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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73)화 (73/161)

73화

“벌써 시작했겠네.”

나는 뛰듯이 걸으며 시간을 가늠해 봤다.

도중에 곤란해 보이는 표정의 할아버지만 발견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늦지는 않았을 텐데.

“그래도 좋은 일 했으니까.”

카르시온과 피오르에게 미안하긴 했으나 후회는 없었다.

게다가 내가 없었다면 할아버지는 계속 고통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을 것 아닌가.

사실 처음 봤던 할아버지의 얼굴은 무표정에, 근엄하기만 했다.

그런데 어쩐지 그 근엄한 표정에서 곤혹스러움이 묻어 나오는 것 같아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실제로도 도움이 필요하신 상태였고.

“앞으로는 진통제도 잘 챙겨 드셨으면 좋겠다.”

진통제는 한스네 상단을 통해 유통 중이라고 설명해 드렸으니 필요할 때에 구해 드실 것이다.

절대 자신에게 떨어질 수익을 기대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누구보다 강인하고 단단해 보이던 할아버지가 고통에 무너지는 모습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아쉬운 것 같기도 하다.

할아버지 생각을 하며 바쁘게 발을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동아리실에 다다랐다.

한참을 늦었으니, 이미 영업을 시작했을 거라는 건 예상했다.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건…….

“줄이 왜 이렇게 길어?”

대충 때우려고 연 ‘귀신의 집’인데 웬일인지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줄을 선 사람 중에는 유독 커플이 많았다.

여기저기서 ‘여보는 내가 지켜 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거나 ‘우리 애기 무서워요?’와 같은 불쾌한 말들이 들려왔다.

내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다들 돈이 썩어 넘치나…….

사람들을 지나쳐 동아리실 문 바로 앞까지 도착하자, 나를 발견한 피오르가 반갑게 인사했다.

“뒈질래?”

“미안. 중간에 내 고질병이 도져 버렸어.”

“또?”

내가 고개를 주억이자 피오르는 피식 웃었다.

“대충 그럴 거라고 예상하긴 했어. 네가 아무 일도 없이 약속을 늦을 사람은 아니잖아.”

“어쩐 일로 훈훈하게 포장해 준대.”

“어차피 너랑 나랑은 교대로 서 있기로 했으니까, 내가 먼저 한다고 생각하면 억울할 것도 없잖아.”

“그건 그래.”

뻔뻔한 대답에 피오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늦었으면 최소 일 분은 죄책감을 느껴 줬으면 하는데.”

“미안해.”

나는 바로 수그러들었다.

아무리 이유가 있었다고는 하나, 죄인은 억울함을 피력해서는 안 되는 법.

피오르는 사과를 받고 싶어서 말한 건 아니라는 듯 대강 고개를 까딱였다.

“카르시온한테 왔다고 인사만 하고 너는 놀다 와. 네 얼굴도 못 보고 시작한다고 아주 죽을상이더라.”

“내가 놀다 오면 너는?”

“나는 미스 아레나 준비도 해야 하니까 지금 하고, 중간에 너랑 교대하면서 빠질게.”

“알겠어. 근데 피오르, 손님 중 유독 커플들이 많은 것 같지 않아?”

“아, 그건…….”

그때였다. 동아리실에 들어가 있던 사람들의 체험이 끝난 듯 벌컥 문이 열렸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한 남학생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힘껏 뛰쳐나갔다.

“으아아아악! 살려 줘! 살려 달라고!”

어찌나 죽을힘을 다해 뛰는지 금세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다.

나는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피오르를 바라봤다. 그가 상큼한 표정으로 눈을 휘어 접었다.

“보시다시피 사랑 테스트 장으로 조금 소문이 났거든.”

“사랑 테스트……?”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말하려 할 때, 열린 문 사이로 여학생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쾅-!

스스로 문을 닫은 그녀의 표정은 귀신의 집에서 나온 것 치고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소리라도 들렸으면 대충 짐작했겠지만, 방음 마법을 걸어 놔서 알 길이 없었다.

