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끈덕지게 자신을 설득하던 아들은 결국, 라그라스 여인과 함께 도망쳤다.
“아니지. 아들을 쫓아낸 것은 나였으니 내겐 도망쳤다 말할 자격도 없다.”
아들이 진지하게 드릴 말씀이 있다며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들고 왔을 때였다.
워낙 장난기가 많은 아들이었기에, 진지하게 할 말이 있다고 했을 때부터 카리스는 그 내용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보나 마나 제 사랑하는 라그라스의 여인에 대한 것이겠지.’
술이 들어간 탓일까.
그날따라 어찌나 라그라스 병사들의 손에 의해 명을 달리한 아내 생각이 나던지.
“아버지, 사실 제 연인…….”
“루드.”
아들 루드가 입을 여는 순간, 카리스의 눈빛에 섬광이 스쳤다.
“라그라스인을 내 눈앞에 데려오는 순간, 내려놨던 검을 다시 들 것이다. 직접, 내 손으로 죽일 것이야.”
그때 아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유심히 봤었어야 했는데.
어렴풋이 기억하는 아들의 얼굴은 일그러져 울고 있었던 것 같다.
그날 이후 아들이 사라졌지만, 그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젊은 날의 패기라 생각했다.
제 품을 벗어나 생활이 어려워지면 곧 돌아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은 그렇게 아들을 잃었다.
시간이 지나 라그라스에 대한 원한은 차츰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후회는 커져만 갔다.
“라그라스에서 태어난 게 뭐가 죄라고, 아들이 그렇게나 사랑한다는 여인을 밀어냈을까.”
당시에는 전쟁이 끝난 지 몇 년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때의 저가 가진 라그라스에 대한 혐오는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하나, 세월이라는 것은 사람을 참 많이 변하게 했다.
지금만 해도, 죽어도 다시는 공기조차 들이마시지 않을 거라 다짐했던 라그라스의 땅을 밟고 있지 않은가.
길었던 옛 과오에 대한 생각을 뒤로하고 그는 발을 뗐다.
“미스 아레나인가 뭔가는 어디에서 하는지 모르겠군.”
사실 아이가 나간다는 대회를 구경하러 라그라스까지 올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본능이 자신을 이곳으로 이끌었다.
전장에서 그의 목숨을 몇 번이고 살려 준 타고난 동물적인 직감은, 그가 라그라스에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카리스는 대회를 진행하는 곳을 물어보려 지나가던 사람을 잡았다.
아니,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가 누군가를 잡기도 전에 사람들이 그를 슬슬 피했다.
오랜 시간 끝에 잡은 사람은 정말 죄송하다며 머리를 박고는 부리나케 도망쳤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말이다.
“끄응…….”
참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아바스칸투스 제국에서는 모두 자신을 경외하고 떠받들었기에, 이런 대접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세월이 많이 지나긴 했군.”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했다.
아무리 이곳이 라그라스 제국이라고는 하나, 그렇게나 죽이고 싶어 안달 냈던 자신을 못 알아본다는 게.
하긴, 알아봤으면 그게 더 곤란했을 터였다.
“……역시 라그라스에는 오는 게 아니었다.”
불쾌함으로 인해 카리스의 몸에 살기가 퍼져 나왔다.
그때였다.
옥구슬처럼 청아하면서도, 아직 앳되어 보이는 목소리가 그를 사로잡았다.
“무슨 문제 있으세요, 할아버지?”
카리스는 놀라 살기를 급히 갈무리하며 목소리의 주인을 살폈다.
일반인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게 말을 건 아이는 살기를 느끼지 못한 걸까?
저를 보는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섞여 있지 않았다.
‘흑안…….’
지금 보니 자신과 같은 흑발에 흑안을 가진 아이였다.
다채로운 머리카락을 가진 라그라스인들과 달리, 아바스칸투스 사람의 대부분은 어두운 계열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흑발에 흑안은 특히나 더욱 흔하지 않은 조합.
카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어 물었다.
“너는 아바스칸투스 제국의 사람인가?”
