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푸핫, 푸하하!”
“웃지 마!”
“풉. 미, 미안. 그건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가, 없…… 푸하하!”
내 끝을 모르는 웃음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피오르가 광분하며 소리쳤다.
“그만 웃으라니까!”
웃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카르시온도 피오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뭔가 상상했는지 간간이 웃음을 토해 내곤 했다.
그나마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는 건 언제 왔는지 모를 쿤뿐.
쿤이 희한하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기울이며 물었다.
“알맹이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입니까, 피오르?”
그에 피오르가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쿤을 째려봤다.
“그럼 나 대신 네가 나가든지!”
“저랑 반이 다르지 않습니까. 피오르 대신 나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네가 미친 척하고 나인 것처럼 연기하면 되지 않을까?”
쿤의 한쪽 눈썹이 조용히 올라갔다.
“되겠습니까?”
“아악!”
결국, 도망칠 구석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피오르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절규 어린 비명을 질렀다.
한참 웃다가 겨우 진정이 된 나는 피오르를 위로할 겸 희소식(?)을 전했다.
“수업 끝나자마자 동아리실로 와서 아직 못 들었나 본데, 쿤도 우리 반 대표야.”
“……정말?”
동아리실 바닥에서 몸부림을 치던 피오르가 움직임을 멈추고는 쿤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는 짙은 동질감과 옅은 연민이 담겨 있었다.
나는 피오르의 신파극에 다시금 웃음보가 터져 버렸다.
“푸흡.”
내 인간관계가 넓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친구 중 두 명이나 대표로 뽑힐 수 있는지.
나는 굉장히 유쾌한 기분이 되어 평소 같지 않은 높은 톤으로 호기롭게 외쳤다.
“둘 중 한 명이 무조건 ‘미스 아레나에 당선된다’에 피오르의 체스판을 건다!”
“……왜 내 걸 거는 건데!”
피오르가 이를 아득 갈며 자신의 체스판을 소중히 끌어안았다.
인제 와서 소중한 척해 봤자, 몇 초 전까지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던 것임을 모두가 알았다.
미스 아레나.
학술제라고 쓰고 축제라고 읽는 날 진행되는 것으로, 학술제의 꽃이라고 불리는 대회였다.
아레나 아카데미에서 가장 매력적인 학생을 뽑는 대회.
단, 이 대회는 여장한 남학생만 출전 가능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나는 피식피식 웃으며 피오르를 진정시켰다.
“자자, 그만 웃을 테니까 너도 진정하고, 놀더라도 손은 움직이면서 대화하자.”
우리는 지금 ‘귀신의 집’ 주제에 맞게 동아리실 문밖의 외관을 꾸미고 있었다.
아무리 카르시온의 환상 마법으로 때운다 한들, 외관 정도는 그럴싸하게 꾸며 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열심히 꾸미던 중에, 피오르의 미스 아레나 반강제 참가 소식을 들었더니 웃음을 멈출 수가 있어야지.
“그나저나 쿤 너도 반 투표로 네 의지와 상관없이 나가게 된 건데, 생각보다 덤덤하네?”
쿤은 박쥐 모양으로 자른 종이를 여기저기 대보며 여상스럽게 입을 뗐다.
“어머니께서 워낙 저에게 이것저것 입히는 것을 좋아하셔서 어렸을 적에는 종종 드레스도 입곤 했습니다.”
“강제로?”
“제가 거부했으면 강제하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좋아하셨으니까요.”
쿤이 제 어머니를 떠올린 듯 희미하게 웃었다.
효자네.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쿤을 보고 있노라니, 오히려 피오르가 유난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피오르로 향했다.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서 얼굴에 분홍빛이 은은하게 맴돌았다.
“피오르.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만은 마. 다 같이 즐기는 축제 같은 거잖아.”
충분한 위로가 되지 못했는지 그에게서 눈총이 날아왔다.
“리엔 네가 남장을 하게 됐어도 쉽게 말이 나왔을까?”
그러자 동아리실 안쪽에 디버프 마법진을 그리고 있던 카르시온이 손을 뚝 멈추고는 중얼거렸다.
“그것도 멋있겠는데……?”
당장이라도 이사장실에 쳐들어가서 왜 미스터 아레나는 없냐 따질 기세였다.