그녀는 눈을 번뜩이며 남학생이 뛰어간 복도를 노려봤다.

“지켜 주겠다더니, 날 미끼로 던지고 튀어?”

아아…….

우리 동아리가 커플 브레이커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구나.

조용히 피오르에게 엄지를 치켜 올려 주었다. 그도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따라 엄지를 올린다.

“뒤에 손님 기다리니까 빨리 인사만 하고 나와, 리엔.”

“알겠어.”

나는 서둘러 동아리실 안으로 들어갔다. 더 많은 커플을 찢어 놓으려면 조금도 지체해선 안 됐다.

문을 닫자 어둠이 나를 덮쳤다. 빛이 들어오지 않도록 창문을 완전히 막아 놓은 탓이었다.

“카온, 나왔…….”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깜깜하기만 했던 공간이 뒤바뀌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숲속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환상 마법이었다.

“오, 이런.”

손님인 줄 알았나 보네.

……하는 수 없지. 최대한 빨리 끝내고 나가는 수밖에.

카르시온이 좋은 것만 보여 줘야 한다며 결국 나에게는 끝까지 환상 마법을 걸어 주지 않았는데.

이렇게 체험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숲속을 구경하며 걸음을 옮겼다. 걷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도 실제로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테지.

환상 마법은 꽤 현실감이 있었다.

으스스한 안개와 풀벌레 우는 소리까지 디테일하게 살아 있어서 더욱 그랬다.

그의 구현 능력에 감탄하며 걷고 있을 때였다.

뒤쪽에서 기괴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싶어 뒤를 돌아보니 수백 개의 새하얀 손이 나를 향해 뻗쳐 오고 있었다.

나는 손들이 뻗쳐 오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안 그래도 지각한 바람에 뛰듯이 걸어오느라 힘을 썼는데, 또 뛰기에는 귀찮아진 탓이다.

어차피 환상인 걸 알기에 무섭지 않았던 것도 있고.

무심히 바라보던 중, 수백 개의 손 중에서 나를 향해 달려들지 않는 하나의 손이 눈에 띄었다.

가장 위쪽에 자리한 손이었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는다. 아무리 실제 같다 하더라도 환상이었기에 당연했다.

최상위 마법 중에는 실제처럼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건 말 그대로 최상위 마법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어쩐지 저 손만은 뭔가 잡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고,

“잡았다.”

단단히 잡은 그 손을 내게로 끌어당겼다.

귀신의 집을 한다며 동아리실을 텅텅 비워 놨으니, 무언가 잡혔다면 하나밖에 없었다.

카르시온.

하지만 간과한 게 있었다.

내가 잡은 손은 상당히 위쪽에 있었고, 카르시온은 손을 잡아 올 거라 전혀 생각지 못했다는 것.

공중에 마법으로 부양하고 있던 카르시온이 갑작스레 당겨지며 중심을 잃고 내 쪽으로 추락했다.

그의 무게에 의해 몸이 뒤로 넘어간다. 찰나의 시간이 더없이 길게 느껴졌다.

이대로라면 바닥에 뒷머리를 찧고 말 것이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쿵.

분명 넘어지는 소리는 났는데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슬며시 눈을 뜨자 충돌로 인해 환상 마법이 풀렸는지 주변이 깜깜했다.

상체를 일으키려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불현듯 손에 차가운 바닥 대신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따뜻한 온기?

나는 그제야 짚은 손뿐만 아니라, 깔고 앉은 곳 밑으로 느껴지는 온기를 인식했다.

“카온?”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했다.

분명 뒤로 넘어졌는데 나는 뒤가 아닌, 앞으로 엎어져 있는 상태였다. 이게 어떻게 된…….

맙소사. 카르시온이 나 대신 밑에 깔렸나 봐……!

서둘러 카르시온의 머리로 추정되는 곳으로 더듬거리며 손을 옮겼다. 어두워서 어디가 어디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카온, 머리 괜찮아? 안 다쳤어?”

