은 우리 동아리가 뭘 할 것인가 정하는 게 우선이잖아.”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 리엔.”

“기각.”

카르시온에게 좋은 생각이 있다고 하자마자 기각을 외쳐 버리자 그의 어깨가 축 처졌다.

아. 또 이상한 의견이 나올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그만.

“방금은 장난이었으니 표정 풀어. 그래서 그게 뭔데?”

금세 어깨를 원상 복구한 카르시온이 생글거렸다.

“리엔은 별로 하는 거 없이 대충 욕먹지 않을 정도로만 활동을 때우고 싶은 거잖아?”

오…….

대놓고 말하긴 했지만, 다른 사람의 입에서 정리되어 나온 걸 들으니 굉장히 양아치 같은걸.

“그렇……지.”

더듬거리며 시인하자 카르시온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귀신의 집 어때?”

“귀신의 집? 하지만 동아리실을 무섭게 꾸미려면 손도 많이 가고 우리 동아리실은 그런 걸 할 수 있을 만큼 크지 않잖아.”

동아리실의 크기는 동아리의 부원 수로 결정됐다.

우리는 최소 인원을 겨우 만족하는 3명이기 때문에, 가장 작은 방을 배정받은 상태였다.

뭐, 그래도 셋이서 쓰기에 넘치는 크기라 만족하고는 있는데.

귀신의 집을 할 만큼의 크기는 아니란 말이지…….

이번에도 기각을 외치며 다른 방안을 생각해 보자고 말하려 할 때였다.

카르시온이 그 말을 할 줄 알았다는 듯 여유롭게 웃었다.

“꼭 동아리실을 꾸며야 하는 법은 없잖아.”

“그럼?”

“동아리실 밖으로만 조금 그럴싸하게 꾸미고, 안쪽에 사람이 입장하면 내가 환상 마법을 거는 거야.”

“오?”

생각지도 못한 좋은 의견이었다.

“그런데 그 환상 마법이 과연 잘 먹힐까?”

“체험해 볼래?”

그가 금방이라도 마법을 캐스팅할 것처럼 손을 올렸다.

“응. 부탁해.”

고민 없이 해 달라고 할 줄은 몰랐는지 오히려 카르시온이 당황하며 손을 물렸다.

“안 무서워?”

“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나는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서워.”

그러자 카르시온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혹시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는 피식 웃으며 카르시온의 분홍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자, 생각해 봐. 분명 혼자 있는 방인데,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져서 조심스레 침대 밑을 확인해 봤어. 그때 귀신과 사람 둘 중 어떤 게 있으면 더 무서울 것 같아?”

“둘 다 족쳐 버…… 공격하면 되지 않을까?”

어. 음. 질문이 잘못됐나.

“사람 쪽이 널 광적으로 좋아하는 애라면?”

그 말에 카르시온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제 침대 밑에 숨어들어 온 게 기분 나쁜 모양이다.

“뭐, 그런 거지.”

나랑은 조금 다른 의미로 미간을 구긴 것 같지만.

그러고 보니…….

카르시온을 광적으로 좋아했다는 그 여자애는 생각보다 존재감이 없네.

카르시온이 나를 쫓아다니는 것을 직접 보고 전의를 상실한 건가?

연무장에서 그녀를 봤을 때, 카르시온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것을 봐서는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고작 같은 학년에 다니려고 일 년을 휴학한 애가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는 않겠지.

아니면 조용한 게 아니라, 아직 내가 듣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지도.

“피오르, 혹시 ‘세라’라고 알아?”

“얼마 전에 자퇴한 애?”

“자퇴?”

나는 뜻밖의 소식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지……?

카르시온과 같은 학년이 된 것도 모자라서 같은 반까지 됐는데, 이것을 포기했다고?

이렇게 쉽게?

의문에 휩싸여 고민하고 있을 때, 피오르가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리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딱히 신경 쓰지는 마.”

“너는 이상하지 않아?”

소문에 빠삭한 피오르라면 분명 그녀가 왜 휴학했는지에 대해 알고 있을 텐데.

“우리 아카데미가 자퇴 유예 기간이 좀 길어. 아마 한 달도 훌쩍 넘을걸?”

“유예 기간이랑 무슨 상관이야?”

피오르는 피식 웃으며 설명했다.

“보나 마나 관심을 끌려고 자작극 하는 거지 뭐. 내버려 두면 알아서 자퇴 번복하고 돌아올 거야.”

“그걸 어떻게 확신해?”

“비슷한 일이 몇 번 있었거든. 나나 카르시온이나.”

“그래……?”

나는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이며 알려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러나 마음 한쪽 구석 어딘가 찝찝한 기색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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