나는 그런 카르시온의 머리를 꾹 누르며 피오르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한쪽 입꼬리를 얄밉게 말아 올렸다.
“당연히 내 일이 아니니까 할 수 있는 말이었지.”
“그럴 줄 알았다.”
피오르는 이제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로 벽에 이마를 박았다.
그러다 갑자기 분노가 치솟았는지 제 소매를 한계까지 끌어 올리고는 흥분해서 따지기 시작했다.
“아니, 어떻게 나를 대표로 뽑을 수가 있지? 봐! 검술로 단련된 내 팔의 근육을 보라고!”
카르시온은 피오르에게 음산한 얼굴로 나지막이 읊조렸다.
“좋은 말로 할 때 내려라.”
피오르는 조용히 소매를 내리고는 팔을 원위치시켰다.
나는 피식 웃으며 쿤을 턱짓했다.
“근데 그렇게 따지면 쿤도 여장하기에는 다소 큰 키 아니야?”
나와 함께 있는 세 명은 뭘 먹고 컸는지 모두 장신이었다.
아직도 성장이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쿤은 졸업할 때쯤 190cm는 가뿐히 넘지 않을까 할 정도로.
“그러고 보니 리엔은…….”
쿤이 뒷말을 흐리며 나를 바라보자 덩달아 카르시온과 피오르의 시선까지 나에게 닿았다.
“귀여워.”
“작네.”
짧고 빠르게 생각을 표현한 둘과 달리, 쿤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진지한 얼굴로 물어왔다.
“언제부터 안 크기로 결심한 겁니까?”
……저걸 말이라고 하는 걸까.
어처구니가 없어서 가만히 있으려니 피오르가 한 건 잡았다는 듯 입매를 씰룩였다.
“와, 리엔 너는 키를 조절할 수도 있었어? 진짜 대단하다. 어휴, 나도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헉, 혹시 키를 집에 두고 다니나? 탈부착식 키인 거야?”
그는 아까의 복수를 하려는 듯 나를 쉼 없이 놀려댔다.
하지만 피오르가 간과하고 있는 게 있었으니, 막상 나는 저 놀림에 아무런 타격이 없다는 거다.
그들이 더럽게 커서 그렇지, 나는 지극히 평균 키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작고 크고가 무슨 상관인가. 내가 내 키에 만족하면 됐지.
카르시온이 눈썹을 그러모으며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했다. 마치 갓 태어난 새끼 동물을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작은 리엔 귀여워…….”
그에 반해 내 눈썹은 불만으로 꿈틀거렸다.
아 글쎄, 작은 거 아니라니까.
나는 반발심이 들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카온. 너 말이 좀 그렇다?”
내 말에 놀란 카르시온이 눈을 크게 뜨며 쳐다봤다.
나는 그런 카르시온을 보며 잘 생각해 보라는 듯 말했다.
“내가 키가 컸으면 안 귀여웠을 거라는 거 아니야.”
“……!”
카르시온이 깨달음과 함께 탄식을 뱉어 냈다.
“큰 리엔이라니.”
그는 돌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얼굴을 붉혔다.
“너무 좋아…….”
이런 반응을 유도해 내려고 말한 게 아닌데.
상황이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아 짧게 입술을 비죽이고는 화제를 돌렸다.
“뭐, 어쨌든 내가 피오르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이거야.”
“뭔데?”
나는 피오르에게 척척 걸어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네가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알려 주는 건데, 여장이야말로 남자가 할 수 있는 가장 남자다운 행동이라고.”
“그런……!”
눈을 부릅뜨고는 무언가 깨달은 척하던 피오르가 내 손을 털어 내며 분개했다.
“거에 위로가 될 것 같냐아악!”
“풉, 푸흐흡.”
아, 역시 놀림당하는 것보다 놀리는 게 훨씬 재미있었다.
나는 또 한참을 웃다가 겨우 진정하고는 다시 펜을 잡았다.
내 역할은 입장 전 숙지해야 할 사항과 경고 문구 따위를 쓰는 것이었다.
펜을 끄적이다가 문득 든 생각에 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너는 왜 여기 있는 거야? 아까부터 너무 자연스럽게 일하고 있길래 딴지 걸 생각도 못 했다.”
“제가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확실히 도와주는 건 고마운데…….”