“괜찮…… 읏!”

카르시온은 괜찮다는 말을 하다 말고 통증을 호소했다.

“카온!”

나는 더욱 당황하며 멈칫했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그러자 카르시온이 급히 내 이름을 불러왔다.

“리, 리엔!”

“그래, 나 여기 있어. 어디가 그렇게 아픈 거야? 설마 바닥에 머리를 찧은 건 아니지?”

“괜찮으니까! 정말 하나도 다치지 않았으니까! 조금만 떨어져 줄 수 있을까……!”

그 말에 깜짝 놀라 얼른 카르시온의 위에서 내려왔다.

머리가 괜찮은지 확인하기만 급급해서 그를 괴롭게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배 위에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미안해. 숨쉬기 힘들었지.”

“내가 힘든 건 그쪽이 아니라……. 아, 아무것도 아니야.”

어둠 속에서도 카르시온이 고개를 빠르게 가로 젓는 게 느껴졌다.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어쨌든 나는 다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아까 아파서 말도 다 잇지 못했잖아.”

“그, 그건……. 손에 가시가 찔려서 그랬던 거야.”

“뭐? 봐봐! 아니지, 지금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잠시만 기다려 봐. 마법 전구만 빠르게 켜고 올게.”

“리엔, 잠시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내 팔을 덥석 잡았다.

“으응?”

“어, 어둠에 겨우 눈이 익숙해졌거든. 가시도 방금 마법으로 뺐으니까, 굳이 불을 켤 필요는 없는 것 같아!”

“그래……?”

뭔가 어투가 굉장히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것 같았다.

그래도 불을 켜는 것만큼은 정말 싫어하는 것 같아서 나는 결국 걸음을 멈췄다.

조금 시간이 지났더니 카르시온의 형체가 어렴풋이 보인다. 그가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불 안 켤 거지……?”

“네가 싫다면 하지 않을게.”

나는 멋쩍게 목덜미를 문지르다가 감사를 표했다.

“그보다, 받아 줘서 고마워. 꼼짝없이 머리가 깨지는 줄 알았는데.”

“아니야. 애초에 너에게 환상 마법을 건 내가 잘못인걸. 나야말로 미안해. 너에게 그런 걸 보여 주고 싶지 않았는데…….”

“괜찮아. 나름 신기한 경험이기도 했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네.”

그 말을 끝으로 우리 사이에서 오가는 말은 없었다.

“…….”

“…….”

깊은 침묵이 내려앉는다.

갑자기 공기가 왜 이렇게 어색해졌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카르시온이 대뜸 입을 열어 억겁과 같았던 침묵을 깼다.

“여긴 피오르랑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교대 시간까지 놀다 와.”

“으응.”

나는 이때다 싶어서 벌떡 일어나 척척 문가로 향했다.

그런데 자리를 벗어나기 전, 카르시온은 교대도 없이 일해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카르시온뿐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해서, 그에게 보상을 해 주기로 했다. 약간의 사심을 담아서 말이다.

“카온.”

“응?”

“우리는 오후 운영 없이 간단하게 오전만 운영하기로 했잖아.”

“그랬지.”

영업은 오전 오후로 나뉘었는데 둘 중 한 타임만 채워도 의무는 끝났다.

대충 구색만 맞추고 끝내기를 원했던 우리는 당연히 오전만 하고 영업을 끝내기로 했고.

“그러니까, 오후에는 나랑 같이 다른 동아리 구경하러 다닐래?”

“어……?”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라는 듯 카르시온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싫어서 낸 소리가 아님을 알았다.

“싫어?”

“어어……?”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대답을 대신해 줬다.

“싫어도 안 돼. 너 아니면 나랑 데이트해 줄 사람이 없거든. 거절은 거절한다.”

문을 열자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빛을 받아 절로 찡그려졌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내 입가에 피어난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 이따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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