“아니요. 라그라스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예요.”
그 대답에 카리스의 마음에 작은 실망감이 몰려왔다. 어디서 비롯된 실망인지는 그 자신도 몰랐다.
리엔은 그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보다 아까부터 계속 이곳에 서 계시던데 무슨 일 있으세요?”
“……길을 찾고 있다.”
“어디를 찾아가시려는데요?”
“손주나 다름없는 아이가 미스 아레나인가 뭔가에 나온다길래.”
“아!”
리엔은 미스 아레나라는 말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카리스는 그런 리엔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아이가 웃는 모습을 보니 가슴 한구석이 울렁이는 것 같았다.
제 아들도 저런 얼굴을 하며 밝게 웃었었는데.
“죄송해요. 요즘 그 단어만 들으면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되었다. 그 나이 때는 웃는 게 제일이지.”
리엔은 겉보기보다 자상한 분이라고 생각하며 편하게 말했다.
“미스 아레나에 나간다니, 손주분이 한 매력 하나 보네요. 빨리 보고 싶으시겠지만, 아쉽게도 미스 아레나는 오후 늦게 시작해요.”
“그런가.”
“그동안은 아카데미에서 여러 부스를 운영하고 있으니 둘러보시는 것도 좋으실 것 같아요.”
리엔은 손을 들어 아카데미 건물 중 한 곳을 가리켰다.
“손주분을 보는 건 저기 보이시는 건물로 들어가시면 된답니다. 안내표시가 잘 되어 있어서 주변만 가도 쉽게 아실 수 있을 거예요.”
“고맙……군.”
그녀는 카리스의 문제를 해결해 준 후에야 마음을 편하게 하며 몸을 돌렸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즐거운 시간 보내세…… 할아버지?”
그러나 발을 떼려는 순간, 카리스가 신음을 흘리며 무너져 내렸다.
리엔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서둘러 몸을 낮춰 카리스를 부축했다.
그는 한쪽 다리를 부여잡고는 고통을 참으려는 듯 이를 악물고 있었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괜, 찮으니 가던 길 가거라. 익숙한 일이야.”
지금 그가 겪고 있는 통증은 환상통이었다.
카리스는 전쟁 중에 신체가 몇 번이나 잘려 나간 전적이 있었다.
아무리 검에 통달한 전쟁 영웅이라고 하나, 그 또한 사람이었다. 제게 집중되어 쏟아지는 공격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단순히 검을 잘 쓰는 기사가 아니었다. 아바스칸투스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랬기에 카리스는 죽어서도, 다쳐서도 안 됐다.
카리스의 신체가 잘려 나갈 때마다 제국은 전쟁 중에 있는 최고위 마법사, 성직자들을 비상 소집했다. 그리고 그의 신체를 말끔히 접합해 놨다.
이어진 신체는 잘렸던 흔적 하나 없이 말끔했다.
하나 잘려 나갔을 당시 고통은 잊을 수 없을 만큼 생생했고, 그때의 기억은 예상치 못할 때 환상통을 불러일으켰다.
리엔이 그런 카리스를 그냥 두고 갈 수 있을 리 없었다.
급하게 자신의 가방을 뒤졌다.
익숙한 일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한두 번 겪은 통증이 아닌 듯했다.
다행히도 리엔의 가방에는 얼마 전 한스가 출시 기념이라며 주고 간 진통제가 들어 있었다.
그때는 자신이 개발자인데 굳이 주지 않아도 괜찮다며 거절했었는데.
한스가 이것도 기념이지 않냐며 꾸역꾸역 가방에 넣어 준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그녀가 건넨 약병에 카리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리엔은 침착하게 그를 설득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 건네는 약이라 거부감이 드시겠지만, 한 번만 믿어 주세요. 이건 그냥 진통제일 뿐이에요.”
하지만 카리스가 리엔의 약을 받지 않은 것은 그녀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큭……. 마약성 진통제를 먹을, 바에는 버……티는 게 낫다.”