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뭐가 문제인 겁니까?”
“너도 이제 네 동아리가 있잖아. 여기서 시간을 보내도 괜찮은 거야?”
그에 쿤이 문제 될 거 없다는 식으로 옅게 웃었다.
“저는 지금 열심히 동아리 활동 중입니다만.”
“……혹시 다른 동아리에 떠돌며 기생하는 기생 동아리니?”
내 흐린 눈빛에 쿤은 빙긋 웃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조만간 알게 되실 겁니다.”
궁금하긴 했으나, 조만간 알게 될 거라는 말을 사용했으니…….
굳이 파고들 필요는 없겠지.
“그래. 언젠간 알게 되겠지.”
나는 가볍게 대답하며 다시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고* 저희 동아리에서는 안쪽에서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책임을 지지 않고 있으니, 비위가 약한 분이나 노약자, 임산부는…… 건강하세요!>
완성된 문구를 보자 뿌듯함이 밀려 들어왔다.
암. 노약자와 임산부는 누구보다 건강해야지.
나는 문구를 봐 달라며 자랑했고, 그 결과 카르시온의 칭찬과 피오르의 흐린 눈빛, 쿤의 침묵을 받아 냈다.
퍽 즐거운 준비 시간이었다.
* * *
아레나 아카데미의 학술제가 시작됐다.
외부인의 방문이 금지됐던 아카데미는 문을 열어 일반 사람들의 방문을 허용했다.
카리스데네스 포티투아.
그도 손주처럼 키운 아이를 보기 위해 타국인 아레나 아카데미로 걸음 했다.
칠흑같이 까만 흑발에 흑안을 가진 노인.
짙은 눈썹과 굳게 다물린 입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느낌을 자아냈고, 꼿꼿한 허리와 다부진 몸은 그가 젊었을 적 얼마나 단련해 왔는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심지어 나이를 짐작게 하는 주름마저 그의 기백을 돋보이게 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그는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아카데미의 학생들을 보며 오랜만에 제 아들을 떠올렸다.
“……보고 싶구나, 루드.”
카리스는 아바스칸투스 제국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자였다.
언제나 전장의 최전방에 서서 검을 휘두르는 명장.
상대국인 라그라스에서는 살인 귀, 또는 전장 위의 악몽이라고도 불렸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20년도 넘은 과거의 광영.
라그라스와 아바스칸투스 사이에 평화 협정을 맺고 난 후, 그는 제국을 받치고 있던 검을 내려놓았다.
전쟁에서 공로를 인정받아 대공의 작위를 받았으나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부모님과 제 형제들. 소중한 아내. 평생을 함께해 온 친우까지.
모두 전쟁 중에 목숨을 잃었다.
그에게 단 하나 남은 것이 있었다면…….
죽은 제 아내를 똑 닮은 아들.
십수 년을 전장에서 지내왔기에, 그는 아들이 어렸을 적 같이 시간을 보낸 기억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은퇴 후에는 아들과 질리도록 함께하며 애정을 주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이미 아들은 장성한 상태였으나 그것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두 부자는 행복했다.
잃어버린 시간은 무엇으로도 보상받지 못할 테지만, 그때만큼은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제 고집만 아니었어도 그 행복은 계속되었을 텐데.
“아둔했지. 찰나의 감정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잃었어.”
카리스에게 아들보다 소중한 것은 없었다.
때문에, 아들도 그러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만의 생각이었다.
아들은 자신이 아닌, 사랑하는 여인을 택했다.
아들이 데려온 여인은 라그라스의 사람이었다.
“루드, 나는 네가 데려온 사람이라면 뒷골목에서 굴러먹던 사람도, 신체 어딘가가 온전치 못한 불구라도 괜찮다.”
얼마나 광분했는지 차마 갈무리되지 못한 살기가 너울거리며 카리스의 몸 밖으로 새어 나왔다.
“……아버지?”
“하지만 라그라스의 사람만은 안 된다. 라그라스인만은 안 돼!”
라그라스는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간 국가였다.
아직도 그들의 손에 흙으로 돌아간 주변 이들을 생각하면 피눈물이 났다.
자신의 몸에는 그들이 남긴 평생 지우지 못할 전쟁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분개하고 둘의 결합을 반대했다.
누가 알았을까.
그 행동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것이 될 것이라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