환상통도 진통제로 고통을 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쟁을 겪어 왔기에 누구보다 마약성 진통제의 부작용을 잘 알고 있었다.
고통을 잠재우기 위해 시작한 진통제의 복용은 중독으로 이어졌다.
그는 삶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어떻게 살아남은 목숨인데, 환상통 때문에 남은 인생을 망칠 수는 없었다.
리엔은 카리스의 완강한 거부에 다소 당황했다.
진통제를 한두 번 복용하는 것 정도로는 중독 증세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지나치게 진통제를 거부하고 있었다.
마치 중독되어 삶을 망친 이들을 수도 없이 목격한 사람처럼.
말미에는 중독될 것을 알면서도 반복해서 진통제를 삼키는 경우는 드물다.
평생 약을 달고 사는 게 나을 정도로 심각한 고통이 아닌 이상.
……아아.
리엔은 카리스의 몸 곳곳에 남은 깊은 상흔을 보고 깨달았다.
‘제국 전쟁에 참전하신 분이구나.’
“이 진통제에는 마약 성분이 들어 있지 않아요. 장기간 복용하셔도 중독되지 않고, 부작용도 거의 없죠.”
믿지 못할 말이라는 듯 카리스가 눈을 부릅떴다.
그런 진통제가 있을 리 없었다. 아니, 존재하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신성력을 축약한 약물로서, 돈이 있다고 해도 절대 쉽게 구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나를 기만하는 게냐.”
“제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나요?”
거짓이 아니었다. 아이의 눈동자는 진실만을 품고 있었다.
카리스는 홀린 듯 약병을 받아 들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그는 아이가 보답으로 제게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요구하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셈으로 약을 들이켰다.
꿀꺽. 그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며 약물을 삼켰다.
“마나를 운용하실 줄 아시나요?”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리엔이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마나를 몸에 순환시키는 것만으로 약의 효력을 빨리 들게 할 수 있어요.”
카리스는 말없이 마력을 끌어올려 몸을 순환시켰다.
오러에 통달한 그에게는 너무나도 쉬운 주문이었다.
마나를 순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통증이 사그라드는 게 느껴졌다.
통증이 완벽하게 잡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를 악물며 버텨야 할 정도도 아니었다.
마약성 진통제가 아닌데도 이렇게 빠르게 효과를 볼 수 있다니.
“……이걸 어디에서 구했지?”
리엔은 우연히 상점에서 사게 됐다고 말하려다, 솔직하게 답하기로 했다. 찰나의 변덕이었다.
“제가 개발한 진통제에요. 정식으로 출시한 제품이니 품질은 보증할 수 있죠.”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텅 빈 약병과 리엔을 번갈아 본다.
“네가 개발했다고?”
“이래 봬도 능력 있는 약초가거든요.”
카리스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약초가.
그래, 제 아들이 데려왔던 여인도 약초가라고 했었지.
“이 은혜는 꼭 보답하지. 네 이름을 알려 주겠느냐.”
“보답은 필요하지 않아요. 뭔가를 바라고 도움을 드린 게 아니니까요.”
그저 제 오지랖 때문이었죠.
리엔은 배시시 웃으며 제 명찰이 위치한 부분을 가리켰다.
“저는 리엔이라고 해요.”
“……이름을 보니 라그라스인이 맞는 것 같구나.”
복잡스럽지 않고 발음하기에 편한, 전형적인 라그라스식 이름.
문득, 귓가에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저는 나중에 자식을 낳으면 라그라스식으로 짓고 싶어요. 솔직히 아바스칸투스 이름은 너무 기억하기 어렵잖아요.’
그때도 노발대발하며 호통을 쳤었더랬지.
콧잔등이 시큰했다.
오늘따라 왜 이리 아들 생각이 많이 나는 건지.
이상한 날이었다.
“너와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구나. 이름을 지어 준 부모는 참 고민을 많이 했겠어.”
리엔은 그 말에 오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얼마 전 피오르의 형인 루에게서도 들은 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인지 그 말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리엔은 피어오른 오묘한 감정을 숨기며 씩 웃어 보였다.
“……저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